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2003년 한국의 젊은이들은 ‘쿨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필요 이상의 감정 소비를 자제하는 ‘쿨(cool)’이 멋지다고 여기던 당시, 드라마 세계에서도 “아프냐? 나도 아프다” 같은 대사로 깊은 사랑을 쿨하게 표현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방 하나 줄 테니, 같이 살래?”라고 무심한 듯 사랑을 고백했던 ‘올인’도 마찬가지. 제주도와 미국 라스베이거스를 오가며 화려한 로케이션 촬영을 선보인 올인은 젊은 세대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한 번 사는 인생, 호방하게 “올인!”을 외치고 싶은 청춘에게 게임 한 판으로 수십 억 원의 돈을 거머쥐는 ‘겜블러(Gambler)’의 삶은 얼마나 짜릿해 보였을 것인가 말이다.
그러나 화려한 외양과 달리 올인은 쿨과는 거리가 먼 격정적인 러브스토리였다. 김인하(이병헌)라는 한 남자의 기구한 인생 역정이 펼쳐지는 24부작 내내, 그는 민수연(송혜교)이라는 여자를 잊지 못해 눈물 흘리고 포효하고 비장해졌다.
그리고 시청자들은 인하와 수연의 숙명적인 사랑을 지켜보며 끝내 그들의 사랑이 결실을 맺도록 도왔다. 무슨 말이냐고? 원래는 인하와 수연이 절절한 사랑을 하지만, 사고로 인하가 죽었다고 생각한 수연이 인하의 친구이자 악연인 최정원(지성)과 결혼하는 설정이었다.
이후 돌아온 인하가 사랑하는 연인을 차지한 친구 정원과 운명적인 승부를 벌인다는 것. 이는 드라마 홈페이지 인물 소개에도 명시돼 있었지만, 우리나라 시청자들의 힘은 무서웠다. 인하와 수연을 맺어주지 않으면 방송국에서 폭동을 일으킬 기세의 열렬한 지지로 끝내 두 사람이 맺어졌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아마 지금이었다면 청와대 국민청원에 올라갔겠지. 역시, 한(恨)과 정(情)의 민족에게 쿨한 건 어울리지 않는다.
격정적인 러브스토리를 위해서 올인의 주인공들은 격정적인 삶을 살아야만 했다. 특히 드라마 내내 “나같이 재수 없는 놈이 수연이를 만나도 될까”라고 자책했던 주인공 인하의 인생은 요즘 드라마에선 너무 과한 설정이라 반려될 정도.
부모 없이 타짜로 노름판을 전전하는 외삼촌과 함께 전국의 노름판을 거치며 자란 성장사도 고단한데, 10대 시절 한눈에 반한 수연을 도우려다(노름빚으로 사채를 쓴 아버지 때문에 깡패들에게 납치된다) 절친한 친구가 불구가 되고, 복수한답시고 깡패의 아지트에 불을 질렀다 사람이 죽는 바람에 열여덟 나이에 교도소에 들어가 7년을 보낸다.
7년 만에 카지노 안전요원이 되고 카지노 딜러가 된 수연과 운명적으로 다시 만나지만, 과거의 악연에 발목 잡혀 사기도박을 벌이다 살인 혐의를 뒤집어쓰고 미국으로 밀항하는 것 정도는 우습다. 우여곡절 끝에 미국에서 마피아 보스의 보디가드가 되어 또(!) 운명적으로 재회한 수연과 결혼식을 올리려 하지만 마피아들의 격전에서 총에 맞아 쓰러진다.
이쯤 되면 보통 사람은 죽거나 나가떨어지겠지만, 불사조 같은 드라마 주인공답게 악착같이 되살아나 월드시리즈 포커대회의 챔피언을 따고 하이 롤러(high roller) 겜블러가 되는 인생역전을 보여준다. 수연과의 드라마틱한 해피엔딩을 위해서는 총상 후유증으로 인한 패혈증으로 사경을 헤매는 과정도 거쳐야 한다. 정말 설명만으로도 숨이 가쁜, 고단하고 운 나쁜 인생이 아닌가.
인하를 둘러싼 인연들 또한 더욱 그를 고난에 몰아넣는다. 인하와 함께 창고에 불을 지르지만 힘 있는 부자인 최도환(이덕화) 회장을 아버지로 둔 덕분에 풀려나온 정원은 수연과 삼각관계일 뿐 아니라 결정적 순간마다 인하의 삶을 힘들게 만든다.
인하의 방화로 형을 잃은 불곰파 보스 임대수(정유석)는 인하를 죽이기 위해 지옥까지 쫓아올 기세다. 인하와 인생 역경을 함께하는 절친한 형 종구(허준호)도 결정적일 때마다 인하의 고됨에 한 부분을 보탠다.
그래서인지 최근 ‘하이라이트 TV’에서 재방영한 올인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도망쳐, 수연아!”다. 운명적인 사랑이라고 꼭 몇 년씩 헤어지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해야 하는 건 아니잖나. 예쁜 얼굴에 시종일관 처연한 표정을 지어야 했던 수연이 만약 내 친구거나 가족이라면 제발 그놈의 징글징글한 사랑에서 도망치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올인이 다시 보고 싶은 드라마로 꼽히는 건 우리가 가볍고 쿨한 사랑이 아닌, 징글징글해도 뜨거운 사랑을 원하기 때문이리라. 안정되고 잔잔한 사랑보다는 격정적인 사랑의 주인공을 은연중에 꿈꾸기 때문이리라. 사랑이면 사랑이지, 쿨한 사랑이 어딨어. “운명은 늘 내 편이 아니었지만 이번 승부는 내가 이길 것 같습니다. 올인. 지금 난 내 모든 걸 걸고 한 사람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회 이병헌의 내레이션이 여전히 명대사로 기억되는 걸 보라.
이병헌과 송혜교라는 당대 스타와 당시 보기 드물던 해외 로케이션, 박진감 넘치는 화려한 승부의 세계 등 볼거리가 넘쳤던 올인. “언젠가 널 다시 만날 그날이 오면 너를 내 품에 안고 말할 거야~”라는 인하의 테마곡 ‘처음 그날처럼’의 절절한 가사도 여전히 생생하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미스터 션샤인’과 ‘아는 와이프’로 종횡무진 활약 중인 이병헌과 지성의 변하지 않는 방부제 얼굴을 만나고 싶다면, 스산한 가을을 맞아 운명적인 뜨거운 사랑을 꿈꾼다면 다시 한 번 올인에 올인해 보시길.
필자 정수진은? 영화를 좋아해 영화잡지 ‘무비위크’에서 일했고, 여행이 즐거워 여행잡지 ‘KTX매거진’을 다녔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 홈페이지에서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이며,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지금은 프리랜서를 핑계로 종일 드라마를 보느라 어깨에 담이 오는 백수 라이프를 즐기는 중.
정수진 드라마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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