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최근 금융시장의 변동성이 크게 확대되고 많은 투자자들이 큰 손실을 입은 탓에 주말 내내 마음이 울적했다. 우울한 기분을 계속 끌고 갈 수 없을 때, 필자는 종종 역사서를 즐겨 읽곤 한다. 오늘 소개한 책 ‘책 공장 베네치아’처럼, 세상을 새로운 시각에서 볼 수 있는 기회를 종종 얻기 때문이다.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1452년 (서양에서는 최초로) 이동식 활자를 이용한 인쇄에 성공했지만, 정작 인쇄업은 베네치아에서 화려한 꽃을 피웠다. 예를 들어 16세기 초반 유럽에서 출간된 모든 책의 절반가량이 베네치아에서 생산되었다. 당시 출판업은 매우 부가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식자공이나 운송 그리고 책 판매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에서 엄청난 고용을 창출하는 ‘15세기의 혁신산업’이었다.
의심의 여지 없이, 베네치아는 중부유럽에서 이주해온 인쇄공들에게 최적의 출판 환경을 갖춘 도시였다. 15세기에 베네치아에서 인쇄된 책의 거의 절반은 독일인들이 생산한 것이었으며, 영국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15세기 이전 베네치아에서 발간된 간행본 1600권 중 80%는 독일계로 보이는 사람의 소유권이 명시되어 있었다. (중략) 그들은 기술을 발명했지만 사업을 성장시키기 위해 다른 나라로 이주해야 했고, 부유하고 지성적인 이탈리아는 그들에게 최적의 선택지였다. -책 41쪽
독일 사람들은 왜 굳이 베네치아에서 출판업을 시작했을까?
출판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세 가지의 조건이 필요하다. 지식들의 결집, 풍부한 자본 동원력, 뛰어난 영업활동.
베네치아는 이 모든 것을, 아니 그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 인근의 파도바대학은 지적 자원을 제공했고, 베네치아의 상인들은 풍부한 자금력을 동원했으며, 베네치아의 사업 체계와 능력은 15세기 말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수준이었다. 해외로 수출하는 책은 이미 수세기 동안 베네치아를 위대하게 만든 그 선박들에 의해 운반되었다. -책 41쪽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책의 원고를 수정하고 교정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출판업이 번성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 나아가 자본과 사업 능력 역시 사업의 성공에 필수적인 요소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곳이 베네치아만은 아니건만 베네치아는 어떻게 16세기까지 출판왕국으로 군림할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해 ‘책 공장 베네치아’의 저자 알레산드로 마르초 마뇨는 ‘베네치아가 매우 자유로운 곳’이었다는 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지적한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형성된 게토는 1516년 3월 29일 베네치아 칸나레조 지구의 산지롤라모 교구에 설치된 ‘유대인 구역’이다. (중략) 1492년 이후 스페인의 페르난도 2세가 이베리아 반도에서 유대인들을 추방했을 때, 많은 유대인들이 비교적 평화롭게 살 수 있는 피난처인 베네치아로 옮겨갔다. (중략)
셰익스피어의 『베네치아의 상인』은 이런 특별한 환경을 배경으로 한다. 샤일록과 바사니오 사이에 벌어진 드라마는 다른 사회에서는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중략) 게토 내부의 다양한 유대인들은 모두 똑같지는 않았다. 담보대출은 독일계 유대인들의 영역이었고, 해상 무역은 스페인계 유대인들이 주도했으며, 특히 학문적인 발전을 독려하려면서 종교적 관례를 주도했던 이들은 독일계들이었다. –책 84~89쪽
다른 나라에서 추방된 사람들조차 포용하며, 추방당했던 사람들이 상업과 은행업, 출판업을 주도할 수 있는 베네치아의 자유로운 환경이 ‘책 공장 베네치아’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베네치아의 전성기는 너무나 짧았다.
베네치아의 출판업자 ‘알비세 브라가딘’은 독일계 랍비, 메이어 카체넬렌보겐이 주석을 단 『미슈네 토라(유대인을 위한 기도서의 일종)』를 인쇄했다. 같은 시기에 그와 경쟁관계에 있던 출판업자 주스티니아니 역시 같은 필사본을 인쇄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카체넬렌보겐의 주석은 생략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브라가딘과 주스티니아니 간에 심각한 갈등이 빚어졌고, 이것이 악화되어 치열한 공방전으로 이어졌다. (중략) 주스티니아니는 경쟁자가 완전히 재기 불가능하게 되기를 바라며 교황에게 브라가딘의 판본을 처벌해줄 것을 호소했다. 만약 그가 자신의 요청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았다면 아마 분명히 다시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당시 로마 교황청에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출신으로 르네상스에 관심이 많았던 레오 10세가 1521년에 사망했다. 이제 이탈리아 남부 출신의 추기경으로 강경노선을 고집하는, 그리고 훗날 바오로 4세 교황이 될 잔 피에트로 카라파가 종교재판을 이끌게 되었다.
그는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던 엄격하고 융통성 없는 인물로, 유대인을 증오했다. 그는 베네치아에서 발생한 분쟁을 절호의 기회로 여겼다. (중략) 상황은 예정된 운명으로 흘러갔다. 1553년 8월 교황 율리우스 3세는 유대인들의 책을 몰수해 불태우라는 내용의 교서를 발표했다. (중략) 한편 로마에서는 종교재판 집행자들이 유대인의 집에 들이닥쳐 찾아낸 모든 인쇄물을 몰수해 길거리에 버렸다. (중략) 로마에서 히브리어로 쓰여진 책이 불태워진 지 한 달 후에 베네치아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책 99~102쪽
종교적, 정치적 자유를 찾아 이주해온 사람들 덕분에 베네치아의 출판업이 번성했기에, 교황청의 개입은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반(反) 종교개혁 운동이 절정에 이르던 17세기에 이르면, 베네치아에서 출간되는 모든 책을 대상으로 검열이 이뤄졌다고 한다. 베네치아가 다른 경쟁자들에 비해 한때 우월한 지위를 가졌던 것은 사실이지만, 자유로운 출판 풍토가 사라지고 종교적 박해를 우려한 기술자들이 베네치아를 이탈하는 순간 ‘출판왕국’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와 같은 베네치아 출판업의 사례는 ‘혁신산업’을 육성하려는 모든 나라에게 큰 시사점을 제공한다. 잘 교육받은 지식인, 그리고 풍부한 자본과 사업 경험만으로는 혁신산업이 성장하지 않는다. 바로 15세기 베네치아처럼 ‘자유로운 공기’가 흘러넘치는 분위기야말로, 혁신적인 산업을 육성하고 또 뿌리내리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자.
홍춘욱 이코노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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