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계엄 문건 작성 관련자들을 불러 무작정 ‘군사 반란을 할 의도가 있었느냐’고 묻는 상황과 다름없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럴 의도가 있었다’고 대답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이 때문에 수사단 내부에서 방향을 틀어보자는 의견이 최근 나오기도 했다.” 기무사 계엄 문건 수사를 진행 중인 군검 합동수사단 사정을 잘 알고 있는 한 관계자의 말이다. 그는 “수사가 난항을 겪고 있다는 뜻이냐”는 질문에 “잘 풀린다고 하긴 어렵다”며 에둘러 답했다.
지난 7월 출범한 합수단의 기무사 계엄령 문건 작성 관련 수사 핵심은 두 가지다. 실제 실행 의도가 있었는지, 지시한 윗선이 누구인지를 규명하는 것이다. 일단 합수단은 윗선 규명에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 계엄 문건이 일선 군부대의 검토 수준을 넘어 당시 국방부와 청와대 등이 지시해 작성된 것으로 확인되면 ‘실행을 전제로 한 계획 문건’이라는 추론에 더욱 힘이 실리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합수단은 지난 8월 22일 위수령 및 계엄 문건의 법률 검토를 맡은 것으로 알려진 노수철 전 국방부 법무관리관을 소환해 한민구 당시 장관으로부터 지시를 받았는지 등을 물었다. 20일에는 박근혜 정부 청와대 국방비서관을 불러 계엄 문건 작성 당시 기무사와 청와대 사이에 교감이 있었는지도 조사했다. 앞으로 합수단은 당시 청와대 국가안보실 관계자 등도 추가로 불러 조사할 예정이다.
수사 범위가 군을 넘어 전 정부 청와대까지 확대됐지만 군 안팎에서 나오는 전망은 밝지 않다. 합수단 수사가 사실상 계엄 문건 작성에 관여한 관계자들 ‘진술’에 의존하는 비중이 커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이유다.
실제 수사 초기 단계서부터 최근까지 계엄 문건을 작성한 태스크포스(TF) 관계자와 문건에 등장하는 15개 ‘계엄임무수행군’ 지휘관과 작전장교 등 군 관계자들 수십여 명이 차례로 조사를 받았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관계자 사무실 등 압수수색을 통해 자료를 확보하고 실무자 휴대전화를 압수했지만 계엄 문건 관련 자료만 빠져 있는 등 유의미한 증거는 아직까지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군 관계자는 “앞서 조사를 받은 군 관계자들 대부분 지시를 받아 문건을 작성했다거나 본인과 관계없다는 취지로 진술했다”며 “실행을 전제로 한 계획이라는 점은 명확한 증거 없이 진술만으로 규명하기 어렵다. 실행 의도가 있었냐고 물어보는 건데, 의도라는 게 추상적인 개념인 만큼 부인하고 모른다고 버티면 그만이다. 실무 단계를 지나 윗선으로 올라갈수록 의도를 부인하는 진술이 나올 가능성이 더 높다. 합수단이 수사 방향을 틀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수밖에 없다”라고 설명했다.
# “계엄 문건도 군 의사결정체계에 따라 작성, 다시 분석해야”
반면 일부 군 전문가들은 계엄 문건 작성 과정과 문건의 성격 분석을 다시 해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계엄 문건 수사 초기 단계에서 진행한 내용 분석 등과는 다른 방식이다.
최근 MBC ‘PD수첩’을 통해 계엄 문건을 분석한 김영수 국방권익연구소장(전 해군소령)은 “군에서 어떤 사업이나 일을 추진하기 위해 작성·보고되는 모든 문건은 ‘군 기획관리체계나 의사결정체계’에 따라 만들어진다. 군 전산시스템인 온나라시스템(전자결제시스템)도 이를 기반으로 운용된다. 미군으로부터 도입한 체계다”라며 “계엄 문건도 마찬가지로 작성됐다. 문건이 의사결정체계 가운데 어느 단계에 위치해 있는지를 확인하면 단순한 검토 수준의 문건인지, 실제 실행을 전제로 한 계획인지 명확히 구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군 의사결정체계는 크게 6가지 단계(PPPBEE)로 나뉜다. 정책 수립(Policy)→기획(Planning)→계획(Programming)→예산 편성(Budget)→실행(Execution)→평가(Evaluation)’이다. 정책 수립은 국방목표 및 정책 기본방향과 대외정책을 설정하는 단계다. 예를 들어 북한과 관계를 적대적으로 유지할지, 평화 체제를 구축할지 정하는 식이다. 2년에 한 번씩 발행하는 국방백서나 국방정책서가 여기에 속한다.
정해진 정책 방향에 따라 기획 작업이 시작된다. 최대 20년까지 바라보는 장기 기획이다. 국방 목표 달성을 위한 군사전략과 무기체계 기획 및 부대 기획이 수록된 군 합동군사전략목표기획서(JSOP, Join Strategic Objective Plan)가 대표적이다.
장기 기획이 마무리되면 5년 단위의 중기계획서가 작성된다. 이 중기계획을 근간으로 집행예산이 편성되고 실행이 이뤄진다. 즉, 군에서는 이 중기계획서 문서부터가 실행을 전제로 작성되는 ‘계획문서’라고 볼 수 있다.
# 실행 전제로 한 ‘계획 문서’에 가까운 계엄 문건
이에 따라 계엄 문건을 군 의사결정 체계와 맞춰 보면, 단기간 내에 실행을 위한 계획 문서에 가깝다는 합리적 추론이 가능하다. 정책수립과 기획단계 및 중기계획 단계를 건너뛰고 세부 계획단계로 넘어온 정황이 곳곳에서 발견돼서다. 문건 제목과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첫 번째 장이 대표적이다. 계엄 문건 제목은 ‘전시 계엄 및 합수업무 수행방안’으로, 전쟁에 대비해 만든 것처럼 보이지만 첫 장부터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정국 분석이 시작된다. 합동참모본부에서 북한의 남침에 대비해 만든 ‘전시계엄대비계획서’에는 북한 동향 분석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과 차이가 있다.
합수단이 수사 과정에서 확보한 진술에서도 전시를 대비한 계엄 문건이 아니라는 점을 뒷받침한다. 계엄 문건을 작성한 실무자 일부는 계엄 문건 제목이 ‘전시 계엄 및 합수업무 수행방안’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으로 전해진다. 67쪽짜리 ‘대비계획 세부자료’ 제목도 ‘현시국 대비 계엄계획’이었다는 진술도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합수단은 이를 두고 법률검토 단계나 ‘윗선’ 보고 단계에서 문제가 될 것으로 예상해 문건 작성이 완료된 이후 제목을 새로 짓거나 수정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계엄 문건 속 ‘전투부대 배치 항목’도 실행을 전제로 한 계획문서라는 지적이다. 하나씩 뜯어보면 상당히 치밀하게 구성돼 있어서다. 계엄군 구성이 대표적이다. 기계화 6개 사단, 기갑 2개 사단, 특전사 6개 여단, 대테러부대인 707대대 등 총 15개 부대가 특정돼 있다. 이들 부대가 서울과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 투입되는 지역도 구체적으로 명시돼 있다.
일각에선 그동안 군이 을지연습 등을 통해 훈련한 대로 계엄 발동 직후 자동적으로 부대가 움직일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오지만, 계엄 문건처럼 기계화사단, 기갑여단, 특공대가 짝을 지어 주요 길목을 장악하는 형태의 훈련은 한 차례도 실행된 적 없다는 게 군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그 밖에 촛불 집회 확산을 막기 위해 시민들의 휴대전화 전파 방해부터 계엄에 반대하는 국회의원 체포, 56개 언론사에 검열단 파견 등도 ‘실행을 전제로 한 계획문서’에서나 나올 수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이 기각했을 때 “이 결정에 불만을 품은 무리의 폭력시위로 인한 치안 부재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단순 검토 문건”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앞서의 군 의사결정체계와 맞춰보면 앞뒤가 맞지 않다.
군 관계자들에 따르면, 군의 검토 보고서는 지휘관의 의사결정을 지원하기 위한 검토서다. 정책과 기획, 기획과 계획 등 각 단계 사이 또는 이미 수립된 정책, 기획이나 계획을 보충하거나 보완하기 위해 작성된다. A안, B안, C안을 제시하고 각각의 장단점을 명시해 최선의 선택을 돕는다. 하지만 계엄 문건에는 이미 계엄 발동이라는 ‘하나의 안’이 결정됐고, 앞서의 계엄군 배치처럼 각각의 세부 실행 방안이 구체적으로 명시돼 있다.
이에 대해 합수단 관계자는 “진행 중인 수사(윗선 지시 규명 등)와 동시에 계엄 문건이 정상적인 단계를 밟아 작성됐는지 살펴볼 예정”이라며 “각각의 개별 사안보다는 계엄 문건 작성과 관련한 포괄적인 사안을 조사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앞서의 김영수 소장은 “계엄 문건에 검토의 성격, 실행 계획의 성격, 참고 자료의 성격 세 가지 요소가 혼재돼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군 의사결정체계에 따라 문건을 세부적으로 분석해보면, 실행을 전제로 한 계획들이 문건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검토나 세부자료는 실행계획을 위한 보조적인 수단에 불과하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며 “‘실행 계획 아니면 검토 보고서’라는 이분법적 사고로는 이 문제를 풀 수 없다. 합수단의 수사가 중요한 이유다”라고 지적했다.
문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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