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여름에는 탐식도 잠잔다. 냉동실에서 옥수수를 꺼냈다. 택배로 받자마자 찜통에 쪄서 지퍼백에 넣어 얼려둔 옥수수다. 종류는 두 가지. ‘미백2호’라고 하는 흰 찰옥수수와 ‘고당옥'이라고 하는 노란 단옥수수다. 자박하게 물을 깔고 전자레인지에 몇 분 돌려 데웠다. 거의 완벽하게 부활했다.
옥수수도 종류가 여럿이다. 찰옥수수는 단맛이 여리다. 대신 고소한 감칠맛이 툭툭 튀어나오는 밤톨 같은 옥수수다. 밥 짓듯이 제대로 익혀야 보들거리고 맛있다. 설익으면 설익은 밥처럼 분이 깔깔하다. 충분히 더 익히시라. 쫄깃하게 잘 익혀 먹어야 제 맛이다.
껍질이 얇은 것이 좋다지만, 다른 옥수수에 비해선 여전히 단단한 편이라 알알이 쏙쏙 빠진다. 치아로 갉아 먹는 재미까지 좋다. 손을 닦아가며 먹지 않아도 될 정도로 겉에 수분이 맺히지 않아 먹기도 깔끔하다. 알고 보면 한국과 북한, 일본과 중국 정도에서만 먹는 희귀한 옥수수다.
단옥수수는 미국 통조림 옥수수 그 자체다. 한국과 품종은 다르지만 계열은 같다. 익힌 후 말라버리면 볼품없이 쪼그라들기 때문에 옥수수 통조림 안에 물이 차 있는 것이다. 들큰한 듯 달달한 맛에 먹는데, 질감이 부드러운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껍질이 얇고 속도 익히면 죽처럼 퍼진다. 단옥수수 중엔 몇 해 전부터 등장한 초당옥수수라는 것도 있다. ‘超(초)’ 달다는 이름이다.
이 옥수수는 어지간한 과일보다 당도가 높게 나온다. 단옥수수의 돌연변이 종인데, 다른 옥수수들처럼 당을 전분으로 잘 바꾸지 못하는 터라 평범한 단옥수수가 되지 못하고 속에 설탕물같이 단 물을 채운 특별한 옥수수가 된다. 아삭아삭한 질감과 높은 당도가 대중의 입맛을 사로잡아 몇 해째 여름마다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제주도에서 주로 난다.
초당옥수수는 치아 끝만 닿아도 물풍선이 터지는 것처럼 옥수수 알 속 수분이 터져 나온다. 생으로 먹어도 맛이 좋아 차가운 요리 여기저기 사용해도 좋다.
‘힙스터’ 문물인 초당옥수수가 제아무리 인기라도 찰옥수수의 오랜 팬덤을 넘보지는 못할 일이다. 또 중간에 낀 단옥수수 역시 지지층이 확고하다. 하여 어느 옥수수가 가장 맛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고루 존재기반이 갖춰져 있는 제각각 옥수수들이라 영원히 이 힘의 균형이 이뤄져 매년 여름 세 가지 옥수수를 그날그날 기분 따라 골라 먹을 수 있길 바랄 뿐이다.
그러나 오해만은 바로잡아야겠다. 얼마 전 전문가들을 탐문해 옥수수의 비밀을 하나 캤는데, 전적으로 신선도가 맛에 관여한다는 점이다. 과일에 가까운 특성을 지닌 초당옥수수는 특히나 상미기한이 짧아 반나절 만에도 푹 쉬어 버리고, 단옥수수나 찰옥수수는 그보다야 덜하지만 각각의 상미기한이 지나면 전분화가 진행되어 퍽퍽한 ‘무맛’이 된다나.
특히 찰옥수수는 단맛이 워낙 옅다 보니 예전부터 설탕과 소금, 혹은 숫제 사카린으로 맛을 보태 먹는 옥수수인데 그 모두가 신선도를 잃었던 탓이다. 옥수수는 줄기에서 떨어지는 즉시 노화 작용을 시작해 맛이 달아나는데, 특히나 당이 적은 찰옥수수는 그 단맛이 채 한나절도 지속되지 않아 ‘가당을 해야만 먹을 만하다’는 누명을 쓴 것이다.
슈퍼마켓에서 흔히 박스째 쌓아 놓고 껍질도 홀랑 까서 헐값에 팔곤 하는 여름철 옥수수 풍경이 새삼 딱해졌던 일이다. 그것이 옥수수를 가장 맛없어지도록 하는 지름길인 것을 모른 채 맛없다고 손가락질을 했다.
경북 고령, 가야산 자락에서 옥수수 농사짓는 분께 옥수수를 얻어먹었다. 농업회사법인 대가야의 김영화 대표는 옥수수 전문인답게 배송에도 묘수를 두었는데, 일반적으로 따는 것보다 옥수수 대를 좀 더 남겨 꺾어 길쭉하게 따고 밤에 배송을 출발시키는 것이다. 수분을 지키고 온도를 유지해주는 껍질도 더 많이 남고, 옥수수 대가 꽃병 역할을 해 싱싱함이 지속된다.
그나마 덜 더운 시간대에 ‘보호막’에 싸여 온 찰옥수수는 그동안 먹었던 찰옥수수들보다 확연히 맛이 좋았다. 아무것도 넣지 않고 단지 쪘을 뿐이다. 맹맹한 맛에 먹는다고 믿었던 찰옥수수가 이렇게 생생한 맛을 갖고 있었나, 나 또한 놀랐다. 찹쌀떡 같이 촉촉하게 쫀득거리면서 입 안에는 생밤의 고소하고 달콤한 여운을 잔뜩 남겼다.
대신 평소보다 많은 양의 옥수수 껍질 쓰레기와 반 뼘쯤 되는 옥수수 대가 쓰레기봉투 하나를 꽉 채웠지만 이만하면 충분히 감수할 만한 번거로움이다. 유통 현장에선 운송비용이 늘어 꺼리겠지만, 소비자들도 이만한 맛의 차이를 체감해본다면 살짝 더 비싸더라도 더 맛 좋은 옥수수를 선택하지 않을까? 적어도 우리 같은 먹보라면.
필자 이해림은? 패션 잡지 피처 에디터로 오래 일하다 탐식 적성을 살려 전업했다. 2015년부터 전업 푸드 라이터로 ‘한국일보’ 등 각종 매체에 글을 싣고 있다. 몇 권의 책을 준비 중이며, ‘수요미식회’ 자문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페이스북 페이지에서도 먹는 이야기를 두런두런 하고 있으며, 크고 작은 음식 관련 행사, 콘텐츠 기획과 강연도 부지런히 하고 있다. 퇴근 후에는 먹으면서 먹는 얘기하는 먹보들과의 술자리를 즐긴다.
이해림 푸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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