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역사를 다루는 작가는 책을 준비할 때 먼저 인물 목록을 만든다. 그들을 언제 어디서 어느 정도 비중으로 다룰까 결정하면 책은 반쯤 완성된 셈이다. 안타깝지만 수백 명을 다루다 보면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밖에 없는데, 인사(人事)에 모종의 법칙이 있는 듯하여 섬뜩하다.
중간 정도의 인물은 모르겠으나, 나라를 세울 정도의 지도자는 언제나 역지사지(易地思之)함으로써 대중의 마음을 얻는다. 남의 눈으로 자기를 보지 못하는 이들은 늘 공(功)은 자신이 챙기고 과(過)는 남의 탓으로 돌린다. 언제나 양지에만 서는 그런 모리배(謀利輩)들이 성공하기도 하지만 그 한계는 뚜렷하다.
재판을 받으면서 모든 혐의를 당시 자기 부하들에게 돌리는 어떤 전직 대통령을 보면서 책에서 다뤄본 사람들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옛날 중국 유비는 경쟁자들처럼 선대가 쌓은 기반도 없고 스스로 벼슬길에 오를 깜냥도 없는 사람이었는데 주위에 사람을 잘 모은 탓에 한 나라를 일궜다. ‘삼국지(三國志)’ 촉서(蜀書) 황권전(黃權傳)에 그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잘 나타난다. 아우 관우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온 나라를 들어 오(吳)로 출정했을 때, 부장 황권이 이렇게 권했다.
“오인들은 싸움에 용맹합니다. 우리 수군은 물길을 따라 내려가고 있으니 전진은 쉬우나 퇴각은 어렵습니다. 신이 먼저 몰아쳐 적을 시험해볼 테니, 폐하께서는 뒤를 지키소서.”
하지만 유비는 항상 앞장서는 사람이라 황권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이 장강 남쪽에서 본대를 이끌고 황권은 강 북쪽에서 위(魏)나라 군대를 막게 했다. 그러나 유비가 강남에서 육손에게 대패하자 황권은 돌아갈 길이 막혀 결국 위나라에 투항하고 말았다. 싸움이 끝나자 담당 관리가 유비에게 황권의 처자식을 잡아들이자고 청하니 이렇게 말했다.
“내가 황권은 저버린 것이지 황권이 나를 저버린 것이 아니다(孤負黃權,權不負孤也).” 그러고는 그 처자식을 전처럼 대해줬다고 하다.
촉에서 투항한 어떤 이가 황권에게 처자식이 처형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알렸다. 위나라 군주가 황권에게 발상을 명했지만 황권은 이렇게 대답했다.
“신과 유갈(劉葛, 유비와 제갈량)은 성심으로 서로 믿으니, 그들은 제 본심을 알고 있습니다. 의혹이 아직 사실로 밝혀지지 않았으니 확인한 후에 명을 듣겠습니다.” 몸이 어디에 있든 유비와 황권의 마음은 이렇게 한결같았다.
아버지는 위나라로 갔지만 촉에 남은 그의 아들 황숭(黃嵩)은 훗날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諸葛瞻)을 따라 위군과 싸우다 나라와 운명을 같이했다. 배송지(裴松之)는 “화락한 군자(樂只君子)여, 남의 후손을 지켜주네”라는 ‘시경’의 구절을 인용하여 유비의 행동을 기렸다.
유비가 세운 촉은 위나 오에 비해 인구는 적고 땅도 작았기에 온 나라의 인재를 다 써야 버틸 수 있었다. 촉이 망할 때 제갈량과 황권의 후손이 따라 죽은 것은 유비의 은혜 때문이었다. 그가 베푼 은혜란 남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易地思之) 이상이 아니다.
능동적으로 남의 입장을 고려하는 사람이 이끄는 조직은 강할 수밖에 없다. 반면 위치가 바뀌면 멋대로 주장을 고치는 사람들이 오히려 득세하는 조직이 오래갈 수 있을까?
민주주의를 해치는 줄 알면서도 시킨다고 블랙리스트를 만들던 ‘영혼 없는’ 공무원들, 여당일 때 “통일대박론”을 외치다가 야당이 되니 돌연 “위장 평화쇼” 운운하는 이, 부동산 망국론을 주장하다 집 한 채 사면 사다리를 걷어차려는 이른바 소시민들까지 염량세태(炎凉世態)가 어지럽다. 입장에 따라 주장을 정반대로 바꾼다면 어떤 명제의 진리성을 검증하는 것이 목표인 과학이 설 자리가 없다. 과학을 무시한 사회의 발전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필자 부부는 인세와 월급을 모아 결혼한 지 10년이 넘어 서울에 자그마한 집을 샀다. 대출금이 아직 남아 있지만 진정으로 이 집값이 떨어지기를 원한다. 그리고 한 명의 소시민으로서, 누가 정권을 잡든 오늘날의 남북화해 기조를 이어가기를 고대한다.
필자 공원국은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중국지역학을 전공했으며, 중국 푸단대학교에서 인류학을 공부하고 있다. 생활·탐구·독서의 조화를 목표로 십 수년간 중국 오지를 여행하고 이제 유라시아 전역으로 탐구 범위를 넓혀, 현재는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서 현지 조사를 수행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춘추전국이야기 1~11’, ‘옛 거울에 나를 비추다’, ‘유라시아 신화기행’, ‘여행하는 인문학자’ 등 다수가 있다.
이 연재에서는 먹고 살아가는 행동(경영)을 하면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을 천(天)/지(地)/인(人) 세 부분으로 나눠, 고전을 염두에 두고 독자와 함께 고민해보고자 한다.
공원국 작가·‘춘추전국이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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