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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야행] '가을밤 왕궁산책' 경복궁 별빛야행·창덕궁 달빛기행

수라상 받고 전통공연 보면서 '밤의 궁전' 체험

2018.09.14(Fri) 21:29:28

[비즈한국] “오늘 왕가에 귀한 손님들이 오셨으니 특별히 정중하게 모시거라.” 밤의 경복궁에 조심스레 발을 들이니 머리를 다소곳이 올린 상궁이 나인들에게 명한다. 그러고는 조선왕궁 밤 나들이에 나선 참가자들에게 인사를 올린다. 초가을 밤, 어수선한 마음을 차분하게 내려주는 ‘경복궁 별빛야행’과 ‘창덕궁 달빛기행’은 순식간에 표가 매진될 만큼 매해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다. 

 

문화재청이 주최하고 한국문화재재단이 주관하는 경복궁과 창덕궁 왕궁 탐방 행사는 해마다 새로운 체험과 프로그램을 추가하며 인기를 더하고 있다. 봄, 가을 밤에 운영되는 궁궐 탐방이 더 특별한 이유는 평소에 개방하지 않는 시간에 개방하지 않는 장소에서 특별한 체험을 더하기 때문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창덕궁 달빛기행은 2010년부터 시작돼 올해는 10월 28일까지 진행된다. 사진=박정훈 기자


밤은 익숙한 공간도 낯설게 느끼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더구나 조선의 궁궐은 가까이 있는 공간이면서도 동시에 지나온 시간의 거리만큼 멀게 느껴지는 곳이다. 익숙지 않은 미지의 공간으로 떠나는 밤의 여행. 그곳에서 하는 특별한 시간여행이란 어떤 것일까. 

 

# 사극 속에 들어온 듯, 경복궁 별빛야행

 

별빛야행. 첫사랑 만나러 가듯, 이름을 들으면서부터 설렌다. 별빛을 받으며 궁궐을 야행하다보면 듣기만 했던 과거의 장면들이 무시로 상상을 뚫고 나온다. 시간여행이다. 책이나 사극으로만 봤던 궁궐의 이야기들이 실제처럼 다가오는 건 이번 경복궁 별빛야행만의 특징인 생생한 이야기 형식 때문이다. 

 

길을 안내하는 상궁 차림의 안내원은 관람자들을 왕가의 귀한 손님으로 설정하고 야행을 이끈다. 방문하는 곳곳마다 미리 준비된 연기자들이 공간에 맞춘 짤막한 연기를 펼친다. 동궁전에서는 세자와 신료가 강론을 펼치고, 나인들이 거처하는 함화당에서는 실제 나인들이 생활하는 것을 지켜보며 마치 시간여행자처럼 공간을 둘러볼 수 있다. 

 

경복궁 별빛야행은 지난 2016년부터 해오는 궁궐탐방 행사이지만 이번 회부터는 스토리텔러들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오가는 대화 속에서 듣는다. 관람자는 이야기를 보고 들으며 마치 사극 속에 들어온 듯, 혹은 그 시대 한 켠에 서 있는 듯하다. 그렇게 옛 이야기들이 2018년 가을밤으로 슬며시 소환된다.     

 

경복궁  별빛야행에서는 왕과 왕비의 수라상을 체험하는 소주방에서 저녁을 먹으며 전통공연을 감상할 수 있다. 사진=고성준 기자


하이라이트는 궁궐의 부엌인 소주방에서 왕과 왕비의 일상식인 12첩 반상을 재해석한 ‘도슭수라상’을 체험하는 시간. 도슭수라상의 ‘도슭’은 도시락의 옛말로 4단 유기합에 담아낸 궁중 도시락이다. 유기합에 담긴 왕의 반찬은 소박하면서도 기품 있다. 탕평채, 어알탕, 전복만두, 명란젓, 육포장아찌, 죽순전, 광어잣찜, 더덕구이, 새우냉채, 진지, 아롱사태편채, 안심구이 등을 포함한 12첩 반상은 그야말로 스몰 럭셔리다. 

 

이 행사의 정원이 한 회에 60명인 것도 소주방에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이 60명이기 때문이다. 2015년에 복원된 소주방은 100년 만에 그 원형을 찾아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궁중음악과 판소리를 들으며 음미하는 옛 선인들의 건강한 도시락이 까칠한 마음에도 영양분을 공급한다.

 

다음은 중전이 머물러 궁 안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답다는 교태전. 창호문이 열리며 세종과 소헌왕후의 사랑 이야기가 샌드아트로 펼쳐진다. 처소 깊은 곳에 자리한 왕후의 후원에서는 어두운 밤 여인의 깊은 외로움이 시간을 관통하고, 나인이 읊어주는 시 한 자락에 바람과 함께 마음이 살랑인다.

 

경복궁 별빛야행의 또 다른 하이라이트는 평소에는 관람이 제한된 경회루 산책이다. 연못에 비친 경회루는 어느 것이 실제인지 헷갈릴 정도로 사람을 홀린다. 경회루에 올라서도 좋다는 말에 까딱하다간 물속으로 발을 디딜 판이다. 술잔에 비친 달을 마셨던 선인들의 풍류를 알 것도 같다.

 

연못에 비친 경복궁 경회루의 반영은 현실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갈 정도. 사진=고성준 기자


# 청사초롱 밝히고 총총총, 창덕궁 달빛기행

 

아름답고 적요한 궁궐의 밤은 우리를 시간 저 너머의 공간으로 훌쩍 데려다 놓는다. 서울 한복판인데도 궁궐의 밤에서는 시골의 풀냄새가 가득하다. 창호문 통해 흘러나오는 은은한 불빛을 곁에 두고, 청사초롱 밝힌 불 벗 삼아 창덕궁의 후원을 총총총 걷다보면 달빛 아래서 잊었던 님이라도 만날 것 같다. 

 

창덕궁 달빛기행은 창덕궁의 정문이자 왕족들이 드나들었던 돈화문에서 시작된다. 궁궐 안 가장 오래된 돌다리인 금천교를 건너 조선의 왕들이 즉위식을 올리고 사신을 접견했던 인정전에서 조선왕조의 시간들을 건너다본다. 문무백관의 품계석들이 펼쳐진 정전(正殿)의 마당 한가운데로 난 어도를 거닐며 선대 왕들의 근심을 헤아릴 때, 인간의 근심이야 예나 지금이나 무엇이 다를까. 

 

창덕궁 달빛기행에서 만난 초승달. 사진=고성준 기자


조선의 마지막 공주였던 덕혜옹주와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가 거처했던 낙선재에서는 뜻밖의 문창살을 보며 밤의 아름다움에 취한다. 바로크풍이라 해도 믿을 만한 우아한 창살의 문양이 안에서 흘러나오는 빛과 만나 예술작품을 만들어 놓는다. 

 

계단식 정원인 낙선재 후원을 돌아나가면 우뚝 솟은 정자 ‘상량정’이 나오고 한밤의 달빛 아래에서 문득 은근한 대금 연주를 만난다. 대금 연주에 취할 새도 없이 상량정 뒤로 남산타워와 함께 온갖 화려한 네온을 내뿜는 서울의 야경이 겹친다. 

 

창덕궁 달빛기행의 정점은 부용지다. 연잎이 흐드러진 부용지와 그 주변을 에워싼 전각들의 어울림이 달빛 아래 고고하다. 가야금 울리는 부용지에서는 잠깐의 자유시간이 허락된다. 여기저기 카메라 셔터소리 요란하니 밤마다 고요했던 부용지가 놀랄 만도 하다. ​

 

낙선재 후원의 우뚝 솟은 정자 상량정에서 은근한 대금 연주를 들으며 옛 정취를 느낀다. 사진=박정훈 기자

 

연꽃 흐드러진 창덕궁 부용지에서 기념촬영 하는 관람자들. 사진=박정훈 기자

 

2시간의 달빛기행 중 1시간은 전통예술공연 시간이다. 판소리를 비롯해 전통춤과 그림자극 등이 국악기들의 라이브 연주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공연은 양반가의 집을 모방해 지어 연회를 베풀곤 했던 연경당에서 이루어진다. 이곳에서는 따뜻한 대추차와 한과를 오물거리며 공연을 감상하고 박수를 치며 달빛 아래 창덕궁을 즐기는 것이 유일한 할 일이다.

               

궁궐체험은 자신의 체험보다 동행자의 존재가 더 크게 느껴지는 시간이다. 부부, 모녀, 가족, 커플 등 참가자들은 각지에서 삼삼오오 모였지만 하나의 그룹으로 움직이며 흔치 않은 시공간을 함께 나눈다.​

 

경복궁 별빛야행은 매주 화요일을 제외한 10월 6일부터 20일까지, 저녁 6시 30분과 7시 40분에 하루 2회씩 총 2시간 동안 진행되며, 창덕궁 달빛기행은 10월 28일까지 매주 목~일요일 저녁 7시와 8시, 하루 2회 2시간 동안 이어진다. 

이송이 기자

runaindia@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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