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전하, 종묘사직을 보존하옵소서~!” 사극에 등장하는 단골 대사다. 유교 왕국 조선에서 종묘와 사직은 국가 그 자체였다. 종묘는 역대 국왕들의 신위를 모신 사당, 사직은 토지신(神)과 곡식신(神)을 가리킨다. 서울 종로의 사직단은 사직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다. 따라서 사직단의 중심에는 건물이 아니라 텅 빈 제단이 자리잡고 있다.
사직단을 처음 봤다면 ‘이거,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분명히 뭔가 번뜻한 건물이 들어서야 할 중심에 흙으로 덮인 야트막한 제단이 자리잡고 있으니. 사방으로 홍살문을 겹으로 두른 것이 무엇인가 대단히 중요한 장소인 것은 같은데, 한복판에는 제단만 덩그러니 보인다. 그것도 두 개가 나란히. 하지만 서울 종로의 사직단은 조선 시대에도 이런 모습이었다. 이름 그대로 토지신인 사(社)와 곡식신인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었기 때문이다.
유교국가의 설계도라고 할 수 있는 중국 주나라의 ‘예기’에 따르면 궁궐의 왼쪽에는 종묘를, 오른쪽에는 사직단을 지어야 했다. 유교국가를 표방한 조선도 경복궁의 왼쪽에 종묘를, 오른쪽에는 사직단을 지었다. 그것도 경복궁보다 먼저. 종묘와 사직단은 궁궐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조상을 하늘처럼 모시는 유교에서 왕보다 왕의 조상이 더 중요한 것은 당연한 일. 땅과 곡식이 있어야 사람들이 모여 나라를 이룰 수 있으니, 토지신과 곡식신이 중요한 이유도 자명하다. 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장소인 종묘와 사직에 직접 가본 사람은 얼마나 될까? 종묘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이름을 올리면서 찾는 이들이 많아진 반면, 사직단은 여전히 한적한 장소로 남아 있다.
# 왕보다 사직, 사직보다 백성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1번 출구로 나오면, 쉬엄쉬엄 걸어도 5분이면 사직단에 도착한다. 제법 큰 솟을 대문 현판에는 ‘사직단(社稷壇)’이란 글자가 선명하다. 정문을 지나면 야트막한 담장 사방에 홍살문이 눈에 들어온다. 그 안에 또 하나의 담장이 있고, 거기도 역시 사방에 홍살문을 두었다.
왕릉에도 하나만 세우는 홍살문이 8개라니, 이곳이 얼마나 신성한 장소인가를 알 수 있다. 그중에서도 북쪽 바깥의 홍살문인 북신문이 가장 크고 웅장하다. 사람이 다니는 문은 남쪽이지만, 신은 북쪽에 난 문을 통해서 들어오기 때문이다. 평소에 북신문은 닫혀 있지만, 관리 사무소에 이야기 하고 이름만 적으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북신문 뒤로는 벽돌로 북돋운 길이 이어진다. 가운데는 신위가 들어오는 신로, 왼쪽과 오른쪽은 왕과 세자가 다니는 어로다. 왕과 세자도 사직에 비하면 한 수 아래라는 이야기. 맹자는 “백성이 가장 중요하고, 사직이 다음, 왕이 가장 마지막”이라고 했다. 신로 중간에는 벽돌로 깔아 만든 정사각형의 공간이 눈에 띈다. 이곳은 사직에 제사를 지낼 때 왕이 절을 하는 판위다.
그런데 사실 판위가 신로를 중간에 있으면 안 된다. 신이 가는 길을 인간이 막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곳에 판위가 있는 까닭은? 아쉽게도 복원이 잘못된 것이다. 사실 사직단 정문의 위치도 지금보다 10여 미터 앞에 있었단다. 1960년대 도시 계획 과정에서 길을 내기 위해 뒤로 물린 것이라고.
# 창경궁은 창경원, 사직단은 사직공원으로
사직단이 훼손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다. 종묘와 함께 조선의 가장 신성한 공간이던 사직단은 이미 일본에 의해 두 번이나 훼손되었다. 최초의 훼손은 임진왜란 때. 부산에 상륙한 지 20일이 안 되어 한양까지 점령한 일본은 사직단의 모든 건물을 불태워버렸다. 유교국가의 사직단을 없앤다는 것은 나라를 없애는 일과 같다. 토지 신과 곡식 신의 신위를 피난 가는 왕이 챙긴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하지만 이는 백성을 버리고 사직만 챙긴 것이니 맹자의 눈으로 본다면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임진왜란 후 복원된 사직단은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 다시 한 번 수난을 겪는다. 차마 이번에도 불태워 없애지는 못한 일제는 사직단의 격을 낮추는 방법을 택했다. 사직단의 시설들을 훼손하면서 이름도 ‘사직공원’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마치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만든 것처럼. 사직단은 해방된 나라에서도 여전히 사직공원이었다가, 이후 도시계획 과정을 거치면서 규모가 더욱 줄어들어버렸다. 다행히 1980년대 말에 일부 복원되었으나, 아직 본래 모습을 모두 회복하진 못한 상태다.
두 개의 홍살문을 지나면 드디어 두 개의 제단과 만난다. 왼쪽이 사단, 오른쪽이 직단이다. 벽돌로 만들어 올린 기단 위에는 흙이 덮여 있다. 언뜻 누런 황토로만 보이지만 동서남북과 가운데 모두 다른 색깔의 흙을 깔았단다. 사직단 정문에서 여기까지 둘러보는 데 걸리는 시간은 넉넉잡고 15분. 혹시 광화문에 나올 일이 있다면 잠시 짬을 내어 근처 사직단에 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여행정보
▲위치: 서울시 종로구 사직로9길 5
▲문의: 02) 2148-2834
▲관람 시간: 상시(연중무휴)
구완회 여행작가
writer@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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