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지난 11월 14일 패키지 전문 여행사 보물섬투어가 서울회생법원에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11월 23일에는 허니문전문여행사 허니문베이가 자취를 감추면서 고객들에게 사기죄로 고소당했다. 최근 폐업한 더좋은여행, e온누리여행사, 탑항공 등에 이어 소비자에게도 이름이 익숙한 K 여행사와 T 여행사 역시 부도 위기라는 소문으로 흉흉하다. 해외 여행객은 해마다 늘고 항공업계는 쾌재를 부르는데, 여행업계에는 문닫는 여행사가 급증하고 있다. 그 현황과 원인을 들여다봤다.
보물섬투어 대표는 부도 직전인 11월 12일 거래하던 현지 랜드사 대표 10여 명을 초대해 “부도 직전이니 지분 참여 방식으로 투자를 해달라”는 이야기를 꺼냈다고 한다. 애초 초대한 건 10여 명이지만, 불안했던 랜드사 대표 50여 명이 몰려갔던 차였다. “깔려 있던 미수금 받으러 갔다가 투자를 하라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될지 헛갈렸다”는 게 현장에 있던 랜드사 대표의 전언이다. 다른 랜드사 대표는 “미수금 70%를 투자금으로 돌리고 30%만 돌려받는 방법을 제안 받았다”면서 “말이 투자지 칼 없는 강도에게 돈 뺏기는 기분”이었다고 털어놨다.
단초는 역시 홈쇼핑 판매 부진이었다. 하지만 이는 겉으로 드러난 이유일 뿐, 고질적 이유는 따로 있었다. 보물섬투어는 동남아 저가 패키지로 25년여 영업을 해왔다. 그러다 최근 홈쇼핑에서 유럽 여행 상품을 판매했다. 동남아보다 단가가 높은 유럽 상품을 팔아 자금을 돌리기 위해서였다는 게 거래하던 랜드사 관계자들의 이야기다. 200만 원의 상품을 500~1000여 명에게 팔 경우 방송 한 번으로 10억~20억 원의 자금을 쉽게 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홈쇼핑 판매를 하고 있는 패키지 여행사 대표 A 씨는 “거액의 수수료를 주고 남지도 않는 홈쇼핑 대량 판매를 한다는 건 대놓고 자금을 돌리겠다는 심산이다”며 “고객에게 여행경비를 받아 돈이 필요한 곳에 돌려막기 하는 건 IMF 이후 계속된 여행업계 고질병이다. 어디 한 곳에 동맥경화가 걸리면 갑자기 죽는 거다”라고 말하며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A 씨는 “패키지 여행사는 대부분 현지 랜드사에 미수금을 깔고 고객에게 받은 돈으로 운영 경비를 충당하거나 급한 불부터 끈다. 때로는 관련 사업에 투자하기도 한다. 랜드사에서 미수금을 독촉하면 물량을 다른 랜드사로 돌려버리기도 한다”며 “실제로 부도 직전의 여행사들은 여러 랜드사에 미수금을 까는 식으로 계속 랜드사를 바꾸면서 돈을 돌린다”고 말했다. 고객에게 받은 돈을 여행경비로 지불하지 않고 미루면서 그 돈을 다른 곳에 쓴다는 얘기다. 자금 돌리기는 랜드사에서 현지 업체로도 이어진다. 랜드사가 현지 식당이나 호텔 등에 결제해주어야 할 돈을 미루다가 부도가 나기도 한다.
보물섬투어가 랜드사에 주지 않은 미수금은 40억 원에 달하고 그 외 부채도 10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올 중반기부터 보물섬투어가 대기업의 인수 물망에 올라와 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업계 관계자들은 이 역시 거래 랜드사와 직원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으로 의심된다고 입을 모았다.
보물섬투어와 거래했던 랜드사 대표 B 씨는 “국내 패키지 여행사들은 유럽이든 동남아든 어디든 팔 수 있다. 그만큼 자기만의 무기가 없다. 특화된 프로그램도 없을뿐더러 똑같은 일정의 현지 랜드사에 덤핑으로 넘기는 것이니 어디든 무슨 상관이겠냐”고 말했다.
최근 사기죄로 고소당한 허니문 전문여행사 허니문베이의 경우 영업 중단 이전에 구매자들에게 각종 할인을 빌미로 현금을 모은 뒤 11월 23일 갑작스럽게 홈페이지를 폐쇄하고 잠적했다. 이들은 고객들의 카드번호를 도용해 부정 사용한 정황까지 포착됐다. 여행사에 예약했다가 신혼여행도 못 가고 피해를 본 70여 명의 피해자들은 11월 23일 구로경찰서에 회사를 고소했다. 서울시관광협회에 따르면, 고소 당시 피해 액수는 약 3억 5000만 원이나 피해자가 계속 추가되고 있어 정확한 피해 규모는 두 달 후에나 알 수 있다.
큰 여행사들도 상황이 좋지만은 않다. 업계 1위 하나투어는 10월부터 12월까지 비상경영체제를 선언하고 영업비와 홍보 마케팅 비용을 50% 줄였다. 얼마 전부터는 경영 전반에 대한 컨설팅을 받고 있다. 하나투어가 발표한 9월 해외여행 상품 판매는 24만 200여 명으로 전년 동월 대비 14% 감소했다. 대규모 인원 감축 소문도 돌고 있다. 이에 대해 하나투어 관계자는 “인원 감축 소문은 사실이 아니다. 경영 컨설팅을 받고 있는 것도 맞고 올 연말까지 비상경영체제에 돌입한 것도 맞지만, 인원 감축은 아직 정해진 바 없다”고 밝혔다.
한 업계 관계자는 “하나투어는 아웃바운드 전문인데, 중국인만 보고 국내 면세점 사업과 호텔사업 등 인바운드에 뛰어들면서 손해가 많았다. 아웃바운드에서 번 돈으로 면세점과 호텔 적자를 충당했다. 차라리 해외에서 호텔 사업을 했더라면 내국인의 출국이 늘고 외국인도 받을 수 있으니 성공했을 것”이라는 진단을 내놓았다.
하나투어보다 여러 면에서 보수적으로 경영하는 모두투어 역시 최근 직원들에게 1~2년 치의 연봉과 창업지원을 약속하며 부장급 이상에게 희망퇴직을 권고했다. 임원급 직원들을 대거 줄이겠다는 심산이다. 레드캡투어는 패키지 사업부를 축소하고 법인영업과 MICE(전시 이벤트 여행)를 위주로 운영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권고사직을 통한 일부 인원 감축도 있었다.
한국관광공사 발표에 따르면, 올 7월에 출국한 해외 여행객 수는 249만 5297명이다. 전년 동월 대비 4.4% 증가했다. 이 가운데 여행사를 통한 송출객 수는 153만 6240명에 그쳤다. 매년 해외여행을 떠나는 내국인 수는 늘어나지만, 여행사의 여행 상품을 구매하는 여행자는 줄어들고 있다는 말이다. 그에 따라 폐업하는 여행사도 급증하고 있다.
앞서 말한 더좋은여행, 탑항공, 보물섬투어 등은 그나마 규모가 있는 곳이라 폐업 소식이 알려졌지만, 더 작은 여행사들은 소리 소문도 없이 문을 닫고 있다. 11월 3일 서울시 발표에 따르면, 서울시에 여행업으로 등록된 여행사 가운데 올해 1월부터 9월까지 폐업한 곳이 248개에 달한다. 11월 30일 현재 서울시에 등록된 여행사는 총 4714개이다.
해외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여행업을 하는 C 씨는 “한국은 분명히 계층이 존재하는데 여행 서비스만큼은 무차별적이다. 외국처럼 상위 10%나 1%에 특화된 여행사가 거의 없다”며 “오지 트래킹을 전문으로 하는 혜초여행사나 극지방여행 같은 도전 지향의 상품을 파는 신발끈여행사 등 취향에 따른 전문 여행사는 있어도, 일반적인 여행을 고급으로 설계해주는 개인 맞춤 여행사는 거의 없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라고 했다.
C 씨는 패키지여행 아니면 자유여행으로 카테고리를 나누는 한국의 여행 문화 자체가 특이하다며, 고객의 여행 경험과 문화 수준이 천차만별인데, 그 수준을 맞출 수 있는 여행사 상담직원이 과연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돈은 있지만 자유여행을 하기에는 시간도 체력도 없는 계층이 꽤 넓다고 보는데 왜 그 시장은 공략하지 않는지 모르겠다”며 의문을 제기했다.
랜드사 대표 D 씨는 좀 더 과격한 표현을 썼다. “어찌 보면 한국의 패키지여행이란 것이 처음부터 사기에 가깝다. 그럴 듯한 사진과 문구로 유혹한 후에 여행의 설렘을 담보로 1인당 몇십만 원부터 몇백만 원까지 받아서 자기는 수익을 챙기고 원가도 제대로 주지 않고 현지 싸구려 랜드사에 넘겨버린다”며 “랜드사 입장에선 원가는 최대한 줄이고 고객의 쇼핑과 옵션에서 수익을 챙겨야 하니 질 좋은 여행이 되겠나. 그걸 한 번이라도 경험한 고객이 또다시 저가 패키지상품을 살 리 만무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다른 산업은 최첨단을 달리는데 어떻게 여행 산업만은 이렇게 후진적인 모습으로 몇십 년간 유지되고 있는지 모를 일”이라며 개탄했다. 또 싼 상품, 가성비만 찾는 고객에게도 문제가 있다며 “국민의 여행수준이 이런 패키지 여행사를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여행사들의 잇단 폐업은 이제 되돌리기 어려워 보인다. 여행업계에서 30여 년간 잔뼈가 굵은 여행사 대표 E 씨의 전망을 들어보자.
“여러 지표와 현상을 볼 때 아웃바운드 시장(내국인의 해외여행)이 지금처럼 저가 패키지 상품 위주로 돌아가는 생태계에서는 여행사의 전망이 어두울 수밖에 없다. 올해엔 중소여행사 6~7개가 부도났지만 내년엔 60~70개가 될 수 있다. 대부분의 여행사가 5년 안에 사라질 것이다. 한두 개 여행사가 아닌 여행업 전체에서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답이 없다.”
이송이 기자
runaindia@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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