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어릴 적 우리 집 괘종시계의 태엽 감기 담당은 나였다. 벽에 붙은 거대한 시계는 매시 시각의 숫자만큼 종을 쳤고 30분마다 한 번씩 종을 쳐줬다. 괘종시계가 종을 치지 않거나 멈춰버리면 그건 내가 시계 밥 주는 걸 잊어서였다. 40년 전의 기억임에도 여전히 벽에 붙은 시계에 매달려 발뒤꿈치를 들고서야 겨우 태엽 감는 장치를 돌리던 모습이 생생하다.
지금 부모님 집엔 그 괘종시계가 없다. 오토매틱 시계에 밀려 창고로 들어간 게 벌써 수십년 전이고, 그러다가 어느 샌가 사라져버린 듯하다. 그땐 낡은 건 나쁘고 새것이 좋은 줄만 알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과거의 낡은 물건들을 버리지 않고 잘 보관해놨으면 정말 좋았을 것이다. 아마 이런 사람들이 많을 거다. 지금 아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어릴 적 집에 있던 물건들을 잘 보관해서 현재의 나에게 물려줬을 텐데 말이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에게 빈티지는 매력적인 키워드가 되었다. 과거엔 와인에서만 빈티지라는 말을 썼지만, 이젠 모든 오래된 물건에 쓸 정도다. 빈티지 시계, 빈티지 자동차, 빈티지 가구, 빈티지 오디오 등 고가의 빈티지부터 일상 생활 용품 모든 것에서도 빈티지는 매력적으로 소비되는 시대가 되었다. 특히 2030 밀레니얼 세대들이 빈티지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다는 점이 앞으로 관련 시장이 더 커질 가능성을 만들고 있다.
생각해보니 내겐 60여 년 된 오디오, 70년 된 손목시계, 80년쯤 된 카메라를 비롯해, 90년 전의 오리지널 디자인 그대로의 가구들도 있다. 분명 빈티지에 큰 관심이 있던 게 아니었음에도 최신의 신상품과 함께 낡은 빈티지도 하나둘 사뒀던 것이다. 빈티지의 가장 큰 매력으로는, 손때이자 세월의 흔적이 만들어낸 자연스러운 낡음이 주는 멋도 있고, 현재에는 더 이상 만들지 않는 과거 물건에서 느껴지는 희소성과 함께 클래식함이 주는 우아함이 있다.
무조건 새것이 좋다고 여겨버리면 속상해진다. 사람한테도 적용시켜버릴 것 같아서다. 늙음이 죄가 아니고 젊음이 상이 아니듯, 각자의 매력은 충분히 있다. 특히 오래된 낡음이 주는 매력의 가치는 간과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빈티지가 트렌드가 되고, 레트로가 계속 욕망되는 상황이 솔직히 반갑다.
하루 한 번쯤 태엽을 감아줘야 하는 기계식 시계는 불편할 수도 있다. 뭐든 다 자동으로 되는 시대에 태엽을 감아야 하는 낡고 오래된 시계를 탐하는 건 전혀 실용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계식 장치가 주는 묘한 맛이 있다. 오히려 태엽 감는 행위로 하루를 시작하는 걸 좋아하는 이들도 많다.
사실 시간을 잘 보려고 시계가 필요한 게 아니다. 시간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너무도 많아졌고 스마트폰이 충분히 훨씬 더 정확한 시간을 알려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목에 시계 하나 차고 싶어하는 이들의 욕망은 여전하다. 스마트워치가 대세가 될 것처럼 애플을 비롯한 유수 IT 회사들이 공격적으로 나서봤지만 여전히 태엽 감는 기계식 시계의 가치는 유효하고, 나이 든 남자들의 전유물 같던 고가의 스위스 시계를 탐하는 2030들은 더 많아졌다.
예전부터 멋쟁이 남자들일수록 손목을 비워두질 않았다. 과거엔 비싼 명품 시계 브랜드가 중요했다면, 지금은 자신과 잘 어울리는 스타일의 시계인지, 얼마나 유니크하고 희소한지가 더 중요해졌다. 1950~1970년대 빈티지 시계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점점 빈티지 시계의 가격대는 높아져간다. 유명 시계 브랜드에서도 당시 시계의 복각판을 자꾸 만들어내는 것도 이런 것과 연관될 것이다.
안목은 경험의 양적 축적 속에서 쌓여가는 취향의 질적 심화의 결과물이다. 많은 걸 써보고 누려본 사람들이 안목과 취향이 좋을 수밖에 없는데, 이들이 낡은 과거의 물건에 주목하기 시작하면서 빈티지의 가치가 높아졌다.
나이가 들다 보니 비싼 걸 가진 사람은 덜 부럽다. 더 이상 팔지 않는 물건을 가진 사람이 제일 부럽다. 그런 점에서 빈티지가 주는 세월의 가치, 희소성의 가치에 주목하는 건 지극히 인간적이다. 빈티지 물건은 사람과 닮아 있다. 사람도 나이가 들면서 더 멋져지는 경우가 많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사람으로서 그만이 가진 특별한 경험과 삶의 흔적이 쌓여가기 때문이다.
가끔 우린 잊어버리고 산다. 자신이 얼마나 매력적인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지. 나이가 든다는 건 더 멋져진다는 것이다. 꼭 그래야만 한다. 그러고 싶다.
김용섭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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