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지난 18~20일 북한에서 열린 제3차 남북정상회담에 이례적으로 대규모 경제인 사절단이 방북했다.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장이 북한 경제개발을 희망하고 있어 내로라하는 국내 대표 기업 오너들이 문재인 대통령과 동행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구광모 LG 회장, 최태원 SK 회장,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 등이 참석했다.
그런데 의아한 점은 정의선 현대차그룹 총괄 수석부회장이 불참했다는 것이다. 김용환 현대차 부회장이 대신 북한을 방문했다. 현대차는 정 부회장이 미국 행정부 및 의회 고위 인사들과 사전에 잡아놓은 일정이 있어 불가피하게 빠지게 됐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쉽게 납득은 되지 않는다. 현대차에게 있어 북한은 특별한 시장이다. 인건비가 저렴하고 유라시아대륙까지 뻗는 물류망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은 물론, 그룹 창업자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숙원 사업이기 때문이다. 당장 정 부회장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시작으로 동북아 물류사업에 나서겠다고 밝힌 상태다.
이 때문에 정몽구 회장의 건강이상설이 도는 가운데 경영권 승계와 그룹 지배구조 개편 등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려 미국에 방문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엘리엇매니지먼트의 방해로 지배구조 개편이 어려워진 뒤로 다양한 통로로 물밑 접촉을 벌이는 것으로 안다. 사내에서는 9~10월에는 결론이 나올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 7월 지배구조 개편 방안을 두고 현대차의 한 관계자가 꺼낸 말이다. 현대차는 올 3월 현대모비스를 분할해 현대글로비스와 합병시켜 ‘대주주-존속, 모비스-현대차-기아차-글로비스’로 그룹을 수직계열화 하는 안을 주주들에게 제안했다.
그러나 엘리엇은 4월 현대차의 제안에 “주주에게 상당한 세금 부담을 줄 수 있다”고 반대하며 “현대모비스와 현대자동차를 합병해 지주사를 만들어 달라”고 역제안을 했다. 결국 현대차의 안은 좌초됐고 6월 지방선거 등을 거치며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현대차의 지배구조 개편안에 특별한 기한은 없다”는 입장이지만 오히려 급한 쪽은 현대차다. 내년 3월 정몽구 회장의 현대모비스 등기임원 임기가 만료되고, 각 계열사 주주총회 등을 치르는 데 2개월가량 소요되기에 올해 안에 새 조직개편안을 꺼낸다는 계획이다.
걸림돌은 여전히 엘리엇이다. 행동주의펀드인 엘리엇은 현대모비스 지분 2.94% 등 각 현대차계열사 지분 3% 안팎을 보유 중인 주요주주로서, 외국인 주주를 중심으로 우군 확보를 통해 단기 이익을 확보하는 데 능하다.
엘리엇은 7일(현지시간)에도 현대모비스를 둘로 쪼개 애프터서비스(A/S) 부문을 현대차에, 나머지 모듈‧핵심부품 사업을 현대글로비스에 합병하라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이 경우 모비스-글로비스 합병 법인이 현대차 및 계열사 지분을 매입해 그룹 지배구조의 꼭대기에 서게 된다.
합병법인이 기아차와 정 회장 일가가 보유 중인 지분을 사들이고, 정 회장 일가는 이 돈으로 합병법인의 지분을 매입하면 지배구조를 재편하면서 경영권을 유지하게 된다. 다만 제안자인 엘리엇이 주주들을 규합해 주주총회에서 반대표를 던질 경우 이 안은 무산되고 심할 경우 경영권이 위태로울 수 있다.
현대모비스의 외국인 지분율은 48%에 달한다. 글로벌 양대 의결권 자문사인 ISS와 글라스루이스도 지난 3월 현대차안에 반대 입장을 내놓은 바 있다. 이에 현대차도 “지배구조 개편안은 적정 시기에 절차에 따라 모든 주주와 단계적으로 투명하게 소통할 것”이라며 거부 의사를 냈다.
이런 가운데 9월 정 부회장의 미국 방문은 “관세폭탄 문제를 해결하러 간다”는 표면적인 이유만큼 그 이면도 작지 않은 의미가 있다. 시장에서는 정 부회장의 미국 방문이 ‘백기사’ 확보 차원도 있다는 분석이 힘을 얻는다. 현재 현대차로서는 지난 3월과 크게 다른 안을 내놓기 어려운 입장이다.
어쨌든 정 부회장이 지분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를 지렛대 삼아 지배구조를 개편할 수밖에 없다. 현대모비스를 분할해 상장시킴으로써 합병비율 논란을 불식시킬 것이란 시나리오부터, 모비스의 분할 기준을 새로 정해 분할 법인의 가치 산정 체계를 새로 짜는 안도 제기되고 있다.
새로운 안의 시동을 걸기 위해서는 외국인 주주들을 우호 세력으로 확보해 엘리엇의 행동반경을 좁히는 한편 엘리엇과 직접 접촉해 당근책을 제시해야 하는 상황이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은 현대모비스를 쪼개 현대차, 현대글로비스에 각각 합치자는 엘리엇의 안에 대해 “단기 차익만을 노린 것”이라는 입장을 투자자들에게 나타냈다. 블랙록은 현대차 지분 2.94% 등을 보유하고 있다.
글로벌 자본시장에서 영향력을 고려하면 블랙록의 판단이 외국인 주주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현대차는 블랙록 등 글로벌 큰손들을 설득하기 위해 지난 5월부터 동분서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가운데 현대차와 엘리엇 간에 접촉 가능성도 제기된다. 경영권 승계를 둘러싸고 현대차가 어려운 곤란한 상황에 놓이자 엘리엇이 이를 빌미로 여러 요구를 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기업 인수·합병(M&A)을 전문으로 하는 법조계 관계자는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표면적으로는 주주들을 규합해 기업 경영에 어깃장을 놓고 뒤로는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요구를 제안하는 것이 행동주의 펀드들의 전형적인 수법”이라며 “2015년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때도 합병안 승인을 대가로 물밑에서 여러 요구 사항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전했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이 이재용 부회장에게 경영권을 넘기기 위해 삼성물산의 기업가치를 떨어트려 제일모직과 합병했고, 이 때문에 주주들이 피해를 입었다고 반발했다. 그러나 이듬해 △삼성전자를 사업회사와 지주회사로 분할 △삼성전자 사업회사의 나스닥 상장 △30조 원의 특별 현금배당 △독립적인 3명의 사외이사 선임 등을 요구하며 사실상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을 수용했다.
김서광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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