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선배, 미달이 방학숙제 알아요? 요즘 완전 인기예요!”
유행에 연연하는 건 꼴불견 같지만 트렌드에 뒤쳐진 아재나 꼰대가 되고 싶진 않다. 잡지 만드는 일을 했었다 보니 유행과 트렌드에 안테나를 곤두세운 편이기도 하다. 30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노력하면 ‘요즘 애들’이랑 통한다고 여겼는데, 이젠 통하는 건 언감생심이요, 노력하는 자체도 버겁다.
노력한다고 요즘 애들 감성이 될 수 없는 나이란 걸 깨달았다는 게 정확하다. 그런 와중에 ‘미달이 방학숙제’가 인기란다. 20년 전 시트콤 ‘순풍산부인과’의 ‘진짜 주인공’ 미달이가 2018년에 인기라니 놀라울 수밖에.
1998년 3월부터 2000년 12월까지 3년 가까이 682화에 걸쳐 방영한 대한민국 레전드급 시트콤 순풍산부인과. 순풍산부인과 원장 오지명(오지명)과 부인 선우용녀(선우용녀) 부부를 중심으로 큰딸 오미선(박미선)과 사위 박영규(박영규), 둘째딸 오태란(이태란), 셋째딸 오소연(김소연), 막내딸 오혜교(송혜교), 큰딸네 무남독녀 박미달(김성은)로 구성된 대가족이 등장한다.
오지명 원장네 외에 다른 한 축은 병원과 연관된 식구들이다. 주로 오지명 원장 딸들과 엮이는 산부인과 전문의 김찬우(김찬우), 이창훈(이창훈), 김찬우의 후배이자 오소연과 연인이던 방송작가 권오중(권오중), ‘김간’ ‘표간’ ‘허간’ 등으로 불리던 간호사 군단인 김정희(장정희), 표인봉(표인봉), 허영란(허영란) 등이 그 주인공.
여기에 수시로 낯익은 얼굴들이 특별출연하며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20여 분 기상천외한 해프닝으로 웃음을 주곤 했다. 그 시절을 보냈던 사람치고 순풍산부인과를 한 번도 안 본 사람은 있을지언정 한 편만 본 사람은 없을 것.
왜 다시 순풍산부인과일까? 후배가 알려준 미달이 방학숙제 편은 개학 전날 방학숙제가 있다는 걸 알게 된 오지명네 식구들이 오밤중 생 쇼를 벌이는 이야기다. 43일분의 그림일기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미달이 엄마 미선이가 선우용녀, 오소연, 오혜교와 모여 작전회의를 열면서 “스토리는 내가 짤게. 글씨는 누가 쓸래?” 하는 장면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패러디되며 인기 짤방으로 등극했다는 것.
다급한 상황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하는 미달이 방학숙제 편은 다시 봐도 웃기긴 하다. 이뿐 아니라 인기 에피소드 영상이 유튜브에서 확산되며 10대들 사이에 인기 콘텐츠로 등극했단다. 20여 분의 한 편 내에 2~3가지 이야기가 얽히는데, 유튜브에는 그 중 가장 재미난 에피소드들을 골라 4~7분가량으로 편집해 올리기에 언제 어디서든 부담 없이 즐기기 좋다.
지금도 SBS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순풍산부인과를 시청할 수 있지만 요즘 애들은 유튜브로 순풍산부인과를 접한다고. 미달이 방학숙제 편 외에도 ‘미선, 혜교의 단식원’ ‘미달이의 노래자랑 대회’ ‘미달이의 생일파티’ ‘용녀의 간이 화장실 대참사’ 등 ‘#순풍레전드’라는 해시태그가 달린 영상이 수두룩하다.
순풍산부인과의 인기 요인은 재미난 캐릭터에 있다. ‘대한민국 시트콤계의 마에스트로’로 불리는 김병욱 PD는 특유의 캐릭터 구축으로 쟁쟁한 시트콤을 여럿 연출했는데, 순풍산부인과 이후로 선보인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똑바로 살아라’ ‘귀엽거나 미치거나’ ‘거침없이 하이킥’ ‘지붕 뚫고 하이킥’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 등에서 주로 무능한 아버지와 가부장적인 할아버지, 톰과 제리 같은 관계 대립 등 김병욱 월드에서 통용되는 특유의 캐릭터들을 선보이며 사랑받았다.
나 역시 김병욱 PD 시트콤의 충실한 애청자였는데,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고 전무후무한 캐릭터는 역시 순풍산부인과의 미달이다. 연기 잘하는 아역 배우 많기로 유명한 우리나라지만 미달이를 연기한 김성은만큼 천연덕스럽게 연기한 아역 배우를 본 적이 없다.
미달이는 아빠 박영규와 더불어 순풍산부인과의 대표적인 사고뭉치 캐릭터인데, 김성은은 어린애다우면서도 어린애답지 않은 상상초월의 사건 사고들을 일으키는 미달이를 거침없이, 능수능란하게 연기해 입을 못 다물게 만들었다. 다만 이후 지나친 관심으로 성인이 될 때까지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었다는 슬픈 사연이 있다.
순풍산부인과가 방영되기 시작한 1998년은 IMF 외환위기로 온 나라가 어려움을 겪던 때였다. 방영 초기 “IMF로 나라가 어려운데 말이야” 같은 대사가 곧잘 등장했고, 영어 비디오 사업 실패로 처갓집에 얹혀살며 장인 오지명의 구박을 받던 박영규는 그 시대 힘없는 가장을 대변하는 캐릭터로 볼 수 있었다.
힘들던 시기, 순풍산부인과를 보며 잠시나마 시름을 잊고 웃던 사람들이 꽤 되리라. 오지명이 다급하게 부르던 “용녀, 용녀, 용녀!”, 박영규가 억울한 목소리로 말하던 “장인어른, 왜 그러세요”, 어린 정배가 이마를 탁 치며 외치던 “맙소사” 같은 명대사들, 특이한 에피소드마다 여러 캐릭터로 감초처럼 등장하던 윤기원의 연기도 새록새록 떠오른다. 무엇보다 20년이 흘러도 통용되는 시트콤이 있다는 게 즐겁다. 요즘 애들이 순풍산부인과를 보는 감성과는 다를지언정 말이다.
영화를 좋아해 영화잡지에서 일했고, 여행이 즐거워 여행잡지를 다녔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 홈페이지에서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이며,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지금은 프리랜서를 핑계로 종일 드라마를 보느라 어깨에 담이 오는 백수 라이프를 즐기는 중.
정수진 드라마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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