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 일과 삶의 균형이 화두가 된 시대. 지난 7월 1일부터 주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되면서 많은 직장인이 ‘저녁이 있는 삶’을 맞았다. 그들을 위해 퇴근 후 가까이서 즐길 수 있는 먹거리, 놀거리, 즐길거리를 소개한다.
남산 밑 언덕배기 마을 해방촌. 마을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서울에 몇 안 남은 곳이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면 동네 어디에서나 남산타워(N서울타워)를 볼 수 있다. 그 촌스러운 이름부터 신구가 뒤섞인 동네 특유의 분위기까지 호기심이 새록새록 일어난다.
1945년 해방과 함께 해외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터를 잡은 뒤 한국전쟁 후엔 월남한 피란민의 정착촌이 된, 이름마저 아련한 해방촌. 실향민이 움막과 판자촌을 만들어 살았던 곳에 1970~80년대에 하나둘 양옥집이 들어서면서 대략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언덕배기에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만들어내는 익숙하면서도 어쩐지 낯선 해방촌의 풍경은 세련된 현대 서울의 중심에서 홀로 동떨어진 섬과 같은 느낌을 준다.
해방촌은 용산구의 용산2가동과 용산1가동을 포함한다. 지하철로는 녹사평역 2번 출구에서 가깝고, 버스를 탄다면 남산을 휘돌아 이어지는 소월길에서 동네길로 바로 연결된다. 굳이 남산타워까지 올라가지 않아도 서울 시내가 한눈에 보여 남산드라이브길이라고도 불리는 소월길. 402번이나 405번을 타고 소월길 중턱인 보성여중고 정류장에서 내려 언덕 아랫길로 조금만 내려가면 해방촌 오거리다.
해방촌 오거리는 해방촌의 중심이라 할 만하다. 동네의 작은 오거리지만 이 교차로에서 후암동과 서울역, 이태원, 남산 등으로 방향이 갈라진다. 해방촌 오거리에는 주민센터와 파출소부터 미용실, 빵집, 과일가게를 비롯해 뻥튀기와 엿을 파는 노점까지 옛날 동네에서 흔히 맞닥뜨리는 골목의 모습이 있다.
그 속에서 지팡이 짚은 할아버지와 장 보러 나온 아주머니, 학교 파한 아이들이 적당히 뒤섞여 잡담을 나누거나 마을버스를 기다리거나 하는 소소한 풍경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펼쳐진다. 일상의 풍경이지만 한편으로 옛날 드라마 속으로 걸어 들어온 느낌마저 든다. 종종걸음을 치다가 문득 멈춰서도 좋을 것 같은 한가함이 느껴진다.
해방촌 오거리 바로 아래에 요즘 뜨는 신흥시장이 있다. 신흥시장은 예전에는 그야말로 해방촌의 ‘삶의 현장’이었다. 시장은 지역의 흥망성쇠를 고스란히 담아낸다. 동네가 흥하면 시장도 번성한다. 1970년대 해방촌은 니트 산업으로 전성기를 누렸고 곳곳에서 편직공장의 기계 돌아가는 소리도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시장도 더 없이 흥했을 것이다. 동네를 걷다 보면 지금도 작은 방직공장들이 종종 눈에 띈다. 그러다 90년대 들어 니트 산업이 저물면서 신흥시장도 함께 쇠퇴의 길을 걸었다.
한동안 사람 왕래가 뜸했던 신흥시장이 다시 살아났다. 그 이름처럼 ‘신흥’, 새롭게 떠올랐다. 최근 해방촌에서는 도시재생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시장이 트렌디해졌다. 파스타집과 케이크가게, 루프탑카페, 수제맥줏집, 골목맛집 등이 생겼고 청년들이 운영하는 공방과 사진관, 책방 등이 들어섰다.
신흥시장의 중식당 ‘홍’은 휴일엔 줄 서서도 먹기 힘들 정도로 인기 있고, 원테이블 키친인 비플로르 키친도 예약이 필수다. 백종원의 골목식당으로 유명해진 ‘시장횟집’의 알탕을 맛보려고 해도 긴 대기는 기본. 티라미슈가 일품인 카페 ‘오랑오랑’은 젊은 여성들이 좋아하는 디저트카페다. 카레와 크로켓이 맛있는 ‘코스모스식당’도 신흥시장 맛집이다.
이런 가게들 사이로 오래전부터 있었던 반찬가게와 정육점, 세탁소와 잡화점이 섞여 있다. 오래된 타일과 벗겨진 페인트도 예술로 승화됐다.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 드라마 세트장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이 들면서도 새로 만든 공간에 들어온 것 같은 신선함이 있다.
해방촌에서는 ‘책방산책’도 할 만하다. 골목 구석구석에 작은 책방들이 숨어 있다. 독특한 독립출판물을 다루는 창고 같은 책방 ‘스토리지북앤필름’, 한적한 주택가에서 문화예술을 주제로 한 별별 책들과 함께 잡화 등 부록들을 전시한 책방 ‘별책부록’, 지역의 청소년들과 함께 놀고 공부하고 동아리활동을 하며 배우고 익히는 책방 ‘온지곤지’, 소설과 시 등 문학작품을 위주로 와인을 마시며 낭독하고 대화하는 모임을 여는 책방 ‘고요서사’, 1973년 문을 열어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된 원서 전문 헌책방 ‘포린북스토어’까지 개성 넘치는 작은 책방들의 전성시대다. 독특한 독립출판물을 취급하면서 때때로 문화예술 행사를 여는 ‘치읓’과 노홍철의 책방으로 유명한 ‘철든책방’ 등도 들러볼 만하다.
해방촌 오거리에서 후암동 방향으로 가는 신흥로 20길에는 그야말로 전망 끝내주는 카페와 바가 늘어서 있다. 가수 정엽이 운영하는 ‘오리올 비스트로’는 인스타그램의 전망 사진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바로 옆에 있는 수제버거집 ‘더백푸드트럭’도 오리올 못지않은 환상적인 전망을 자랑한다. ‘더로얄푸드앤드링크’와 ‘포티튜드’에서도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녹사평역 2번 출구로 나와 미군부대 담장을 따라 걸어오다 한신아파트 방향으로 꺾어들어오는 길에서는 좀 더 이국적인 분위기의 해방촌을 만나게 된다. 경리단길 맞은편 큰 도로 쪽에서 시작되는 해방촌 초입이다. 2차선 도로를 따라 길게 뻗은 거리 양쪽으로 펍과 피자집, 수제버거집, 모로코샌드위치집, 론드리카페(laundry cafe), 디저트카페, 채식레스토랑 등 이국적인 가게들이 이어진다.
초입의 ‘보니스피자펍’은 생맥주와 함께 피자를 파는데 그 맛이 본토와 같다고 해서 휴일 점심에는 긴 줄이 늘어선다. 자신의 취향에 따라 토핑을 만들 수 있는 피자집 ‘피자오’는 외국인들에게 특히 인기 있다. 수제버거집인 ‘자코비버거’와 수요미식회에 소개된 이탈리아 레스토랑 ‘쿠촐로’도 인기. 모로코 사람이 모로코 샌드위치를 파는 ‘카사블랑카’의 샌드위치는 바삭한 바게트 빵이 일품이다.
해방촌은 이태원의 해밀턴호텔 뒷골목처럼 시끄럽고 번잡하지 않으면서도 트렌디한 거리를 경험할 수 있고, 경리단길보다 따뜻하고 정감 있다. 남산타워 못지않은 전망까지 자랑한다. 거리에 외국인이 자연스럽고 동네 주민들과 섞여 있어도 어색하지 않다.
오래된 마을 주민과 처음 골목탐험에 나선 사람들, 무시로 드나드는 외국인이 한데 섞이고 어울려 더 매력적인 해방촌에는 트렌디한 카페와 펍, 화려한 전망의 바가 세트장 같은 시장을 품은 옛날 동네와 나란하게 자리한다. 요즘 뜨는 거리의 핫한 분위기가 오래된 골목의 편안함과 함께 잔잔하고 싱싱하다.
마을버스 용산02번이 녹사평역 2번 출구부터 해방촌 초입의 신흥로를 따라 해방촌 오거리까지 올라갔다가 후암동 쪽으로 내려와 숙대입구까지 실어다준다.
이송이 기자
runaindia@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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