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미국 투자은행(IB) 베어스턴스는 2007년 6월 심각한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비우량주택담보대출(서브프라임모기지)에 대한 담보부증권 판매가 부진해 자금난에 시달렸다. 신용악화까지 겹쳐 결국 이듬해 3월 파산하고 말았다. 85년 역사를 가진 세계 5대 IB의 몰락이었다.
이때만 해도 베어스턴스의 파산이 위기의 전조였다는 것을 감지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세계 최대 IB인 JP모건체이스는 베어스턴스의 부실 채권을 헐값에 인수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2008년 9월 세계에서 4번째로 큰 리먼 브라더스가 베어스턴스와 같은 문제로 파산하고 말았다. 직후 미국 등 글로벌 증시와 채권 값은 폭락했고 AIG·씨티그룹 등 철옹성 같았던 금융회사들도 하나 둘 쓰러졌다. 그렇게 글로벌 금융위기는 시작됐다.
경제학에는 자기실현적 기대(self-fulfilling expectations)라는 말이 있다. 비관적 인식은 미래를 더 어렵게 만들며, 반대로 긍정적 판단은 앞으로 경제를 밝게 한다는 것이다. ‘경제는 심리’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경제주체들이 미래를 어렵게 만드는 자기실현적 기대를 언제, 왜 가지게 될까. 증시 등 금융시장 버블과 과잉 유동성에 따른 금리인상 기조, 이에 따른 머니무브, 연체 등에 따른 일부 금융기관의 신용경색 등 이유는 여러 가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경우에는 리만브라더스가 경기 하강의 스모킹 건이 됐다. 베어스턴스 파산 때만 해도 많은 경제주체들이 호경기에 취해 위기를 읽지 못했다.
최근 경제 위기설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경기 10년 주기설을 중심으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기준금리 인상 기조, 신흥국 위기 등이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과연 현실성 있는 얘기일까. 그 시그널은 작은 충격에 금융시장이 어떻게 반응하느냐로 가늠해 볼 수 있다.
10일(현지시간) 뉴욕 증시가 급락했다. 다우산업지수는 3.15% 하락했고, 나스닥은 4.08% 미끄러졌다. 지난해부터 호황을 누려온 미국 기업들의 실적이 하향 조정되고 있고, 채권금리 인상 가능성과 정보기술(IT) 기업에 대한 부정적 전망 등이 이유로 분석됐다. 뉴욕 증시는 2월에도 마찬가지 이유로 5거래일 새 2,300포인트 급락한 바 있다.
그러나 미국 IT 기업들의 실적 부진과 연준의 기준금리 인상 등 문제는 2017년부터 줄곧 제기되던 이슈들이다. 그럼에도 지난해 다우지수는 별다른 급락 없이 거북이걸음으로 연 4,956포인트 올랐다.
지난해와 올해의 가장 큰 차이점은 증시에 대한 고점 인식이다. 증시를 좌우하는 두 가지 큰 변수는 유동성과 기업 실적. 풍부한 유동성이 기름이라면 실적은 불을 지피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글로벌 증시는 저금리로 생긴 많은 유동성과 기업들의 실적 개선에 힘입어 2016년 말부터 기초를 다지기 시작했다. 증시가 상승한 지 2년 가까이로 접어들며 최근 증시에 대한 고점 인식이 커졌다.
증권사 관계자는 “증시가 오르면 오를수록 주가와 실적에 대한 부담감으로 외부 충격에 민감성은 더욱 커지게 마련”이라며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은 지난해에는 경기 회복의 시그널로 읽혔지만 최근에는 경제에 부담을 주는 요인으로 해석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미 연준이 올해 네 차례, 내년 세 차례 기준금리 인상을 예고하고 있다. 연준이 스케줄대로 금리 결정을 할 경우 내년 말 미국 기준금리는 3~3.25%가 된다. 기준금리 인상 기조 속에 이미 채권시장은 들썩이는 등 금융시장에 부담을 더하고 있다. 기존 발행 국채 가격은 하락하고 있다. 10일 10년물 미 국채금리는 장 초반 2011년 이후 최고 수준인 3.25%를 경신하기도 했다.
미국의 금리 상승은 자국 금융시장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다. 채권 투자 심리를 높여 증시 하락을 부추기는 한편 해외로 나갔던 달러를 다시 미국으로 불러들이는 효과를 낸다. 외환 부족에 시달리는 개발도상국들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실제 터키의 경우 외국인 투자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리라화가 폭락, 금융시장이 불안에 빠졌다. 올 3월부터 아르헨티나와 베네수엘라를 비롯해 인도·필리핀·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주요 신흥국들도 수출 부진까지 겹쳐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중국이 올 들어 지급준비율을 네 차례나 낮추며 유동성 공급을 늘리고 있는 것은 수출 시장이 어렵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지난 1일 미국 워싱턴에서 가진 연설에서 “위기가 확산되면 신흥국에서 자금이 빠져 최대 1000억 달러(약 114조 원)가 이탈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만약 글로벌 실물경기가 호조를 보인다면 활발한 자금순환을 통해 자금유출 및 금융시장 불안을 상쇄할 수 있다. 다만 미국과 중국 간에 무역전쟁이 심화되며 국제 교역과 세계 경제 성장률을 떨어트리고 있어 신흥국들의 위기를 더 키우고 있다.
구스틴 카르스텐스 국제결제은행(BIS) 사무총장도 8월 말 잭슨홀 심포지엄 연설에서 “미국의 관세가 인플레이션을 유발해 연준의 기준금리 인상을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다. 이는 달러 가치 상승으로 이어져 신흥시장에 고통을 안길 전망”이라며 “실물 경제와 금융위험이 상호작용을 일으켜 증폭될 가능성이 있고, 보호무역주의가 부를 부정적 결과들과 맞물려 퍼펙트스톰을 맞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퍼펙트스톰이란 동시다발로 터진 크고 작은 악재들이 상호작용을 일으켜 발생하는 대형 경제위기를 말한다. 미국의 금리인상과 그에 따른 국제교역 축소, 신흥국 자금 이탈, 증시 등 금융시장에 대한 고점 인식, 기업들의 실적 부담 등이 겹치면 대형 경제위기가 닥칠 수 있다는 얘기다.
특히 미국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0년간 막대한 달러 채권을 찍어냈는데, 올해부터 만기가 돌아온다. 당장 금리 인상과 맞물려 이를 차환발행하거나 원리금을 상환하는 데 비용 부담이 더해질 전망이다. 이런 이유로 JP모건은 금융위기가 발생한다면 그 시기는 2020년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미국과 신흥국의 증시의 하락률은 각각 20%, 48% 수준으로 내다봤다.
글로벌 경제위기의 진원지를 IT 기업으로 꼽기도 한다. 최근 페이스북은 고객 정보 유출 문제가 터졌고 테슬라는 창업자 일론 머스크의 상장폐지 언급으로 증권시장에 파문을 일으켰다. 이런 소동과 실적 악화, 기술에 대한 실망감 부각 등이 맞물리면 IT 기업 투자의 버블 붕괴가 발생해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전망이다.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면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도 휘말릴 가능성이 높다. 신세돈 숙명여대 경제학부 교수는 최근 국가미래연구원에 기고한 ‘퍼펙트 스톰이 오고 있다’는 제목의 글에서 “수출증가율 하락과 엔화 대비 원화 강세 등을 따지면 수출증가율은 마이너스로 떨어질 것이 거의 확실하다”며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에 따른 한-미 금리 역전으로 자본시장에서 외국인 자금이 빠져나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당장 금융정책당국은 한국이 피해를 입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선을 긋는다. 이승헌 한국은행 국제국장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다른 신흥국들과는 달리 한국은 경상수지 흑자가 이어지고 있으며, 대외부채 상환능력도 우수하다”며 “취약 신흥국과의 상호 위험 노출액(익스포저) 규모가 크지 않다”고 말했다. 떼일 돈이 많지 않아 신흥국 위기가 발생해도 한국으로는 전이되지 않을 것이란 설명이다.
다만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외환보유액, 익스포저와는 상관없이 환율 변동성 확대만으로 국내 많은 수출기업이 부도를 맞았다. 자금 융통이 원활하지 않아 수많은 프로젝트파이낸싱(PF)이 무산돼 저축은행이 줄도산했다. 글로벌 위기가 국내 경제의 시스템 리스크를 촉발하지는 않을 수 있다. 그렇지만 실물경제의 고통까지 피할 수는 없다.
10일 시카고옵션거래소(CBOE) 변동성지수(VIX)는 22.96을 기록해 전일 대비 약 44% 급등했다. VIX는 금융시장의 변동성을 측정하기에 ‘공포지수’로 불리기도 한다. 지난 3일만 해도 11.61에 불과했다. 날이 갈수록 경제위기에 대한 공포는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김서광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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