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시간이 흘러 지날수록 너를 사랑하면 할수록, 너에게 난 아픔이었다는 걸, 너를 사랑하면 할수록.”(록그룹 부활의 곡 ‘사랑할수록’ 클라이맥스 부분 가사)
“나는 그 친구(김재기)만큼 노래 잘하는 사람을 우리나라에서 본 적이 없어. 부르면 소름이 끼쳐, 소름이.”(한 방송에서 부활의 리더 김태원이 보컬리스트 김재기의 실력을 평가한 말)
1994년 봄부터 여름 사이 종로 세운상가 인근 즐비했던 레코드 가게와 종각 역 종로서적(현 다이소) 앞 속칭 길보드(해적 카세트테이프를 팔던 리어카)에는 2~3미터도 채 안 돼 울려 나오는 가슴 시린 록발라드가 있었다. “한참 동안을 찾아가지 않은 저 언덕 너머 거리엔~”이란 가사로 시작하는 부활의 ‘사랑할수록’(1993)이다.
당시 거리에서 음질 좋은 스피커를 통해 ‘사랑할수록’이 울려 나올 때면 멍하니 서서 이 곡을 끝까지 듣기 일쑤였다. 실연의 상처를 절절히 표현한 가사와 고해성사를 토해내듯 절규하는 김재기의 절창은 자신의 경험인 양 듣는 사람의 가슴을 후벼 파고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기에 넘치도록 충분한 것이었다.
1994년 한 해는 그렇게 ‘사랑할수록’의 해였다. 이 곡을 유작으로 남긴 김재기는 성공이란 달콤한 열매를 만끽하지 못한 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1968년에 태어나 1993년 8월 11일 타계했으니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불과 25세 젊디젊은 청년의 어처구니없는 종말이었다.
일반인이 범접할 수 없는 재능을 가진 이들을 흔히 천재라고 한다. 요절한 천재들을 이야기할 때면 “그(녀)가 천수를 누렸다면 그 분야는 어떻게 변했을까?”라며 안타까워하곤 한다. 김재기가 그런 경우다. 그가 부르는 노래를 들어본 평론가와 일반인 상당수는 주저 없이 ‘천재 보컬’이라고 칭송한다. 그러나 그는 피기도 전에 져버렸다. 그가 살아 있고 현재까지 활동을 했다면 국내 록음악 판도는 어떻게 변했을까.
부활은 1984년 ‘디 엔드’에서 출발해 올해로 34년을 이어온 현존하는 국내 최장수 록그룹 가운데 하나다. 부활의 구심점은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면서도 묵묵히 그룹을 지킨 리더이자 기타리스트 김태원이다. 그는 블루스에 뿌리를 두고 다양한 장르의 록을 섭렵하는 탁월한 작곡, 마치 시와 같은 서정적인 작사, 뛰어나 연주 실력까지 겸비한 대단한 뮤지션이다. 김태원은 김도균, 신대철과 함께 국내 3대 기타리스트로 꼽힌다. 김태원은 두 사람에 비해 연주 실력은 떨어진다는 평을 받지만 그들을 압도하는 작곡, 작사 능력을 가지고 있다.
김태원은 그룹의 프론트맨인 보컬을 발굴하는 데 매우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 있다. 보컬을 뽑은 후 그는 자신의 머릿속에 그려진 음악을 완벽히 실현할 때까지 혹독하게 보컬을 조련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래서일까. 김종서, 이승철, 박완규 등 부활을 거친 보컬들은 그야말로 국내 대중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가객들이다. 그런 김태원이 부활의 역대 보컬들 가운데 단연 최고로 꼽는 사람이 세 번째 보컬인 김재기다.
김재기는 어려서부터 자신의 목소리가 록에 적합하다는 것을 깨닫고 각고의 노력을 통해 실력을 갈고닦았다. 그는불과 20세 때인 1988년 헤비메탈 밴드 뉴 작은 하늘의 보컬로 데뷔했다. 뉴 작은 하늘 음반에 실린 노래들을 들어보면 보컬의 나이가 도저히 약관으로는 믿기지 않는다. 김재기는 이미 그때부터 최정상급 보컬 실력을 갖추었다.
3옥타브 G#(솔#)의 고음을 힘들이지 않고 내지르는 ‘저녁 노을’, 3옥타브 이상의 음을 수시로 내는 ‘끝없는 환상’, 노래 끝 부분 20초 정도를 3옥타브 이상 고음으로 끄는 ‘하늘’을 들어보면 그의 진가를 즉시 확인할 수 있다. 그가 내는 고음은 완벽한 두성을 사용해 투명했고 엄청난 성량을 통해 배가되는 강력한 것이었다. 아울러 통쾌하게 쭉쭉 뻗는 맛이 천하일품이었다.
고음만 탁월한 게 아니었다. 김재기는 완벽한 발성을 통해 중저음까지 자유자재로 낼 수 있었다. 또 음색에 우수가 깃들고 윤기가 흘렀으며 독특한 비브라토를 소유해 노래를 고급스럽게 소화해 냈다. 어떤 때에는 퇴폐적이고 사악해 보이기까지 하는 음색으로 소리를 질러대곤 했다. 따라서 김재기는 몇 마디로 도저히 정의할 수 없는 무척이나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보컬이었다.
그러나 뉴 작은 하늘은 극한의 헤비메탈 음악을 추구하다 보니 당시로서 불모지였던 국내 음악시장에서 상업적으로 처참히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김재기라는 보컬도 그렇게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나 빛을 머금은 자 언젠가 빛을 발한다고 했다. 김태원이라는 걸출한 뮤지션과의 만남은 김재기란 이름 석 자를 현재까지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당시 김태원의 상황도 좋지 않았다. 김태원은 부활 1, 2집 성공의 기쁨도 잠시 1987년에 이어 1991년 대마초 흡입으로 옥고까지 치르면서 팬들의 뇌리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그가 보컬을 찾던 어느 날 중학교 시절 친구인 장동명 목사가 “불광동에 죽이는 보컬이 있다”며 한 사람을 소개했다. 바로 김재기였다.
장 목사의 교회 예배당에서 김재기가 김태원에게 들려준 노래는 영국 하드록 그룹 ‘나자레스(Nazareth)’의 ‘Love Hurts’(1975)였다. 김재기의 노래를 처음 들어 본 김태원은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소감을 이렇게 전했다. “그거(그 노래가) 굉장히 고음이거든. 그거를 아! 마이크를 (입에다 가까이) 여기다 대고 부르면 성량이 작은 겁니다. 근데 여기다 (성악가처럼 마이크를 멀찍이 떨어뜨려놓고) 대고 부르는 거야. 근데 쩌렁쩌렁 울려. 소리가.”
김재기는 1991년 군에 입대했고 김태원은 이 대단한 보컬을 기다렸다. 김태원은 김재기를 마치 ‘재기’라는 이름 그대로 자신의 오랜 부진을 털고 다시 일어서려는 밑바탕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김재기가 제대하자 부활의 세 번째 앨범 ‘기억상실’ 앨범 제작에 들어갔다. 1993년 8월에 접어들자 드디어 앨범 제작은 마무리단계로 접어들었다.
‘기억상실’ 앨범에서 김재기의 목소리가 담긴 곡은 ‘사랑할수록’ 외에 ‘소나기’와 ‘흑백영화’ 세 곡뿐이다. 당초 김태원은 앨범 타이틀곡을 ‘소나기’로 정했고 김재기가 후렴을 작사하고 이 부분을 노래한 ‘흑백영화’를 작업하고 있었다. 이후에 ‘사랑할수록’ 작업을 하려고 했었다. 김재기는 홀로 연습했던 ‘사랑할수록’을 스튜디오에서 데모(샘플 음원을 녹음한 노래)로 단 한 번에 녹음했다.
당시 김재기는 부활의 리드 보컬로서의 자부심과 새 앨범 출시라는 부푼 꿈을 안고 있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운명은 이 재능 많은 청년에게 성공의 맛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는 공연을 하기 위해 당시 가격으로 40만 원에 불과했던 자신의 중고차 프레스토를 운전해 공연지로 가던 중 홍제고가도로(현재 철거)에서 빗길에 미끄러져 중앙선을 넘어 마주오던 차와 충돌했고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사망 시점은 1993년 8월 11일 새벽 3시였다.
사고 전 김재기는 김태원에게 전화해 “불법주차로 차가 견인됐는데 과태료를 낼 3만 4000원을 꿔달라”고 했다. 김태원도 당시 가난한 로커라 돈이 있을 리 없었다. 그는 김재기에게 “최대한 돈을 구해볼 테니 기다려보라”고 말했다. 김태원이 생전 김재기와 한 마지막 통화였다. 김재기는 어디선가 돈을 구해 차를 찾았고 공연지로 향하던 중 ‘불귀의 객’이 된 것이다.
김재기는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부터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던 것 같다. 그는 친동생이자 훗날 자신의 뒤를 이어 부활의 4대 보컬이 된 김재희에게 “요즘 꿈자리가 뒤숭숭한데, 혹시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네가 내 자리를 대신해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부활의 앨범 ‘기억상실’은 1993년 해가 저물어갈 때쯤 발매됐다. 초기 냉담한 반응에 김태원은 낙심했으나 ‘사랑할수록’을 들은 이들로부터 입소문이 퍼지며 삽시간에 120만 장이 팔려나갔다. 지금까지 전 세계 음악시장에서 데모 녹음만으로 이러한 앨범 판매고를 올린 음반은 ‘기억상실’이 유일하다. ‘사랑할수록’은 국내 지상파 방송 가요순위 프로그램에서 1위를 석권하는 등 1994년을 부활과 김태원에게 최고의 한 해로 만들어주었다.
‘사랑할수록’은 김재기가 반주에 맞춰 단 한 번에 불러 녹음된 데모 트랙이었음에도 출중한 보컬 실력으로 완성도가 대단히 높다. 처음 듣는 이들은 이 곡이 데모 녹음인 것을 도무지 믿지 못한다. 어떤 리메이크 곡들은 원곡을 압도할 때가 적지 않다. 하지만 ‘사랑할수록’은 예외다. 김재희, 박완규, 이승철, 정단, 정동하, 김동명, 김연우, 이수, 카이 등 쟁쟁한 가수들이 이 노래를 리메이크했지만 김재기가 부르는 감정의 깊이에 한참 못 미친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들은 대중 앞에서 ‘사랑할수록’을 부르기 위해 부단히 연습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데모 한 번만으로 이 노래를 불후의 명곡 반열에 올린 김재기의 천재성은 정말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부활의 3집 ‘기억상실’은 보컬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미완성 상태로 발매됐다.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테마는 김재기에 대한 그리움과 추모다. 앨범의 ‘8.1.1’이란 연주곡은 김재기의 기일을 기렸다. ‘흑백영화’ 역시 김재기 목소리로 후렴만 녹음된 탓에 김태원은 후렴을 제외한 부분을 직접 불러 완성했다. 앨범의 다른 연주곡 ‘별’은 김재기가 보컬을 맡기로 했으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연주곡으로 변경됐다. 10년 뒤 2004년 록그룹 원티드의 서재호가 이 곡을 부르려고 했으나 공교롭게도 김재기의 기일인 8월 11일 교통사고로 사망해 록음악 팬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남겼다. ‘별’은 연주곡으로 정우성, 손예진 주연의 영화 ‘내 머리속의 지우개’(2004)에 테마 음악으로 삽입됐다.
김재희는 세상을 떠난 형을 대신해 부활에 합류해 3집 활동과 4집 앨범의 보컬로 활동했다. 김재희에게 형 김재기는 음악 스승이었다. 일찍부터 천부적인 실력을 가진 형의 영향으로 김재희 역시 음악에 심취했고 형을 따라했다. ‘사랑할수록’ 뮤직비디오를 보면 지금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말쑥하게 이발을 하고 살이 오른 김태원과 준수한 외모의 김재희가 등장한다. 뮤직비디오의 음원은 형 김재기의 목소리다. 김재희는 부활 3집 활동 당시 방송에서 주로 형의 목소리를 립싱크하며 활동했다.
김재기 사후 망연자실한 김태원은 한동안 3집 활동을 포기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김재기의 동생 김재희를 보컬로 기용하게 된 이유는 이러하다. 고인의 장례식장을 찾은 김태원에게 형제의 아버지는 “동생 재희가 있다. 목소리도 비슷하니 보컬로 써달라”며 적극적으로 부탁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렇게라도 김재기의 목소리가 묻히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김태원은 오디션에서 김재희에게 고인이 자주 불렀던 ‘무정 부르스’를 불러보라고 했다. 그러자 김재희는 고인과 유사한 음색과 창법으로 노래를 불렀고 그렇게 형을 대신해 부활에 합류했다. 우애가 각별했던 형제였기에 김재희는 부활에서 활동하는 내내 형을 생각하며 가슴 아파했고 결국 4집을 끝으로 그룹을 떠났다. 현재 김재희는 CCM 가수와 뮤지컬 배우로 음악 활동을 이어가며 간간이 방송에 출연해 근황을 알리고 있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지만, 김재기가 지금까지 활동을 이어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생존해 있다면 올해로 지천명의 나이다. 아마도 임재범과 쌍벽을 이루는 최고봉의 록 보컬 반열에 올라 있지 않았을까 싶다. 음악 팬들에게 보여줄 게 너무나 많이 남아 있는데. 그래서 그의 죽음이 정말 안타깝다. 그래도 1994년처럼 어디에서나 ‘사랑할수록’ 원곡이 흘러나오는 순간 김재기는 목소리로나마 자신이 몸담았던 그룹 이름 ‘부활’처럼 다시 살아나지 않을까.
장익창 기자
sanbada@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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