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혹 서울역사박물관을 가본 사람들은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멋진 박물관 건물 앞에 개울도 시내도 없이 혼자 덩그러니 있는 오래된 돌다리 하나를. 이런 게 도대체 왜 여기 있는 걸까? 하지만 놀랍게도, 그 다리는 원래 수백 년째 그 자리에 있었다. 거기서 그렇게 한 왕의 몰락과 왕조의 몰락, 새로운 나라의 탄생 과정을 말 없이 지켜보고 있던 것이다.
만약 40대 이상이고, 서울 강북에서 중고교 시절을 보냈다면 ‘경희궁 청소년 도서관’이란 이름을 적어도 한 번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거기서 책과 함께 평소 보기 힘든 이성을 힐끔거렸을 수도 있고. 지금은 서울역사박물관이 들어선 지역은, 그전에는 경희궁 청소년 도서관이 있었고, 그 이전에는 서울고등학교가 있었으며, 더욱 오래전에는 경복궁의 서쪽에 있어 ‘서궐’이라 불리는 경희궁이 자리하고 있었다.
# 사라진 경희궁, 홀로 남은 금천교
지금도 경희궁이라 불리는 건물들이 남아 있지 않냐고? 물론 그렇다. 하지만 수백 칸에 이르렀던 경희궁 전각들 중에 복원된 것은 달랑 네 곳. 그나마 정문인 흥화문을 제외한 건물 셋은 최근에 완전히 새로 지은 것들이다. 사실 흥화문도 집 나가 여러 곳을 떠돌다 원래 있던 위치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겨우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경희궁의 건축물 중에서 광해군 10년(1623)에 처음 지어진 그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서울역사박물관 앞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생뚱맞게 놓여 있는 경희궁 금천교가 그것이다.
원래 금천교란 궁궐의 정문 뒤에서 임금이 사는 신성한 장소를 속계와 구별해주는 역할을 하던 다리다. 당연히 조선의 궁궐에는 어디나 금천교가 있다. 금천교 아래로는 자그마한 시내가 흐르고 옆으로는 사악한 기운을 막기 위해 돌로 만든 ‘서수’를 배치한다. 그렇다면 다리를 따라 들어오는 사악한 기운은? 그걸 막으려고 금천교 난간에는 또 다른 서수들을 새겨 넣은 것이다.
경희궁의 금천교가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라면, 그 정문인 흥화문은 원래 금천교의 남쪽에 있어야 한다. 흥화문이 원래 있던 자리에서 지금의 위치로 옮기게 된 사연에는 경희궁의 비극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 경희궁 흥화문의 기구한 운명
서울의 다른 궁궐들처럼, 일제 강점기의 경희궁도 이리 찢기고 저리 팔리는 수모를 당했다. 하지만 그래도 궁궐의 꼴은 유지했던 다른 곳들과 달리, 경희궁은 아예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일제는 이곳에 있던 백여 동의 건물들을 몽땅 부수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버리고는 그 자리에 경성중학교를 지었던 것이다.
해방이 되었지만 경성중학교가 서울고등학교로 문패만 바뀌었을 뿐, 아무도 지난 왕조의 궁궐을 복원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경희궁 청소년 도서관’이라는 이름을 듣고도 거의 모든 이들이 왜 ‘경희궁’이란 이름이 들어갔는지 모르는, 경희궁이 과연 궁궐인지 아닌지도 헷갈려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원래 조선의 궁궐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창덕궁과 창경궁을 묶어 ‘동궐’, 경희궁과 덕수궁을 묶어 ‘서궐’이라 부르는 ‘5궐 체제’였다).
흥화문은 한때 나라님이 사시는 궁궐의 정문으로 그 위엄을 뽐냈으나, 그 나라가 남의 손으로 넘어간 뒤에는 남의 나라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에 밀려 길가로 나앉고, 그것도 모자라 나라를 빼앗은 원수(이토 히로부미)의 사당 정문이 되었다가, 어영부영 그 자리에 들어선 신라호텔의 대문이 되어 오가는 손님 맞이에 바빴다.
집 떠난 지 수십 년 만에 우여곡절 돌아왔으나, 이미 자기 자리에는 큰 빌딩이 들어선 후라 결국 엄한 곳에 자리 잡았다. 허, 참, 만약 사람이라면 책 한 권 분량은 너끈히 나올 기구한 인생임에 틀림없다. 덕분에 흥화문과 따로 자리잡게 된 금천교 또한 그렇다.
여행정보
▲위치: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55
▲문의: 02-724-0274~6(서울역사박물관)
▲관람 시간: 상시
구완회 여행작가
writer@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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