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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림 탐식다반사] 한여름의 미뉴에트, 콩국수 정경

백태에 땅콩과 깨를 갈아넣은 진득한 콩국물, 아삭하게 잘 절여진 배추겉절이

2018.08.14(Tue) 09:39:10

[비즈한국] 지난 4월 칼국수를 먹었던 ‘만나손칼국수’에 대한 두 번째 이야기. 진한 칼국수를 소개했던 봄을 보내고, 여름이 한창 깊어서야 퇴계로 5가 교차로까지 다녀올 용기가 났다. 물론 용기만 가상했지, 그날도 역시 37℃ 기온에 녹아버렸지만 말이다.

 

넉 달 만에 찾아간 만나손칼국수. 종이 먼지와 기름때 골목은 여전했고, 가게의 정경 역시 여전했다. 밥때를 놓친 동네의 기술 장인들이 듬성듬성 찾아오는 느지막한 시간대. 만나손칼국수의 풍경은 콩나물시루가 되는 점심 나절에 비해 느슨하다.

 

직원 한 분은 테이블 둘에 배추를 잔뜩 쌓아놓고 숨 쉬듯 몸에 밴 칼질로 커다란 플라스틱 통 속으로 배추를 석석 베어 넣는다. 마치 콧등치기 국수를 써는 것처럼 배추를 다루는 모습이 능숙하다. 내일 쓸 배추 겉절이 김치를 담글 손질이다.

 

소금에 슬슬 절이고, 알싸하게 마늘을 듬뿍 섞은 양념을 무쳐 두면 내일 또 골목의 사람들이 찾아와 일용할 김치가 된다. 하루에 손질하는 한 망만큼이 딱 맞아 모자란 적도, 과하게 남은 적도 없었다고 한다. 또 배추 값이 이토록 치솟았어도 불평하는 법 없이 쭉 똑같이 해온 일이라고 한다.

 

만나손칼국수의 콩국수는 백태에 땅콩, 깨까지 들어가 고소함이 배가된다. 마늘향 알싸한 겉절이 김치와 좋은 궁합. 사진=이해림 제공

 

다른 직원 한 분은 끝인가 싶으면 어김없이 꼬리를 무는 손님의 면을 삶아 상을 차려낸다. 칼국수는 김이 나는 멸치 육수에 휘휘 말고, 콩국수는 육수냉장고에 담긴 콩국물을 한 바가지 푸고 얼음 몇 알 동동 띄워서. 한가해야 할 시간대까지 분주함이 끊이지 않는다. 그리고 설거지 등 주방 보조를 맡는 직원이 한 분 또 있다.

 

한가한 참에 직원 분들께 말 붙일 틈이 있었다. 그리하여 엉성하나마 단골 이력 몇 해 만에 알게 된 새로운 사실. 배달원인 줄 알았던 분이 사장님이었다. 언제나 가게에 들어서기 무섭게 또 오토바이를 몰고 배달을 가곤 하던 그분이. 게다가 풍기는 기운마저 비슷했던 사장님과 직원들은 가족도 아니요, 친지도 아닌 제각각 남남이었다나.

 

놀란 리액션에 배시시 웃는다. “그렇죠. 나한테 사장님이라고 하는 사람도 많고. 다들 그래요. 가족 아니냐고. 워낙 오래 여기서 일했으니까.” 직원들은 시원한 가게에서 웃으며 음식을 내고, 현금을 받고 거스름을 내며 계산도 하는데, 사장은 땀 뻘뻘 흘리고 새카맣게 그을려가며 배달만 뱅뱅 도는 식당이란 참 흔치 않다. 무릇 자영업 사장의 꿈이란 카운터에 앉아 돈이나 세는 것이 아니었던가. 남을 부려 나의 나태함을 보장받는 경지 말이다.

 

게다가 이 사장님, 가게 문 열기 전에는 ‘셰프님’이시다. “사장님은 우리보다 빨리 새벽부터 출근해서 면 썰고 육수 끓이고. 매일 다 만드니까.” 이런 자부심이라니. 이토록 말투에 묻어나는 애정이라니. 근속연수가 가게 나이와 다르지 않은 직원들, 그리고 일개미 같은 사장님은 가족보다도 더 이상적인 가족 사이처럼 보였다.

 

‘콩국수 개시’, 올해는 5월 1일에 했다. 사진=이해림 제공

 

그새 또 배달을 나가서 눈길도 마주하지 못한 사장님은 오래전 청춘 시절에 유명 칼국수 전문점에서 기술을 배워 독립했고, 이 식당을 인수했다고 한다. 상호도 그대로. 1990년대 초반의 일이란다. 큰 욕심 없이 퇴계로 5가 뒷골목에서 가게를 넓히지도, 분점을 내지도 않고 단지 동네 장사를 소명 삼아 지낸다. 노동의 냄새가 나부끼는 골목의 터주신 동네 이웃들을 배불리 먹이는 일만으로도 하루하루가 성실히 소요됐으리라. 

 

사장님 가족이 농사 지어 올려 보내는 백태에 땅콩, 깨를 같이 갈아 진득하고 고소하기 짝이 없는 콩국물은 올해도 꾸덕하게 진하다. 묵직하게 면을 들어 올리면 노란 빛이 은은하게 도는데, 오늘도 새벽부터 사장님이 만든 면은 실패 없이 콩국수에 최적화되어 있다.

 

그리고 아삭아삭하게 잘 절여진 겉절이. 변함없이 소소하게 완벽하다. 고소함을 톡 튀어 오르게 하는 짭짤한 간에 손님 쪽을 향해 맞춰둔 서늘한 에어컨 바람. 그리고 서로 먼저 보듬으며 살 줄 아는 다정한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

 

손때에 낡고 손길에 닳은 작은 가게 안의 사람 정경이 문득 사랑스럽게 보인다. 한여름, 콩국수의 미뉴에트를 들었다.​

 

필자 이해림은? 패션 잡지 피처 에디터로 오래 일하다 탐식 적성을 살려 전업했다. 2015년부터 전업 푸드 라이터로 ‘한국일보’ 등 각종 매체에 글을 싣고 있다. 몇 권의 책을 준비 중이며, ‘수요미식회’ 자문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페이스북 페이지에서도 먹는 이야기를 두런두런 하고 있으며, 크고 작은 음식 관련 행사, 콘텐츠 기획과 강연도 부지런히 하고 있다. 퇴근 후에는 먹으면서 먹는 얘기하는 먹보들과의 술자리를 즐긴다.​ 

이해림 푸드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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