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필자가 지금 공부하는 상하이의 어떤 대학교 주위로 심심찮게 커다란 철제 차량이 돌아다니는데, 한때 이름도 찬란하게 시작했던 ‘공유(共有)’ 자전거들을 무더기로 수거해간다. 학교 주위 거리는 온통 공유 자전거의 무덤이다. 가입비를 챙긴 운영자는 고장 난 것을 더 고치지 않고, 사용자는 쓴 것을 제자리에 돌려놓지 않는다. 그렇게 비를 맞으며 자전거들은 썩어가고, 공유의 이름으로 돈벌이하던 이들이 도산하면 그 회사의 자전거는 한꺼번에 죽음을 맞이한다. 그렇다면 공유란 개념 자체가 인간의 본성에 맞지 않는 것일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파미르 고원의 어떤 목축 공동체는 집 근처, 가장 긴 풀이 있는 공유지의 풀이 누렇게 마를 때까지 끝까지 그곳으로 가축을 몰아넣지 않는다. 그곳은 공유지, 공동체의 복지를 위해 마지막에 쓰일 공간이기 때문이란다. 도대체 어떤 힘이 그들에게 자제심을 불어넣은 것일까?
공유는 남의 것을 내 것처럼 소중히 여기는 구성원들이 유지할 수 있는 문화적 총체지, 이기적인 개인들이 모인 공동체 안에서 오직 경제적인 유인책만으로 실현할 수 있는 제도가 아니다. 실제로 간단한 실험을 통해 여러 번 증명되었다. 중국에서 길거리에서 쓰러진 사람보다 미국에서 쓰러진 사람이 도움을 받을 확률이 훨씬 크다는 사실이(물론 한 덩어리로서 미국이라는 국가는 중국보다 덜 이기적인 것 같지 않다).
왜 어떤 사회는 다른 사회보다 평균적으로 더 이타적인가? 각 사회의 평균적인 이타성이 다르다면, 하나의 경제 정책을 다른 문화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까?
공유 경제처럼 오늘날 논란이 되는 소득주도성장 정책은 더 이타적인 사회에 더 잘 적용될 것이 뻔하다. 그런데 더 이타적인 인간은 경제 활동을 통해 탄생하지 않고, 그보다 훨씬 큰 사회 안에서 사회적으로 육성된다. 칼 폴라니가 ‘거대한 전환’에서 그토록 강조한 것이 그것이다.
경제학은 사회와 인간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경제학은 과학을 표방하지만 정작 ‘이기적이고 개별화된 인간’이라는 가정(가정이 아니라 확신인 듯)을 조금도 버리지 않았다. 그토록 오랜 세월 ‘공산주의적 경제’를 유지한 기나긴 인류사를 볼 때, 어쩌면 그 가정 자체가 현대의 경제인을 만들었을 수도 있겠다. 모든 주장은 힘을 얻을수록 스스로를 실현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소득주도성장’이란 줄임말은 몇 개의 중요한 함의를 감추고 있다. 먼저 소득이란 부자가 아닌 저소득층 혹은 중간계층의 것을 말하며, 그들의 소득 증대를 통해 소비를 끌어올리겠다는 말이다. 이 정책은 소득재분배 측면, 그리고 궁극적으로 생산의 목적은 국민의 복지(이 원칙은 애덤 스미스가, 돈을 긁어 모으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하던 중상주의를 반박하며 내놓은 것이다)라는 원칙에 맞는 주장이다. 그러나 모두들 노력한들, 성장은 쉽게 얻어지지 않을 것이다.
고전파 경제학에서 생산성은 자본(축적)과 기술(혁신)의 함수다. 사실 노동인구가 정해져 있다면 성장은 생산성의 종속변수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고전파의 가정과 달리 성장의 주축세력이 자본가가 아니라고 하자.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는 자본가만큼 혁신적인가? 확신하기 어렵다. 혹은 그들이 자신보다 저소득층의 소득증가를 우호적으로 여길 만큼 이타적인가? 안타깝게도 한국에서 정규직 노동자가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우 개선을 방해하는 현상은 드물지 않다.
결국 저소득층의 소득증가가 일용품의 수요를 끌어올리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얼마만큼 혁신으로 이어져 생산성을 증가시킬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경제현상에서 흔히 일어나는 시차(time lag) 현상 덕분에 이 의제는 정치적으로 정확한 논점을 찾지 못하고 부유할 것이 뻔하다. 실제로 진보와 보수 정권을 가리지 않고 “전 정권의 잘못 때문에 경제가 이 모양”이라는 말을 전가의 보도처럼 쓰지 않는가?
필자는 종부세-법인세-소득세의 인상을 통한 적극적인 재분배를 옹호한다. 불평등은 이제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마저 위협하기 때문이다. 최저임금 인상도 단기적으로는 실업을 늘리겠지만, 장기적으로 생산성이 높은 분야로 자원이 집중되는 효과를 낳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소득주도 정책이 어떻게 생산성을 높이는지, 그 명확한 연결고리를 아직 찾지 못하겠다. 결론적으로 소득주도성장 정책은 여전히 우리의 문화 수준과 철학에 따라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는 의제라고 본다.
얼마 전 박원순 서울시장이 강북개발을 들고 나오니 강북의 부동산이 폭등했다. 부동산 시세 차익은 생산성 향상과 아무런 관계가 없고, 무주택 저소득자는 물론 심지어 ‘성실한’ 산업자본가의 몫까지 갈취하는 행동이다. 그러나 시장의 말 한 마디에, 기다렸다는 듯이 일확천금을 향해 달려든다. 만약 전 국민이 시세 차익을 노린다면 어떤 사회적인 합의도 이뤄지지 않을 테니, 소득주도성장은 신기루에 불과할 것이다. 노동 없이 남의 것을 가로채는 데 혈안인 사람들이 저소득층의 몫을 인정하겠는가?
이렇게 주장하면 일부 경제학자들은 경제를 도덕이나 철학의 문제로 치환한다고 반박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 경제 문제는 출발부터 철학의 문제였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라 유동적인 존재다. 예컨대 1만 년 전의 인간들을 데리고 와 현대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을 맡겨 보라. 생산성은 하루 아침에 최소한 몇천 년 후퇴할 것이다. 반대로 오늘날 록히드마틴의 미사일 개발자와 주주들을 1만 년 전 원시공동체로 데려가 경제를 맡겨보라. 그들은 순식간에 자신들을 제외한 모든 구성원을 노예로 만들어버릴지도 모른다.
기껏 1~2%로 보편적인 경제현상을 검증할 수 있다고 말하는 계량경제학자들의 주장은 사실상 많은 것을 놓치고 있다. 그들이 아무리 사회과학에 수학 공식을 도입하여 주무른다 해도 이론물리학자나 수학자의 눈에는 산수나 하는 초보자들일 뿐이다. 한때 모기지론을 기반으로 파생상품을 부풀려 세계 경제를 일대 혼란에 빠트린 이들이 바로 산수 전문가들이었다. 그들에게는 경제현상의 본질을 보는 철학이 없었다.
사실 명목성장률 0%에서도 경제는 성장하고 있다. 보편적 기술 전파에 의한 품질 향상이라는 요소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286컴퓨터를 몇백만 원에 사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그보다 100배나 좋은 성능의 컴퓨터를 몇십만 원에 살 수 있다. 그 시절 286컴퓨터가 액면가대로 오늘날 컴퓨터의 열 배의 가치를 가졌을 리는 없다. 농산품이나 부동산에서는 명목물가 상승이 실질가격을 반영하지만, 기술집약적 상품 분야에서는 실질가격이 항상 하락하는 경향이 있으니, 바꿔 말해 실질소득은 증가한다.
이제는 1~2%의 숫자놀음을 벗어나, ‘소득주도’와 ‘성장’을 어설프게 아교로 붙이는 대신 소득주도의 의미를 명확히 할 때다. 맹자는 그 분야에서 탁월한 혜안을 보여주었다. 사람은 무엇을 만드느냐에 따라 인격이 결정된다. 장의사의 본성이 악하지 않지만 경기가 나빠지면 은근히 죽음을 바라듯이, 화살촉을 만드는 이는 자기도 모르게 남의 심장을 뚫고자 애를 쓴다. 반면 갑옷을 만드는 이는 기어이 심장을 감싸고자 한다.
화살 십만 개를 만드는 어떤 사회가 갑옷 천 벌을 만드는 어떤 사회보다 명목적으로 부유하다고 하자. 오매불망 죽이려 물건을 만드는 공동체와 살리려 만드는 공동체의 행복 수준이 같을까? 끝없이 몰가치적인 성장만 이야기하면, 영원히 남에게 나눠주지 않는 구성원들만 양성될 것이고, 이들은 옛날의 화살 장인처럼 남의 희생을 가볍게 여길 것을 뻔하다.
어떤 독한 화살로도 뚫을 수 없는 갑옷을 만들겠다는 사명감으로 불타는 이들이 모여, 삶을 위한 혁신을 이뤄가는 공동체는 꿈에 불과할까?
필자 공원국은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중국지역학을 전공했으며, 중국 푸단대학교에서 인류학을 공부하고 있다. 생활·탐구·독서의 조화를 목표로 십 수년간 중국 오지를 여행하고 이제 유라시아 전역으로 탐구 범위를 넓혀, 현재는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서 현지 조사를 수행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춘추전국이야기 1~11’, ‘옛 거울에 나를 비추다’, ‘유라시아 신화기행’, ‘여행하는 인문학자’ 등 다수가 있다.
공원국 작가·‘춘추전국이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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