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국내 주주행동주의 펀드가 주식시장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다. 한진그룹 지주회사 2대 주주로 올라서면서 적대적 M&A(인수·합병) 가능성이 부각됐기 때문이다. 대기업 경영권에 대한 토종 행동주의 펀드의 ‘도전’은 이번이 처음이다.
화제의 주인공은 지난 8월 설립돼 한진칼 지분 9%(532만 2666주)를 확보한 ‘그레이스홀딩스’. 이 회사는 투자목적 유한회사로, 일명 행동주의 사모펀드다. KCGI(기업지배구조개선펀드, Korea Corporate Governance Improvement)가 만든 ‘KCGI제1호 사모투자합자회사’가 최대주주다.
그레이스홀딩스 펀드는 최근 경영권을 장악할 의도가 없고 견제와 감시 차원이라는 입장을 내놨지만, 시장은 이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행동주의 펀드의 성격과 현재 한진그룹이 처한 상황을 볼 때, 궁극적으로 주주권 행사 및 주주제안 등을 통해 ‘적극적인 경영 참여’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온다.
주주행동주의 펀드는 기업 지분을 대량으로 사들인 뒤 경영진에게 구조조정, 배당 확대, 경영진 교체 등을 요구하는 투자 방식이다. 적극적인 경영 참여를 통해 지분 가치를 올려 수익을 낸다. 현재까지 가장 잘 알려진 행동주의 투자는 현대차그룹을 겨냥해 배당 확대, 회사 분할·합병 등을 요구해온 미국 헤지펀드 엘리엇이다.
최대주주 KCGI는 LIG그룹 계열 투자사 LK투자파트너스의 강성부 전 대표가 지난 8월 창업한 회사다. 그래서 업계에선 일명 ‘강성부 펀드’로도 통한다. 그동안 지배구조 개선이 필요하거나 승계에 어려움을 겪는 중견·중소기업을 투자 대상으로 올리고, 적지 않은 수익을 내거나 인수에 성공하면서 시장의 관심을 모았다.
KCGI는 이번 한진칼 지분 확보 공시에서 ‘임원의 선임·해임 또는 직무의 정지’와 ‘이사회 등 회사의 기관과 관련된 정관의 변경’이 목적이라고 밝혔다. 이사진 구성 개입 등 경영참여 의사를 분명히 밝힌 셈이다. 곧바로 주식시장이 들끓었다. 단숨에 한진칼 2대 주주로 오른 KCGI가 한진그룹 경영권 전반 장악을 시도한다는 분석에 힘이 실렸다.
한진칼은 한진그룹의 지주회사로 대한항공, 진에어, 한진, 칼호텔네트웍스 등의 주요 계열사들을 지배한다. 조양호 회장(17.84%)을 비롯한 오너 일가가 28.95%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이 밖에 국민연금(8.35%), 크레디트스위스(5.03%), 한국투자신탁운용(3.81%)이 주요 주주다. KCGI 지분 자체는 조 회장 일가 몫에 한참 못 미치지만, 앞서의 주요주주들과 개인투자자 등을 합치면 충분히 경영권에 위협이 된다.
# “경영권 장악 의도 없다” 선 그었지만…
적대적 M&A 가능성이 부각되자, KCGI는 지난 19일 공식 입장문을 내고 “경영권 장악 의도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회사는 입장문에서 “공시 서류에 광범위한 경영참여활동을 목적으로 기재한 것은 자본시장법 해당 조항의 내용을 열거한 것”이라며 “경영참여형 사모펀드에 대한 규제 때문에 전격적으로 투자를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현행 자본시장법상 경영참여형 사모펀드는 다른 회사의 지분을 처음 취득한 후 6개월 안에 10% 지분을 보유해야 한다. KCGI는 지분 5% 이상을 보유한 뒤에는 주식을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다고 공시를 해야 하는데, 공시 이후 경영권 분쟁 이슈 등이 불거지면 지분을 늘리기가 어려워 공시 직전 한꺼번에 주식을 많이 매입했다는 입장이다.
그러면서 KCGI는 “KCGI 1호 펀드는 한진칼 주요주주로서 경영활동 감시와 견제 역할을 충실히 할 계획이다. 일부 외국계 투기 자본이 요구하는 비합리적 배당정책, 인건비 감소를 위한 인력구조조정, 급격한 주가 부양을 통한 단기 이익 실현을 지양한다”며 “장기적인 회사 발전이나 가치 정상화에 의해 직원, 주주, 고객의 이익을 높이는 데 주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KCGI의 입장 발표로만 보면 단순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지만, 증권가 해석은 다르다. 특히 KCGI가 발표한 입장문의 ‘행간’을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경영권 장악은 없다고 못 박았지만, 입장문대로 ‘견제와 감시’ 또는 ‘장기투자’만 한다면 굳이 사모펀드를 설립해 지분을 9%나 늘릴 이유가 없다는 설명이다.
한 증권사 연구원은 “사모투자, 경영참가형 펀드는 규제가 많아 오랜 기간 지켜만 보는 투자 방식으로는 ‘들이는 품’이 많고 부담이 크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궁극적으로 경영 참여 목적이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고 밝혔다.
KCGI가 지배구조 ‘개선’을 강조하는 점도 눈길을 끈다. 개선의 사전적 의미는 ‘부족하거나 잘못된 것, 나쁜 것을 고쳐 더 좋게 만들다’다. 지금의 한진그룹에 문제가 있고, 이를 바꿔야 한다는 뜻이다. 엘리엇은 현대차그룹에 지배구조 ‘개편(조직 등을 고쳐 새로 편성)’을 요구했다.
실제 KCGI는 ‘한진칼 시가총액 1조 5000억 원’은 이해하기 힘들다고 평가한다. 국내 1위 항공사인 대한항공과 상위권 저비용항공사 진에어 등을 보유한 회사의 가치로는 너무 낮다는 얘기다. 그동안 한진그룹 전반에서 불거졌던 일감 몰아주기나 총수 일가의 비도덕적 행위 등 부정적인 요인을 제거하면 기업 가치를 높일 수 있다는 게 KCGI 측 주장이다.
이번 입장문에서도 대한항공, 진에어, 한진, 칼호텔네트워크를 구체적으로 명시하면서 “(회사들이) 매우 저평가돼 있으며, 기업지배구조의 개선을 통한 가치 증대 기회가 매우 높다”고 밝히기도 했다.
# 내년 3월 주총서 본격적 움직임 전망
다만 KCGI가 당장 한진칼의 경영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을 전망이 우세하다. 펀드 만기가 최장 14년으로 설정된 만큼 ‘단기 이익 실현 지양’이란 입장은 설득력이 있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KCGI가 본격적인 ‘행동’에 나설 시점은 내년 3월이 유력하게 점쳐진다. 그때 한진칼의 주주총회가 예정돼 있다.
특히 총 7명의 이사진 가운데 석태수 대표이사와 2명의 사외이사, 상근감사 등 4명이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다. 나머지는 조양호 회장과 조원태 사장, 이석우 사외이사다. 그동안 한진칼은 자산총액 2조 원 기준에 미달해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를 설치할 의무가 없다. 이 때문에 내부 인사에 대한 견제가 미흡하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다른 증권사 연구원은 “조양호 회장 해임 건의 등 ‘강력한 액션’은 없을 것이다. 조 회장은 2020년 임기가 만료되는데, 이사 해임은 주총 특별결의 사항이다. 주주총회 참석자 가운데 3분의 2가 찬성해야 한다”면서도 “그러나 이사 선임은 보통결의 사항이다. 주총 참석자 가운데 절반 이상의 찬성만 얻으면 된다. 내년 한진칼의 주주총회에서 이사진 과반이 넘는 4명의 재선임 및 교체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KCGI에겐 경영에 참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가 된다. 주주총회를 기준으로 KCGI가 움직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주주총회 전까지 KCGI는 우군 확보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KCGI가 국민연금, 크레디트스위스, 한국투자신탁운용과 ‘연합군’을 결성하면 지분율은 26.19%에 달한다. 조 회장 일가 경영권을 위협할 수 있는 수준이다. 크레디트스위스는 지난 9월 지분 신고 공시 당시 경영참가 목적이 없다고 밝혔지만, 이러한 입장을 밝히지 않은 국민연금이나 한국투자신탁운용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KCGI 측이 경영권 참여를 통해 한진칼의 적자 사업부나 부동산 매각을 통해 주주 이익을 확대하는 카드를 꺼낸다면 기업가치 제고에 따른 주가 상승, 배당 수익을 기대하는 주주들이 KCGI 측에 가담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소액주주들이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KCGI가 경영권을 두고 다투는 모습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 투자자문사 관계자는 “행동주의 펀드의 순기능은 국내 기업지배구조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합리적인 주장과 제안이라면 기업 입장에서도 전혀 나쁠 게 없다”며 “주주가치를 제고하는 데 있어 비우호적인 방법만 있는 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한진칼 측은 별다른 대응은 하지 않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KCGI가) 자체적으로 발표한 내용에 대한 공식 입장은 없다”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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