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조선시대 악녀(惡女)로 꼽히는 대표적인 여자들이 있다. 장녹수와 장희빈, 상궁 김개시, 소용 조씨 등 주로 궁궐 내 내명부 여인들이 꼽히는데, 장녹수와 장희빈에 견주는 악녀로 알려졌으면서 궁궐 밖 외명부 여인인 정난정은 그 중 눈에 띄는 이름이다.
정난정이 누구인가. 신분제가 공고한 조선에서 첩의 자식으로 태어나 남의 첩이 되었다가 본처 자리를 꿰차더니 정1품 정경부인 첩지를 받는 신데렐라다. 장희빈 이전에 조선의 신데렐라는 정난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낮은 신분으로 태어나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했지만 끝이 비참했다는 공통점까지, 두 사람은 무척 닮았다. 드라마틱한 삶 때문에 정난정 역시 여러 차례 대중매체 전면에 나섰는데, 대표적인 작품이 ‘여인천하’다.
조선 제11대 왕인 중종시대를 배경으로, 여러 여인들이 권력을 얻어 살아남고자 분투를 벌이는 드라마 여인천하. 반정(反正)으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출발부터 왕권이 약할 수밖에 없었는데, 정실이던 단경왕후 신씨를 반정 7일 만에 궁에서 내쳐야 할 정도였다.
여인천하는 약해진 왕권 사이로 공신들의 딸인 후궁들과 이에 맞서는 계비 문정왕후, 그리고 문정왕후를 돕는 책사(策士)로 정난정을 전면에 내세운다. 사실 조선시대 궁중암투야 여러 사극에서 다뤄 천편일률적이다. 왕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왕위를 잇는 아들을 낳기 위해 중전 대 후궁, 후궁 대 후궁으로 대립하는 이야기들 말이다.
여인천하 또한 아들을 낳아 자신의 아들을 임금으로 만들고자 하는 중전과 후궁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은 임금의 사랑이 짧디짧은 허망한 것이라는 것을 잘 알뿐더러 단경왕후 신씨가 공신들에 의해 폐출되는 것도 똑똑히 보았다.
그러니 아들을 낳고 세력을 키워 자신의 아들로 임금을 삼고자 하는 것은 피바람 몰아치는 궁궐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처절한 투쟁이다. 주인공 정난정(강수연)은 더 나아가는데, 서출이라는 타고난 신분을 자기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로 문정왕후(전인화)의 작은오빠(실제 역사로는 동생)인 윤원형(이덕화)에게 접근하는 것만 봐도 남다르다.
정난정은 미색과 총명한 머리로 윤원형과 문정왕후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물론 남곤, 심정, 홍경주 같은 공신세력과 장경왕후 소생의 세자를 보호하는 윤임과 김안로 세력, 조광조라는 사림 세력 사이에서 위태로운 외줄타기를 하며 문정왕후를 돕는다. 난다 긴다 하는 조정 신하들과 임금의 사랑과 총기로 무장한 후궁들을 ‘찍어 내리는’ 난정의 활약은 말 그대로 일당백.
여인천하는 제목처럼 천하를 호령하고자 하는 여인들이 여럿 나서기에 그만큼 인상적인 배우들이 대거 출연했다. 경빈 박씨, 희빈 홍씨, 창빈 안씨 등 중종의 여러 후궁들 중 특히 도지원이 연기한 경빈 박씨는 이 드라마가 인기작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주춧돌 역할을 했다. 앙칼진 목소리로 외치는 경빈의 “뭬야?”는 여인천하의 명대사 중 하나. 총명하나 문정왕후와 정난정에는 한 끗 못 미쳐서 매번 당하곤 이를 갈며 복수를 다짐하는 과장된 표정 연기도 여인천하를 보는 재미였다.
엄격하고 근엄하며 진지한 ‘엄근진’ 문정왕후는 또 어떤가. 남편 유동근에게서 훈련받은 사극 연기를 유감없이 발휘한 전인화의 ‘포스’는 종종 주인공 정난정의 그것을 압도할 정도였다. 2001년 당시 문정왕후 복장을 하고 전인화가 한국시리즈 시구자로 나섰을 만큼 전인화의 문정왕후는 후덜덜한 인기를 누렸다.
16년 만에 TV로 돌아와 여인천하에 출연한 강수연은 매 화 엔딩신에서 클로즈업 샷을 받으며 그 존재감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SBS연기대상에서 강수연과 전인화가 대상을 공동수상하고 도지원이 최우수상을 거머쥐면서, 그해 2001년은 드라마 제목 그대로 여인천하가 되었다.
강수연, 전인화, 도지원 외에도 난정의 친구인 기생 옥매향으로 분한 박주미, 난정을 사랑하는 길상을 짝사랑하여 연적이 되는 능금을 맡은 김정은, 재력을 발판 삼아 정치권에 끼어드는 장대인을 연기한 이휘향 등 여성 캐릭터들이 전면 등장해 존재감을 발휘했다. ‘대장금’ ‘선덕여왕’ ‘동이’ 등 능동적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사극이 추후 나와 성공한 것도 여인천하가 먼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사실 여인천하가 훌륭한 사극이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다. 기획 당시 50부작이던 것을 무려 150부작(!)으로 늘리고 늘리는 기염을 토한 것만 봐도 작품의 맥락이 얼마나 무너졌을지 짐작할 수 있다. 치부책, 세자 책봉 경합, 작서의 변, 파릉군의 살생부 등 몇 가지 에피소드로 여러 회를 우려먹으며 시청자의 진을 뺐고, 픽션의 범주를 넘어선 역사왜곡은 무시로 일어나 방송위원회의 시정권고도 받으며 ‘사극계의 막장’이라는 좋지 않은 명성도 얻었으니 말 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천하를 보는 이유는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던 강인한 여성들의 쫀쫀한 연기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 없어 보이는 정치의 속성 때문이다. 눈물바람 짓거나 교태를 부리거나 현숙한 자태로만 존재하는 종이인형 같은 조선시대 여성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토록 영리하고 교활하며 권력과 생존을 위한 의지를 불태우는 욕망의 여인들이라니!
그리고 권력자들의 관계와 속성은 16년이 지난 지금도 고스란히 대입되어 역사는 반복됨을 증명한다. 씁쓸하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졌을 때 여인천하의 문정왕후-정난정 관계가 오버랩됐던 것처럼. 그러니 옛 역사라고, 드라마라고 우습게 볼 일이 아니지 않은가.
필자 정수진은?
영화를 좋아해 영화잡지 ‘무비위크’에서 일했고, 여행이 즐거워 여행잡지 ‘KTX매거진’을 다녔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 홈페이지에서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이며,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지금은 프리랜서를 핑계로 종일 드라마를 보느라 어깨에 담이 오는 백수 라이프를 즐기는 중.
정수진
드라마애호가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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