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유사수신은 거대한 피라미드다. 돈과 거짓으로 쌓아 올린 이 피라미드는 인간의 원초적 본성을 자극한다. ‘돈을 잃을지 모른다’ 대신 ‘늦으면 맡기지 못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여 투자자가 먼저 몸이 달아 찾게 된다. 피라미드는 점차 거대해진다. 돈과 거짓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나고, 그 자체의 무게로 무너져 내린다. 정점에 서 있는 사람들이 사라지는 때는 바로 이 순간이다.
# 돈과 거짓으로 쌓아 올린 피라미드
지난 22일 오후 7시, 20명의 투자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가정주부와 은퇴한 중년, 대학생, 외국인 등 직업은 다양했지만 이들 모두 한 남자에게 돈을 맡겼다. 투자자들은 단순히 여윳돈만 맡긴 게 아니었다. 은행에서 빌릴 수 있는 돈뿐만 아니라 부모가 남긴 유산, 암 투병을 하다 받은 보험금 등도 포함돼 있다. 이날 자리에 모인 투자자들의 투자금만 52억 원이다.
투자자들이 돈을 맡긴 남자는 지난해부터 암호화폐를 활용해 투자금을 모집했다. 지난해 비트코인의 가격이 한창 주목을 받을 때였다. 남자는 투자설명회를 열고, 자신이 세계 최초로 개발한 블록체인 기술이 있으며 이 기술로 만든 암호화폐에 투자하면 단기간에 고수익을 올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수법은 단순했지만 남자가 ‘근거’로 제시한 자료들은 화려했다. 자신이 개발했다는 블록체인으로 해외 유명인의 이름을 딴 재단과 업무협력을 했다며 현수막이 걸린 행사장 앞에서 외국인과 악수를 하는 사진을 보여줬고, 홈페이지엔 국내·외 IT업체, 중국 정부 등에서 추진하는 대형 사업 참여했다는 ‘인증 서류’들이 올라왔다.
남자는 투자자들이 더 이상 마련할 수 없을 때까지 돈을 요구했다. 자신은 아무 투자자나 받아주지 않지만, 특별하게 기회를 주는 것이니 꼭 투자하라는 설명과 함께였다. 자금 마련이 어려우면 ‘믿을 만한’ 하위 투자자를 모집해 오라고 했고, 이때 추가 수익을 주겠다고 말했다.
사기였다는 걸 투자자들이 알게 된 건 지난 8월 남자가 자취를 감춘 이후였다. 매달 지급되던 이자가 점점 줄어들더니 남자는 원금과 함께 사라졌다. 남자의 휴대전화 전원은 꺼져 있었고, 그가 투자자들을 접대하던 사무실도 비었다. 투자자들은 곧바로 경찰에 신고를 했다. 추가 피해자들이 더 나오기 시작하면서 최근까지 수사가 진행 중이다.
# ‘믿음의 공동구매’ 발견도, 해결도 쉽지 않다
지난 7월부터 11월 22일까지 ‘비즈한국’이 만난 유사수신 피해자 ‘모임’은 총 10곳. 피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게는 50명, 많게는 700명이 넘는 곳도 있다. 일명 ‘유사수신 범죄의 트렌드 세터’로 불리는 암호화폐를 활용한 사기 피해를 주장하는 모임이 5곳으로 가장 많았다.
그 밖에 크라우드 펀딩 기법으로 수익이 높은 여러 펀드에 투자해 연평균 150%의 수익을 남겨 투자자들에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거나 인터넷 쇼핑몰, 여행사 등의 계열사를 가진 외국 법인에 투자하면 원금의 2배 이상 고수익을 남길 수 있다는 방식도 있었다.
수사기관과 금융당국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형식이 다양하고 암호화폐의 경우엔 복잡한 알고리즘까지 더해지지만 유사수신 범죄들은 대부분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금융 피라미드’다. 결국 ‘나에게 지급되는 월 12%의 수익은, 뒤에 가입하는 사람들이 낸 투자금’일 뿐이다. 과거 터무니없는 수익률을 제시하던 방식에서 최근에는 3개월에 8%, 6년 18%의 수익률을 내세우는 등 수법과 ‘테마’가 교묘해질 뿐이다.
유사수신 범죄는 한번 발생하면 해결이 쉽지 않다. 일단 초기에는 피해가 발견되지 않는다. 일정 기간은 매달 꼬박꼬박 통장에 돈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처음엔 믿지 않았던 친구와 가족, 회사 동료 들이 투자자의 통장에 들어온 돈을 보고 따라 가입하게 된다. 특정 지연이나 혈연, 회사 등으로 얽힌 만큼 ‘믿음’도 단단해진다. 여윳돈을 넘어 집과 대출 등을 통해 맡기는 돈의 규모가 커지는 건 이 시점이다. 일부 투자자가 의심을 한다 해도, 피라미드의 몸집은 의심이 커지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불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피라미드가 커진 만큼 투자자들의 반응이나 요구도 제각각이다. 돈을 되찾는 것은 물론 강력한 처벌도 필요하다며 목소리를 높이는 투자자들이 있는가 하면, 수사기관의 수사로 사기 행각이었던 사실이 드러나더라도 ‘그럴 사람이 아니다’ ‘사정이 있을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고소를 거부하는 투자자도 있다. 최근 인터넷 금융 관련 커뮤니티나 유사수신 ‘피해자 모임’ 등에서 공동 대응을 논의하지만, 마땅한 대책이 나오지 않는 이유다. 피해금액을 돌려받는 조건으로 피의자에게 유리한 진술을 하거나 탄원서를 내면서 재판이 뒤집히는 사례도 있다.
암호화폐 유사수신 사기의 경우엔 경찰과 검찰 수사도 쉬운 게 아니다. 가짜 암호화폐를 활용한 거짓 사업을 앞세워 돈을 모집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하는데, 실물이 없는 만큼 수사 과정이 복잡하다. 투자자들이 고소하기 전에 해외로 출국한 경우에 필요한 절차는 더 늘어난다.
한 지방청의 사이버수사과 관계자는 “수사기관이 먼저 인지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피해 규모가 커질 대로 커진 뒤에야 투자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최근 혐의가 입증돼 재판에 넘겨지는 유사수신 사건 대부분이 규모가 큰 게 이 때문이다”라며 “최근엔 암호화폐 관련 범죄가 잘 알려지면서 수사 속도가 빨리진 편”이라고 말했다.
유사수신 범죄를 차단하기 위해선 제보와 신고가 가장 중요하다. 금감원 관계자는 “신고할 땐 유사수신 의심행위의 내용, 회사의 위치, 전화번호 등을 확보하는 게 좋다”며 “범죄 혐의가 입증되더라도 자금 흐름을 찾지 못해 돈을 돌려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 투자 당시 입금한 계좌번호와 관련 자료를 준비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다른 경찰 관계자는 “수익률이 적혀 있거나 원금을 보장한다는 식의 문구가 담겨 있는 계약서 등이 있다면 가장 좋다. 다만 법리적으로 문제가 없는 계약서를 쓰면서 구두로 원금과 수익을 보장하는 경우도 있어 필요한 경우엔 녹음이나 설명회에서 영상을 촬영하는 방법도 활용해야 한다”며 “일단 시장금리보다 훨씬 높은 고수익을 주면서 원금까지 보장해준다는 투자는 의심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문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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