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 도입을 결정했다. 스튜어드십 코드란 기관투자자가 고객의 대리인으로서 기업경영에 적극 참여하는 ‘행동지침’이다. 저택에서 주인 대신 집안일을 맡아 보는 집사(스튜어드)의 역할을 기대한다는 의미다. 국민연금에 대입하면, 국민연금이 가진 돈과 주식 등의 주인은 국민이고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가 집사 역할을 맡아 이를 운용한다.
앞으로 국민연금은 국민 노후자금을 맡아 운용하는 ‘국민의 집사’로서, 보다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를 하게 된다. 다만 도입 전부터 핵심 쟁점이었던 국민연금의 ‘경영참여’가 ‘제한적 시행’이라는 모호한 방식으로 결정되면서 관치나 연금 사회주의 등 논란은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국민연금의 기금 적립금은 634조 원이다. 전 세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규모다. 기금은 주로 우량기업에 투자된다. 31일 기준 국내 주식시장 시가총액 7%, 주요 대기업 지분 10%가량을 차지한다. 삼성전자 주식 23조 원어치를 비롯해, SK하이닉스(3조 2000억여 원), 네이버, 현대차(각각 2조 6000억여 원) 주식을 보유하는 등 주요 대기업의 2대 주주로 올라 있다. 국민연금이 5% 이상의 주식을 가진 국내 기업은 총 276곳이다.
투자 받은 기업이 성과를 낼수록 국민 노후자금이 더 늘어난다. 따라서 국민의 집사이자 상당수 기업의 주요주주인 국민연금이 기업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일은 당연하게 비칠 수 있지만, 그동안 제 역할을 못한다는 지적을 꾸준히 받아왔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현실적인 제약이 컸다. 국민연금이 초대형 공룡기금인 만큼 기업뿐만 아니라 국내 시장 전체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민간에 권한을 위임하는 일도 불가능해 ‘힘’을 분산시킬 수도 없었다”며 “결국 ‘주주총회 거수기’라는 오명을 쓰면서도 최소한의 의사만을 내비치며 노후자금을 운용해왔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연기금에 큰 손실이 발생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소극적인 태도로 기업의 건전한 성장을 견인하지 못하고 국민의 노후자금을 훼손했다는 지적이 나오면서부터 국민연금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목소리가 커졌다. 이후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주주권 강화’가 주요 정책에 포함됐고 최근 ‘대한항공 총수 일가’ 사건에서도 국민연금 역할론이 부각되면서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에 힘이 실렸다.
지난 30일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는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방안을 의결했다. 2016년 12월 금융당국과 한국기업지배구조원(CGS)이 ‘한국형 스튜어드십 코드’ 초안을 작성한 지 1년 7개월 만이다. 도입안에는 △제한적으로 경영참여 허용 △위탁운용사에 의결권 행사 위임 및 스튜드십 코드 도입 시 가산점 부여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 중심 의결권, 주주권 행사 결정 등이 포함됐다. 국민연금이 단순히 목소리를 내는 데 그치지 않고 기업 경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된 셈이다.
# “임원 해임까지 가능” 재계는 반발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에 따른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가장 큰 쟁점은 국민연금의 경영참여다.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전 공청회 등에서부터 논란이 됐다. 경영참여를 두고 재계 측과 근로자 측의 의견이 팽팽히 맞서면서 격론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지난 26일로 예상됐던 도입 결정이 한 차례 연기되기도 했다.
기금운용위 회의에 참석한 한 관계자에 따르면 정부 원안은 일단 경영참여를 빼고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 이후 추진하는 내용이었지만, 허용한 뒤 여건을 보완하자는 시민단체 입장이 일부 수용됐다. 현재 국민연금이 주주로서 기업에 개선을 요구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 ‘비공개 대화’가 전부라는 점이 받아들여진 것으로 알려졌다.
경영참여는 기업 임원 선임·해임·직무 정지부터 정관 변경, 회사 자본금 변경 등이다(자본시장법령 154조).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으로 국민연금이 국내 대부분의 주요 기업의 2대 주주로 올라 있는 만큼 경영진을 해임까지 적극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힘’이 생긴 셈이다.
예를 들어 대한항공 총수일가 갑질 사건에서 국민연금은 지난 6월 의혹의 사실관계, 해결방안 등의 입장을 묻는 공개서한을 보내는 데 그쳤지만,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으로 필요한 경우 임원 선임·해임 주주제안까지 적극적으로 요구할 수 있게 된다.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는 경영참여에 대해 ‘기금운용위원회가 의결한 경우 제한적으로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기금위 위원장)은 30일 “원칙적으로 경영참여를 배제하지만, 아주 특별한 경우에 주주 가치가 심각하게 훼손돼 사회적 여론이 형성된다면 위원회 의결을 거쳐 제한적으로 경영참여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재계에선 이 부분을 문제 삼는다. 한 기업 IR 담당자는 “경영참여 자체보다는 기준이 상당히 모호하다는 게 문제”라며 “주주가치 훼손, 사회적 여론 형성 등을 어떻게 판단하느냐는 구체적으로 정해지지 않았다. 해석하기 나름이다. 원칙적으로 배제한다고 했지만 달리 보면 결국 언제든, 합법적으로 국민연금이 경영참여를 할 수 있다는 얘기와 같다. 별도의 장치나 대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박 장관은 “주관적 판단일 수밖에 없다”면서도 “(경영참여 결정 전) 기금운용위원회 전체의 심도 있는 토론을 거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재계에선 기금운용위 구성도 지적한다. 한 재계 관계자는 “총 20명의 위원 가운데 기금위원장을 맡는 보건복지부 장관과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등 정부 관련 인사가 6명, 근로자 측과 시민단체 추천 대표 등을 포함하면 절반이 넘는다”라며 “국민연금이 기업에 큰 영향력을 가진 만큼 불만도 크다. 위원회에 장·차관이 참여하는 만큼 정부 입김이 과도하게 세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 “국민연금은 ‘해결사’ 아닌 집사”
민간 위탁운용사에 의결권을 위임하는 방안도 논란이다. 국민연금은 과도한 영향력에 대한 우려를 씻기 위해 향후 법령을 정비해 위탁운용사에 의결권 행사를 위임하기로 했다. 문제는 위탁운용사에 가산점을 주고, 반대로 의결권 행사가 국민연금의 수익 제고 등에 반할 경우 의결권을 회수한다는 조항이다.
한 전직 금융투자사 관계자는 “국내 자산운용사 대부분이 대기업 계열사다. 국민연금 의결권을 위탁하면 ‘주주가치 강화’라는 취지로 도입된 스튜어드십 코드 실효성에 의문이 생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반대로 앞서의 재계 관계자는 “가산점과 의결권 회수 등의 조항으로 위탁운용사들이 결국 국민연금의 뜻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일단 국민연금은 기금 자산 가치를 훼손할 우려가 있는 기업에 대한 기업명 공개, 공개서한 발송, 의결권 행사 사전 공시 등 앞서의 자본시장법상 ‘경영참여’에 해당하지 않는 주주권부터 행사하기로 했다. 경영참여는 제반 여건이 구비된 후 이행방안을 마련해 시행할 계획이다. 앞서와 같은 기업경영 간섭 우려와 경영참여 주주권 행사시 지분변동 수시공시, 단기매매차익을 반환할 의무가 생기는 점 등을 고려했다.
서울의 한 행정대학원 교수는 “국민연금 스튜어드십 코드는 주주가치 강화뿐만 아니라 국내 증시 특유의 저평가 요인을 완화해 투자자를 끌어 모으는 데에도 기여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지금보다 시장에 자금이 돌고 성장 동력이 확보되면 기업 입장에서도 무조건 반대할 이유는 없다. 국민연금은 기업 잡고 통제하는 해결사가 아니라 국민 노후자금을 투명하게 관리해야할 집사”라면서도 “다만 국민연금 영향력이 확대되는 만큼 기금운용위원회 전문성과 독립성은 더욱 강화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문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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