[비즈한국] 병원에 가면 어쩐지 위축이 된다. 내가 필요해서 정당하게 돈을 내고 진료를 요구하는 데도 의사 선생님은 권위로 가득 차 보이고, 간호사 선생님은 사무적으로, 원무과 직원 또한 뻣뻣해 보인다. 환자의 정당한 권리를 말하고 싶지만 어느 순간 병원 특유의 권위에 주눅이 든다.
개인적으로 최근 병원에 드나들 일이 많아지면서 나도 모르게 병원이란 무엇인가, 환자와 의사의 거리감은 어느 정도인가를 한참 고민하곤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그간 숱하게 접했던 의학 드라마를 떠올렸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아무래도 ‘하얀 거탑’이지만, 병원 내 권력 다툼은 순수한 환자나 환자 보호자 입장과는 거리가 멀다.
20년 전 드라마인 ‘해바라기’가 떠오른 건 병원에서 지새던 어느 날 밤이었다. 피곤에 찌들었음에도 애써 상냥함을 탑재하려 애쓰는 당직 주치의, 아마도 레지던트일 의사 선생님을 보면서, 순간 앞머리를 곱게 드리웠던 김희선이 출연했던 ‘해바라기’가 생각났다. 현실의 병원에선 쉬이 찾아볼 수 없지만, 환자나 보호자 입장에서는 더없이 손을 잡고 싶은 의료진이 진을 치고 있던 그 드라마 말이다.
한국 드라마에서 의학 드라마는 어느 정도 ‘흥행불패’의 장르다. ‘종합병원’부터 ‘의가형제’ ‘해바라기’ ‘외과의사 봉달희’ ‘하얀 거탑’ ‘뉴하트’ ‘브레인’ ‘골든타임’ ‘굿닥터’ ‘낭만닥터 김사부’ 그리고 최근의 ‘라이프’에 이르기까지 의학 드라마는 기본적으로 시청률을 보장한다.
사람이 태어나는 동시에 죽고, 또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공간이 병원이니 삶의 희로애락은 물론이요, 온갖 드라마틱한 요소가 집약적으로 녹아들지 않겠는가. 그중 ‘해바라기’는 최고의 의학 드라마라 할 순 없어도,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지상파 드라마에 시청률이 집중되었던 1990년대라는 ‘버프’를 받긴 했지만 최고 시청률 38.9%, 평균 시청률 32%라는 역대 의학 드라마 최고 시청률은 쉽게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해바라기’는 한국에서 전문직 드라마가 쉽게 범하는 ‘○○에서 연애하는 드라마’로도 볼 수 있다. 대학종합병원 신경외과를 중심으로 전문의와 레지던트, 간호사 사이에 여러 모로 썸과 연애가 오가니 ‘병원에서 연애하는 드라마’라고 말할 수 있겠다.
게다가 주인공 격인 신경외과 전문의 장현우와 신경과 레지던트 1년 차인 한수연을 당대 톱스타인 안재욱과 김희선이 맡아 여러 모로 트렌디 드라마의 전형을 따랐기 때문. 1990년대 후반기 여신이었던 김희선이 가지런히 앞머리를 내리고 머리띠를 하고 나와(앞머리는 가발이었다고) 유행 좇는 여성들이 저마다 김희선 앞머리를 했던 기억도 선명하다.
안재욱이 맡은 신경외과 전문의 장현우는, 의학 드라마의 전형적인 인물보다는 로맨스 드라마에서 흔히 보이는 ‘나쁜 남자’의 전형이어서, 지금 보면 어이가 없을 만큼 장르 드라마보다는 로맨스 드라마의 전형을 따른다.
동기 최하경(추상미)과 과거 연인이었던 그는 오해 끝에 하경과 헤어지고 자신에게 접근하는 한수연(김희선)과 관계를 전진시키는데, 그 와중에 “가까이 오지 마. 나 지금 위험하다”라는, 지금 보면 실소가 나오는 대사를 내뱉곤 했다. 물론 환자에 대한 열의가 지나쳐서 전문의에게 “당신, 의사 아니야”라고 되바라지게 쏘아붙이는 한수연도 만만치는 않았지만.
사실 주인공 격인 장현우와 한수연만 보면 ‘무슨 대학종합병원이 이 따위인가’ 싶고, 그 외에 병원에서 연애하는 각종 인물들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바라기’의 장점은 휴머니즘이 강조될 수밖에 없는 의학 드라마 특유의 클리셰를 각각의 인물들에 삽입하며 적절히 감정에 호소한 것이다.
종교의 힘을 믿으며 의학을 멀리하며 죽어간 아버지를 둔 장현우부터, 젊은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아버지 때문에 자살한 어머니를 목도하여 정신병을 앓았던 한수연, 현우와 하경이라는 잘난 동기들 사이에 끼어 실력 차를 느끼며 결정적 순간마다 환자를 잃은 하준서(남성진), 직접 아들의 수술을 맡았다가 아들을 떠나보낸 신경외과 과장 서남준(고 조경환), 신경외과 치프 레지던트였지만 루게릭병을 앓으며 병원을 떠나야 했던 고상도(안정훈), 간호사 시절 실수로 아이를 죽게 만들어 정신병동에 입원하게 된 문순영(김정은) 등 어느 인물 하나 만만치 않은 아픔을 가지고 있다.
질곡 있는 사연을 딛고 제대로 된 의료인으로 성장하는 것이 16부작 ‘해바라기’의 장점이자 미덕이다. 나쁜 남자 장현우와 옛 연인 최하경, 최하경에게 마음이 있는 하준서, 장현우와 새로 관계를 맺는 한수연, 그리고 한수연을 사랑하는 착한 남자 권인찬(한재석)의 오각 관계가 주를 이루는가 싶지만 어느 순간 드라마는 각 인물의 과거 사연에 집중하고, 서브 캐릭터인 정신병원 환자 문순영과 신경외과 레지던트 1년 차인 허재봉(차태현)의 풋풋한 사랑, 고상도와 어수룩한 간호사 이은주(최강희)의 코믹하고도 눈물겨운 결말에 집중한다.
분명 병원에서 연애하는 드라마이긴 한데, 연애 상대만큼 환자에게도 어처구니없이 열정을 퍼붓는 의료인들이기에 그들을 외면할 수 없다고나 할까. 내가 환자라면, 그리고 환자의 보호자라면, ‘하얀 거탑’의 거만한 천재 외과의사 장준혁(김명민)보다 환자 한 명 한 명에 집중하는 ‘해바라기’ 의료진의 손을 붙들 것 같으니까.
마지막 회에서 루게릭병을 앓는 고상도가 신경외과 과장 남준에게 보낸 편지의 구절처럼, “마치 하늘을 바라보는 해바라기처럼, 의사들은 초라하게 그리고 처절하게 그리고 하염없이 하늘만 바라보는 존재”를 현실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20년 전 드라마 ‘해바라기’를 추천한다.
필자 정수진은? 영화를 좋아해 영화잡지 ‘무비위크’에서 일했고, 여행이 즐거워 여행잡지 ‘KTX매거진’을 다녔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 홈페이지에서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이며,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지금은 프리랜서를 핑계로 종일 드라마를 보느라 어깨에 담이 오는 백수 라이프를 즐기는 중.
정수진 드라마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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