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한국에서 부모님이 오셨다. 2주일 넘게 가이드 역할을 하느라 하루 운전 거리만도 상당한 수준. 국경 넘기 편한 대륙에 살다 보니, 베를린 시내 단거리는 물론이고 옆 나라 체코와 폴란드를 수시로 드나드는 통에 거짓말 조금 보태 택시 운전을 해도 될 지경이다. 처음 독일에 와서 벌벌 떨며 운전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우회전, 좌회전, 다른 신호 체계와 낯선 이정표. 그것만으로도 운전대 잡은 손에 힘이 꽉 들어가던 시절이 있었다. 한국처럼 바둑판형 도로가 아니라 사방팔방으로 길이 나 내비게이션을 작동시켜 놓고도 길을 잘못 들기 부지기수였고, 일방도로 표지판을 ‘해석’하지 못하고 진입했다가 독일인 할아버지에게 혼이 나는가 하면, 자전거 통행자를 발견하지 못해 아찔한 순간도 경험했다.
차 한 대 겨우 지나가는 좁은 골목도 많아 맞은편에서 차라도 들어오면 진땀 흘리며 후진으로 골목을 빠져나와야 하는 일도 적잖이 겪는다. 그뿐이랴. 그 좁은 골목 중간에서 쓰레기 수거 차량이라도 만나는 날은, 그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다리는 것뿐이다. 쓰레기 수거 차량 때문에 등교길 지각 사태를 빚은 일은 손가락으로 셀 수도 없을 정도다. 처음엔 당황스럽다가, 저렇게 배려심이 없느냐고 화도 냈는데,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기다리는 경지에 이르렀다.
체계가 다른 데서 오는 불안감만 아니었다면, 독일 운전은 서울보다 백 배 천 배 쉬웠다. 막히는 구간이 없지는 않지만 서울 같은 교통체증은 구경하기 어렵고, 대부분의 운전자들이 얌전하고 양보까지 잘 하는 습관을 갖고 있어 초보자든 초행자든 배려받으며 운전할 수 있다.
고속도로도 마찬가지다. 속도 무제한으로 알려진 ‘아우토반’은 전 구간 속도 무제한이 아니라, 속도 제한이 풀리는 구간이 있는 자동차도로인데, 시속 200km 넘게 ‘밟고 달리는’ 와중에도 차간 거리를 잘 유지하기 때문에 사고율도 낮다.
규칙을 잘 지키는 것을 넘어 기다리고 인내하는 독일인의 생활습관이 운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하루 종일 경적 소리 한 번 듣기 어렵다. 며칠 전 체코에서 베를린으로 돌아오는 아우토반에서는 원인 모를 이유로 40분간 차들이 꼼짝없이 서 있는데도 누구 하나 경적을 울리지도, 도로 밖으로 나와보지도 않은 채 차 안에서 얌전히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동승했던 부모님이 놀랐다.
타고난 국민성일 수도 있겠으나, ‘불면허’도 한몫하지 않을까. 독일에선 운전면허를 따는 데 오래 걸리고 비용도 비싸다. 학원 수강료에 각종 수수료와 추가 강습 등을 포함하면 우리 돈 100만 원은 기본. 비싼 경우엔 2000유로(약 260만 원)까지 드는 경우도 있다. 비용이 문제가 아니라, 들어야 할 수업 내용과 과정이 길고 꼼꼼하기로 유명하다. 의무 이론수업만 14번이니 일주일에 세 번씩 가서 듣는다고 해도 5주가 소요된다. 도로연수 12회는 별도.
코스만 까다로운 게 아니라 응시 자체도 간단치 않다. 시청에 신청서를 접수하기 위해 예약을 잡는 것도 한 달 이상이 소요되고(독일은 예약문화라 무슨 일이든 예약을 하지 않으면 업무처리를 할 수가 없다), 시험 허가 신청이 승락되는 데만 빠르면 한 달, 길게는 석 달이 걸린다고 한다. 시험 신청서를 낼 때도 운전용 시력검사결과와 함께 교통사고 현장에서 부상자 옮기는 법, 붕대 감는 법, 심폐소생술 등을 배우는 응급처치 코스 수료증이 필요하니, 독일에서 면허 따는 데 길게는 1년이 걸린다는 말이 괜한 게 아니다.
이런 내용을 알게 된 후 한국에서 면허를 따고 온 게 얼마나 다행이던지. 이런저런 절차를 거치면 한국면허증을 독일면허증으로 바꿀 수 있다. 한국도 ‘불면허’로 바뀌긴 했지만, 시험 통과 기준 강화만이 아니라 습관이나 태도까지 바꿀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글쓴이 박진영은 방송작가로 사회생활에 입문, 여성지 기자, 경제매거진 기자 등 잡지 기자로만 15년을 일한 뒤 PR회사 콘텐츠디렉터로 영역을 확장, 다양한 콘텐츠 기획과 실험에 재미를 붙였다. 지난해 여름부터 글로벌 힙스터들의 성지라는 독일 베를린에 머물며 또 다른 영역 확장을 고민 중이다.
박진영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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