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아침 6시, 모닝콜이 울렸다. 소리가 어찌나 큰지 같은 층에 있는 모두가 깼다. 중저음과 고음이 뒤섞인 하모니. 찌푸린 얼굴로 몸을 일으키던 사람들 눈에 웃음이 번졌다. 알베르게 자원봉사자가 기차놀이하듯 일렬로 줄지어 다니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인간 모닝콜이었다.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 명물이다.
“새벽이 밝았습니다. 모두들 일어나세요.”
모닝콜 순례가 끝나자 자원봉사자가 큰소리로 외쳤다. 순례자들은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이미 깨끗하게 비워진 자리도 있었고, 다시 도로 베개에 얼굴을 묻는 사람도 있었다. 더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간신히 정신을 붙들었다. 오늘 목표는 라라소냐(Larrasona)였다. 28.5km 거리. 이 길을 소화해내려면 일찍 출발해야 했다.
“하느님 아버지….”
수도원 너머로 동이 트고 있었다. 말 못할 경건함이 느껴졌다. 새벽 공기를 한숨 크게 들이켰다. 한 무리 한국 사람들이 둥글게 손을 맞잡고 기도하고 있었다. 종교는 없지만 나도 모르게 마음 속 큰 존재에게 기도했다. ‘무사히 이 길을 걷게 해주세요.’
마을을 나오니 자동차 표지판이 보였다. ‘SANTIAGO DE COMPOSTELLA 790KM(산티아고까지 790km 남음)’. 몇몇 순례자는 그 표지판에 붙어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 옆 나무 울타리 안에서 양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어제 얻은 새끼발톱 멍에서 통증이 올라온다는 것 빼곤.
# 등산화 깔창에서 인생을 깨닫다
흙길과 숲길이 나와 마음이 산뜻했다. 한 발 한 발 차근차근 내디뎠다. 아무도 없는 길을 혼자 걷는 기분을 만끽하고 있는 찰나. 뒤에서 누군가 발소리를 냈다. 앳되고 늘씬한, 얼굴이 주먹만 하고 잘생긴 서양인이 날 추월하려고 했다. 나도 괜스레 슬쩍 속도를 냈다. 마치 왕복 이 차선 시골길에 나타난 스포츠카를 그냥 보내줄 수 없는 티코의 마음이랄까.
스포츠카가 높아진 내 속도보다 더 빨라지려 할 때 인사를 건넸다. 그의 이름은 마크. 미국에서 온 청년이었다. 한국 나이로 스물여섯이니까 나보다 한 살 어렸다. 그도 오늘 라라소냐까지 간다고 했다. 모험심이 강한, 나와 비슷한 과였다. 대부분 순례자는 이튿날 코스로 라라소냐 전 마을인 주비리를 택한다.
“고민이 뭐야? 지금 네 인생에서 가장 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좀 친해졌다 싶을 때 물었다. 재미없고 따분한 질문이었지만 카미노에선 시간이 많았다. 이곳에선 ‘지루한 주제’가 흥미로운 주제가 되기도 했다. 마크 첫 대답은 간결했다.
“공부랑 돈.”
순간 공감대가 생겼다. ‘고민? 그게 뭐야?’라는 반응을 보였던 핀란드 커플에게서 느꼈던 박탈감을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약학대학원에 다니고 있는데 공부 스트레스가 장난 아니야. 사실 이렇게 여행 나오지도 못하는 건데 교수한테 말했어. 나 좀 나갔다 오겠다고. 힘들어서 도저히 못하겠다고. 그리고 너도 알겠지만, 미국 대학교 등록금이 장난 아니잖아? 파트타임을 하면서 돈을 벌긴 하는데, 그걸로 부족하니까 부모님께 손 벌리기도 하고 그래, 너는?”
내 고민과 다르지 않았다. 아니, 같았다. 다른 나라에 사는 나와 다른 청년이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에 묘한 안도를 느꼈다. 마크는 약사라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부럽기도 했다. 우리는 죽이 잘 맞았다. 그와의 시답지 않은 이야기 속에서 평소 날 괴롭히던 걱정을 조금씩 덜어낼 수 있었다.
“다른 고민은 없어?”
“사실 아직 못 잊는 사람이 있어. 전 여자친구…. 2년 전에 만났다가 그 친구가 대학을 서부로 가는 바람에 서로 거리가 너무 멀어서 헤어졌는데, 아직 문득문득 생각나. 물론 그사이에 다른 사람을 만나보려고도 했는데, 그거 알아? 새로운 사람을 전 여자친구만큼 사랑할 수 없을 거 같은 거.”
“내가 요즘 하는 고민이랑 비슷하네. 나도 여전히 마음에서 안 잊히는 사람이 있는데….”
연애 이야기가 흥미진진한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같은 모양이다.
“마크, 너 어떤 여자가 좋아?”
“어…. 음…. 일단 너무 까탈스럽지 않으면 좋겠고, 어떤 영적으로 좀 뭐랄까, 정신적으로 성숙했으면 좋겠어. 무슨 말인지 알아?”
“마치 카미노를 걸을 법한 여자?”
“맞아! 딱 그거야.”
마크는 잘 쉬지 않았고, 쉬어도 조금만 쉬고 곧장 걸었다. 신체 운동능력이 뛰어난 것도 있었지만 마크 등에는 아주 간소한 가방이 매달려있었다. 다시 고쳐 맬 때면 ‘읏차’ 소리가 절로 나는 가방을 ‘지고 있는’ 내가 애처로워 보일 정도였다.
유독 오르막과 내리막이 많았다. 허벅지가 터질 것 같았다. 스페인어에 능통한 마크는 “말 카미노!”를 연신 외쳐댔다. 말(mal)은 스페인어로 ‘나쁜’이라는 뜻이란다. ‘빌어먹을 길’이라는 투정이었다. 그 밖에도 마크는 함께 걸으며 내게 많은 스페인 욕을 알려줬지만 구태여 밝히진 않기로 한다.
20km쯤 걸었을까. 간단한 요기를 할 겸 ‘대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휴식을 오래 취할 것 같을 때 순례자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있다. 신발을 벗는 것이다. 양말도 벗는다. 새끼발톱에 쌀 반 톨만 했던 멍이 불린 듯 커져 있었다. 아팠다.
다시 출발하자는 마크가 애석했다. 꾹 참고 양말을 신고 등산화에 발을 꾹꾹 눌러 담았다. 끈을 질끈 동여매고 뇌에 신호를 보냈다. ‘발을 내디뎌.’ 다행히 걸음이 앞으로 나아갔지만 뇌로 전해지는 통증을 차단하진 못했다. 뇌는 두 가지 명령을 동시에 내렸다. ‘멈춰’와 ‘마크를 따라가.’ 결국 우유부단한 뇌 대신 발이 결단을 내렸다.
떠나가는 마크를 보내고 멈추기로 했다. 걷는 동안 마크와는 그게 마지막이었다. 후에 종착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다시 만난 마크는 “난 널 라라소냐에서 기다렸어. 당연히 쫓아 올 줄 알았지”라고 말했다.
길목에 털썩 앉았다. 지나가는 누구 하나 “저리 비켜”라고 신경질 내지 않았다. 대신 괜찮으냐고 물었다. 괜찮지 않았지만 괜찮다며 웃었다. “무아 무슨 일이야?” 벤자민과 소피아였다. ‘무아’는 내 영어 이름이었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왈칵 날 뻔했다. 사정을 설명하니 벤자민이 하는 말. “그럼 깔창을 빼봐. 나도 신발이 꽉 조여서 뺐더니 한결 낫더라.”
정말 한결 나았다. 물론 이미 생긴 멍이 없어질 리 없었다. 신발에 발톱이 닿을 때마다 아팠지만 덜했다. 깔창을 빼내면서 나 자신이 바보 같았다. 꼭 내 인생 축소판 같았다.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지 않고 감내했다. ‘이거밖에 안 돼?’라며 내 나약함을 나무랐다. 급박한 마음에 차분히 생각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이 만들어 둔 ‘나의 모습’에 끼워 맞추다 보니 여유가 없었다. 남들이 날 더러 “잘 걸을 것 같다”고 말했으니 난 잘 걷는 사람이어야 했다. “라라소냐까지 충분히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했기 때문에 오늘 내 목표는 그곳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마음이 급했다. 통증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하루 쉬고 발톱 멍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뒤처지는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난 나 자신에 소홀했다. 마치 여태까지 ‘내가 하고 싶은 것’과 ‘주변에서 내게 원하는 것’ 사이를 오가며 ‘넌 네가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냐’고 자책했던 것처럼.
# 일본인 백발노인과 걷다가 눈물이
절뚝이며, 걷다 쉬고를 반복했다. 저 멀리 백발 동양인 남자가 아주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이름은 와타루. 일본인이었다. 나이가 육십이 넘었다고 했다. 걷는 속도가 나와 딱 들어맞았다. 그는 혼자 왔다고 했다.
“어떻게 혼자 오셨어요?”
“이제 은퇴를 하고 나니까 뭘 해야 좋을지, 사는 게 뭔가 싶어서 왔어요.”
잘나가는 회계사였다고 했다. 딸들은 다 커서 시집을 갔다고. 출장으로 해외를 다닌 게 전부라며 카미노는 인생의 큰 도전이라고 했다.
“당신은 어찌 왔는고?”
“뭘 해야 좋을지 몰라서요. 머리가 복잡해서 생각을 비우려고 왔어요.”
“나이가?”
“만으로 스물여섯이요.”
와타루 아저씨는 얼굴에 옅은 미소를 새겼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당신 나이 때 만화가가 되고 싶었어. ‘내 그림이 뭐가 되겠어?’라는 생각에 그냥 취업했지요. 그때는 만화가가 알아주지도 않는 직업이었어. 돈 벌고 나니 여행을 떠나고 싶더라고. ‘애가 생기기 전에 돈 좀 더 벌고 가자’면서 미뤘지. 아이가 생기고, 내 일이 바빠지니까 내 삶이 없어지더라고.”
그는 더듬더듬 느렸지만 머릿속에서 신중하게 영어 단어를 골랐다.
“젊을 때 항상 ‘늦었다’는 생각에 포기가 빨랐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후회되지. 바보 같았어. 젊음은 황금과 같은 거예요. 정말로. 물론 지금은 막막하고 불안하겠지요. 나도 그랬으니까. 근데 정말 하고 싶은 거 하세요. 돈은, 돈은 그리 중요하지 않더라고요.”
와타루 아저씨는 자신의 영어에 답답함을 느끼는 듯했다. 내게 전해주고 싶은 메시지가 잘 전달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내가 말해주고 싶은 건 딱 하나”라며 세 마디를 내뱉었다. “포기하지 말아요. 절대로. 포기하지 마요 (Never give up, Never give up, Never give up). 하고 싶은 걸 하지 않으면 후회할 거예요.”
눈물이 나려고 했다. 그는 가르치려 들기보다는 자신의 인생을 차근차근 풀어냈다. 눈물을 도로 집어넣으려 고개를 들었다. 강렬한 햇빛이 얼굴을 비췄다. 카미노는 해를 등지고 동에서 서로 걷는 길이다. 해가 내 앞에 위치하면 쉬라는 뜻과 같다.
오후 2시쯤 목적지 전 마을인 주비리에 도착했다. 여기서 묵기로 했다. 마을 입구에서 가장 처음 보이는 알베르게에 들어갔다. 반가운 얼굴들이 있었다. 영하 형님과 큰형님 그리고 벤자민과 소피아. 라라소냐까지 가겠다던 객기를 접었다고 말하니 방긋 웃으며 축하해줬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짐 버리기였다. 16kg이었던 가방을 12kg까지 줄였다. 두 번째로 한 일은 샌들 사기. 도저히 등산화를 신고 걸을 순 없었다. 고생한 발을 주비리 입구에 흐르는 강물에 담갔다. 마치 대장장이가 불에 달군 쇠붙이를 찬물에 담그는 기분이었다.
저녁. 같은 방 사람들과 밥을 지어 먹고 와인을 한잔했다. 침대에 누우니 세상 마음이 편했다. 계획대로 되는 건 없다.
[아! 산티아고 Tip] 산티아고 순례 길을 가고자 마음먹은 사람이라면 가장 큰 고민 중 하나가 신발이다. 한 달간 내 생사를 결정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신발, 어떤 걸 골라야 할까?
사실 어떤 신발을 신고 와도 좋다. 가장 중요한 건 사이즈다. 자기가 평소 신는 사이즈보다 한 치수 혹은 두 치수 큰 신발을 골라야 한다. 절대로 ‘핏’을 보고 사는 우를 범하지 말길 바란다. 너무 크다 싶으면 깔창을 더 많이 깔면 그만이다. 산티아고 순례 길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자주 나타난다. 특히 내리막에서 꽉 끼는 신발을 신으면 물집과 멍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추천하는 건 발목까지 올라오지 않는 가벼운 트레킹화다. 경험상 대부분 한국인은 발목까지 잡아주는 등산화를 신는다. ‘비추’다. 순례 길에서 만나는 산은 한국의 산처럼 경사가 심하지도, 암벽이 많지도 않아 ‘전문 등산화’가 필요하지 않다. 등산화는 무겁기 때문에 발의 피로를 높인다. 가끔 물집 하나 없이 완주하는 사람이 있는데, 열의 아홉은 가벼운 트레킹화를 신었다.
박현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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