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뜬금없이 고백하자면 나는 ‘왕실 덕후’다. ‘태정태세문단세…’를 외우기 전부터 입을 헤 벌린 채 사극을 시청했고, 좀 더 커서는 이역만리 타국의 왕실 계보도를 줄줄 꿰었다. 어릴 때는 마치 연예인을 보듯 영국의 다이애나 왕세자비와 윌리엄 왕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기사로 탐하곤 했다.
어울리지 않는 소녀풍 취향이라는 비웃음도 샀지만, 뭐 누군가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 어때서. 나의 왕실 사랑은 정확히 말하면 김영하의 산문집 ‘포스트 잇’에 실린 에세이 ‘조선왕조 주식회사’에서 설명된 것과 엇비슷하다.
“왕이 있으면 공주도 있잖아! 공주가 있다는 건 왕비도 있다는 거고 또한 왕자도 있다는 거야. 혹시 알아? 공주가 주최하는 창경궁 파티에라도 한번 불려가게 될지. 우리 인생엔 그런 일이 없어서 이렇게 따분한 거야. 가끔 공주가 평민하고 사랑에 빠져 달아나기도 하고 뭐 그래야 되는 거 아냐?”
김영하의 글(정확히는 함께 냉면을 먹던 친구의 말)처럼 나를 비롯해 사극을 탐하고 먼 나라의 왕실 소식에 귀를 쫑긋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비슷한 로망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최근 방영을 시작한 ‘황후의 품격’도, 황제와 결혼하며 일약 신데렐라가 되는 무명 뮤지컬 배우를 주인공으로 하지 않는가 말이다.
1910년 경술국치로 사라진 대한제국의 황실을 드라마로 되살려낸 사례는 ‘황후의 품격’ 이전에도 더러 있었다. 이승기와 하지원이 주연을 맡은 ‘더킹 투하츠’, 황실 복원 프로젝트로 느닷없이 김태희가 공주가 되는 ‘마이 프린세스’, 그리고 주지훈이 아오리 사과처럼 풋풋했던 ‘궁’까지.
2006년 방영된 24부작 드라마 ‘궁’은 주지훈, 윤은혜, 김정훈, 송지효의 앳된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자 21세기에 대한민국에 황실이 존재한다는 입헌군주제를 표방한 로맨스 드라마다.
‘두번째달’의 아련 돋는 음악과 황인뢰 PD의 진두지휘로 빚어낸 빼어난 영상과 미장센으로 1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다시 보는 팬들이 많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케이블 채널 ‘라이프타임’에서 재방영하는 ‘궁’을 봤는데, 영상에 촌스러움을 전혀 느끼지 못했을 정도. 박소희 작가의 동명 원작 만화가 워낙 인기가 많았던지라 드라마의 성공 또한 자연스러웠다.
‘궁’은 여느 로맨스 드라마의 클리셰를 충실히 따른다. 전혀 접점이 없을 것 같던 황태자 이신(주지훈)과 평범한 여고생 신채경(윤은혜)이 조부 간의 언약으로 인해 정략결혼을 하게 된다. 황태자에겐 사실 좋아하던 여자친구 민효린(송지효)이 있었지만 청혼을 장난으로 여겨 거절당한 끝에 책임과 의무로 채경과 결혼하게 되고, 그 와중 아버지 효열태자의 갑작스러운 사망이 아니었다면 황태자가 되어 채경과 결혼할 뻔한 쫓겨난 왕자 이율(김정훈)은 사촌 형수가 된 채경을 사랑하게 된다.
더 막장 같은 설정은 이율의 어머니인 태후 서화영(심혜진)은 이율을 원래의 자리인 황제로 만들기 위해 온갖 음모를 벌이는데, 시동생인 현 황제 이현(박찬환)의 옛 여자로 두 사람이 불륜 관계였다는 것. 물론 시청자들의 애간장을 녹이다 못해 발암 요소로 꼽히는 것은 신과 채경 사이를 방해하는 율과 효린의 끝을 모르는 방해공작이다.
방영 당시에는 그 사각관계가 아련아련하고 애틋해 보였던 것도 같은데, 이제 와서 다시 보니 고구마를 백만 개는 삼킬 듯한 답답한 관계다. 서투른 표현과 오해로 서로의 진심을 모르고 싸우고 상처받고 우는 남녀 주인공의 행태가 드라마 중반부터 후반까지 반복되니 답답할 수밖에. 심지어 주연 배우들이 대부분 신인인지라 미숙한 연기로 그렇지 않아도 답답한 내용을 오조오억 배는 더 답답하게 만든다.
실제로 유튜브에 업로드된 ‘궁’ 클립 영상을 보면, 시청자들의 신랄한 댓글이 폭포수처럼 넘쳐 흐른다. 재미난 건 나중에는 그 댓글 보는 재미로 지지부진한 전개를 함께(?) 견뎌 나가는 이들이 많다는 거.
‘발암유발자’로 불리는 캐릭터들에게도 변명의 여지는 있다. 그들은 모두 열아홉 살, 사회에 발을 딛지 못한 미성년자들이다. 세상 무서울 게 없는 중2는 지났지만, 아직도 한참 모든 것이 미숙하고 서투른 나이. 진짜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주체할 수 없는 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모르는, 몸은 다 자라 어른 같지만 실상 한참 자라고 깨지고 부딪쳐야 하는 나이 말이다.
‘궁’의 주인공들은 그 순간에는 억겁처럼 느껴지는 열아홉 살의 나이를 부단하게 살아가며 성장한다(더불어 주지훈 등 몇 연기자는 드라마 안에서 연기도 성장한다). 돌이켜보면 절로 ‘이불 킥’ 하게 되는 흑역사로 점철돼 있지만, 그럼에도 슬며시 그리워지는 10대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드라마. 여전히 ‘궁’을 인생 드라마로 꼽는 이들이 많은 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그때를 엿보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오글토글한 ‘싸이월드 감성’이 곳곳에 도배돼 손발이 곱아들지만, 그래도 순간순간 소년소녀의 감성을 되돌려주니 반갑다. ‘두번째달’의 음악과 함께 첫사랑에 울고 웃던 그 시절을 소환하며 감상해보는 건 어떨지.
필자 정수진은? 영화를 좋아해 영화잡지 ‘무비위크’에서 일했고, 여행이 즐거워 여행잡지 ‘KTX매거진’을 다녔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 홈페이지에서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이며,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지금은 프리랜서를 핑계로 종일 드라마를 보느라 어깨에 담이 오는 백수 라이프를 즐기는 중.
정수진 드라마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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