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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산티아고 3] '부엔 카미노!' 피레네산맥을 넘다

터질 듯한 다리, 결국 발톱에 멍…잡생각 싹 사라지고 '뭐부터 버리지?'

2018.07.22(Sun) 15:48:58

[비즈한국] ‘쉿! 깨겠어’ 소곤거리는 소리에 깼다. 누군가 함께 자고 있었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손을 더듬어 휴대폰 시계를 봤다. 새벽 다섯 시. 몇몇 순례자가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으쌰’ 가방을 둘러매는 소리, ‘끼익’ 문 여닫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방 안이 고요해졌다. 

 

화들짝 깼다. 다시 잠들었던 모양이다. 한 시간이 지난 여섯 시였다. 방안을 둘러보니 날 제외한 세 명은 떠났고 두 명은 자고 있었다. 순례자 사무실 자원봉사자가 해준 ‘순례자가 많아지고 있으니 일찍 출발하라’ 귀띔이 떠올랐다. 늦으면 다음 알베르게(순례자 숙소)에 자리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퍼뜩 짐을 챙겼다.

 

생장에서 맞은 첫 아침. 사진=박현광 기자

 

어둑한 복도를 따라 걷다 보니 주방 나무 문틈 사이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분주한 소리도 들렸다. 주방 문을 열었더니 천국의 문이 열리듯 빛이 쏟아졌다. 눈이 부셨다. 눈을 비비고 있는 내게 주인 할머니가 다가왔다. 

 

커피? 카페오레? 우유는?”​

 

정신이 없어 일단 모든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시리얼 먹는 그릇에 커피를 가득 담아 건넸다. 흠칫 놀라며 할머니를 쳐다봤다. 그는 무심하게도 ‘​빵, 저기 있으니까 가서 먹어’​라는 듯 식탁을 가리켰다. 프랑스에서 시골 인심을 맛볼 줄이야. 헤헤. 웃어 보이고는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이미 식탁은 순례자들로 북적거렸다.

 

“잠은 잘 잤어?”

 

어제저녁 함께 성곽을 올랐던 영하 형님이었다. 큰형님도 옆에 있었다. 벌써 요기를 끝낸 것처럼 보였다. 순례자의 아침은 일찍 시작됐다. 두 형님은 “앞에서 보자”는 말을 남기고 나갔다. 같이 걷자는 말인가?

 

멈칫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외국에서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쉽게 뭉친다. 깊은 유대감을 느낄 수 있어 좋지만 여행할 때만큼은 피해왔다. 같이 다니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내 여행’이 아니라 ‘우리 여행’이 된다. 한국인과 다니면 ‘한국 룰’ 지켜야 한다. 다른 말로 ‘예의’라고 하는데 해외 여행지에서만큼은 벗어던지고 싶은 무언가다. 카미노에 온 마당에 안 될 건 없었다. 이것저것 재지 않기로 했다. 

 

프랑스 길의 시작점 야고보의 문. 199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사진=박현광 기자

 

진행 방향과 거꾸로 걸어 야고보의 문으로 갔다. 생장 마을 끝에 있는 야고보의 문은 ‘프랑스 길’의 시작점이다. 길 처음부터 끝을 고스란히 걷고 싶은 마음이었다. 순례자 70%가 프랑스 길을 선택한다. 북적거리는 게 싫을 수 있지만 생각보다 혼자 걸을 일이 많다. 순례자를 위한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진 길이다. 홧김에 산티아고를 온 사람에게 딱 맞다. 별다른 준비 없이도 800km를 걷는 데 문제없다. 

 

# 일상의 아름다움이 다가왔다

 

다들 이런 거 하더라? 너도 해봐.”​

 

출발지점에서 영하 형님이 카메라를 아래로 발 사진을 찍었다. 서른아홉, 일만 하다가 첫 유럽 여행이라고 했다. 어제부터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걱정을 시종하던 형님이 설레는 모습을 보니까 웃음이 샜다. 큰형님도 카메라 셔터를 쉬지 않고 이리저리 찍어댔다. 다들 평소 잊고 있던 얼굴 근육을 쓰고 있었다. 새로운 시작은 누구나 설레게 만든다.

 

욕심을 냈다. 하루 30~40km씩 걸어 27일 만에 끝내는 것을 목표로 잡았다. 혹사해야 잡생각이 달아날 것 같았다. 이 정도쯤이야. 좀 더 속도가 나면 25일에도 끝낼 수 있을 거 같았다. 습관적으로 ‘남들보다 더 멀리 더 빨리’를 속으로 외치고 있었나 보다. 물론 이 호기는 얼마 안 가 보기 좋게 박살났지만.


직장을 관두고 처음 나온 유럽에서의 생존을 걱정하던 영하 형님. 사진=박현광 기자

 

함께 시작했지만 두 형님은 빠른 걸음으로 앞서갔다. 혼자 걷다 보면 잡생각이 찾아올 법도 했지만 그럴 겨를이 없었다. 계속 떠오른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이 가방을 메고 완주할 수 있을까?’ 16kg 배낭이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이마저도 생장에서 3kg를 덜어낸 무게였다. 본격적으로 피레네산맥 초입에 들어서 오르막길이 나타나자 더 그랬다. 아무래도 짐을 더 버렸어야 했나 보다.

 

무릎에 미리 미안한 마음이었다. 조심스레 걷는 속도를 높이려는데 뒤에서 빛 한줄기가 뺨을 스쳤다.

 

“와, 해 뜨는 거 봐.”​

 

일출이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었지만 혼잣말이 튀어나올 만큼 아름다웠다. 뒤로 걸으며 떠오르는 해를 한참 바라봤다. ‘해가 저렇게 아름다웠던가?’ 내가 다른 은하계에 온 것이 아니라면 저 해는 내가 평생 보고 살아온 그 해가 맞다. 

 

새벽, 피레네산맥을 오르다보면 아래로 물안개가 펼쳐진다. 사진=박현광 기자

 

해를 보는 여유마저 잊고 지냈다. 1년에 한 번 새해 첫날에? 그마저도 안 간 지 오래다. 해는 매일 뜨지만 우리는 그것이 떠 있을 때는 오후에만 보기에 강하고 피해야 할 존재로 인식한다. 여행을 나오면 어떤 인공물보다 우연히 발견하는 자연이 아름답다는 걸 새삼 느낀다. 몸을 돌려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살랑였다. 나뭇잎 사이사이로 볕이 흘렀다. 전에 보지 못했던 일상의 아름다움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다가간 것일지도.

 

길 한가운데 달팽이가 지나고 있었다. ‘천천히 가’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래 급하지 말자. 내 주위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말자. 여유, 그것은 카미노가 내게 준 첫 선물이었다. ​

 

카미노의 수호신 달팽이. 너무 많아 가끔 밟히기도 한다. 사진=박현광 기자

 

# 괜찮다. 조금 늦어도 

 

“오는 길에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가 혼자 걷더라. 엄청 천천히. 저분은 왜 걸을까? 할머니 뒤를 따라 걸으면서 생각해 봤는데 잘 모르겠더라고.”

 

어느새 함께 걷던 영하 형님이 말이다. 내가 영하 형님 나이쯤 되면 적어도 ‘장래’ 고민은 하지 않지 않을까? 다니던 직장을 관두고 나왔다는 영하 형님을 보면서 ‘왜 걸을까’ 내심 궁금했다. 내가 영하 형님에게 가졌던 생각을, 영하 형님이 다른 사람을 보고 했다는 게 생경했다. 

 

카미노에선 혼자 온 백발 순례자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사진=박현광 기자

 

카미노를 오고 처음 눈에 들어온 게 있다. 순례자 중 40~60대 중장년층이 20~30대보다 조금 많거나 비슷하다는 사실이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혼자 걷기도 한다. 왜 걷느냐고 물으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서”라고 마치 짠 것처럼 같은 답변을 내놓는다. 사실 카미노에서 왜 걷느냐는 말보다 더 어려운 질문은 없다. 뚜렷한 답을 자신도 모르거나 아주 복잡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똑같은 답변을 내놓는 걸지도 모르지만 위안이 됐다.

 

항상 뒤처진 기분이었다. 하고 싶은 걸 찾아 뜻있게 삶을 보내겠다고 시작한 방황이었지만 길어질수록 무기력해졌다. 취업해 삶의 방향을 찾아가는 것 같은 주위 친구들을 보면 ‘나는 뭘 하고 있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지금 고민에 든 품삯을 미래에 보상받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하찮게 느껴지곤 했다. 

 

소뿐만 아니라 말과 양떼를 보면 그림 속에 들어온 기분. 방목된 가축들 걸으며 인사하다보면 힘이 난다. 사진=박현광 기자

 

카미노에서 마주한 노인의 뒷모습은 “괜찮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도, 나이가 들어도 인생에서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 사라질 수 없는 고민이 있으니 너무 급할 것 없어”라고. 카미노에선 젊은 사람들은 빠르게 걸으려 했고, 나이 든 사람들은 느리게 걸으려 했다.

 

어느새 양옆으로 내려다보이는 피레네산맥이 장관이었다. 프랑스와 스페인을 오가는 군대가 다녔다는 길목답게 시야가 탁 트여 있었다. 바람이 강해 앞을 내딛기가 힘들었지만 등과 가방 사이에 맺힌 땀을 식혀줘 상쾌했다. 양치기가 양떼를 몰고 다녔고, 순례자는 하나둘 너른 들판에서 휴식을 취했다. 소와 말도 함께 들판에 걸렸다.

 

“비아코레 성모자상, 피레네를 무사히 넘을 수 있게 해주세요.” 시세 언덕에서 만난 성모자상, 종교와 상관없이 자연스레 기도를 하게 된다. 사진=박현광 기자

 

피레네산맥에 들어서면 정상까지 경사가 쉬지 않고 계속된다. 다리가 터질 것 같다. 가방까지 메고 있다면 숨이 목까지 차오른다. 첫날 가장 많은 사고가 나는 이유다. 카미노 관련 실화를 다룬 영화 ‘더 웨이’ 주인공 아들이 실종돼 사망한 것도 첫날이다. 

 

# 첫날부터 멍이라니

 

“부엔 카미노(좋은 길 되세요)!

 

순례자는 서로 힘을 준다. 포기하고 싶다가도 인사 한방이면 힘이 난다. 등 뒤에서 북유럽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렸다. 벤자민과 소피아는 핀란드에서 온 커플이었다. 그들은 유쾌했다. 벤자민은 서른, 소피아는 스물네 살. 생기가 남달랐다. 

 

부엔 카미노! 서로에게 인사를 건네다보면, 타인과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기분이다. 그래도 경사가 끊이지 않는 피레네산맥은 정말 힘들다. 사진=박현광 기자

 

둘은 전문가 자태를 뽐내며 빠른 걸음으로 나아갔다. 보기와는 다르게 트레킹이 처음이라는 말에 서로 웃음이 터졌다. 핀란드는 산이 없다고. 한동안 같이 걷다 보니 이런 저린 이야기가 오갔다. 공감대를 형성하고 싶어 회심의 질문을 날렸다. 

 

“요즘 가장 큰 걱정거리가 뭐야?”
“걱정? 음…. 어. 딱히 없는데?”
“어떻게 걱정이 없을 수 있지?” 
“아냐, 미래에 대한 걱정을 하긴 해. 심각한 건 아니지만.”

 

북유럽이 행복도가 높다는 말, 익히 들어 알았지만 직접 한가한(?​) 반응을 접하고 나니 괜한 소외감이 들었다. 부러움도 잠시, 둘의 속도에 맞춰 걷다 보니 발가락이 아팠다. ‘이러면 안 되는데.’ 덜컥 겁이나 둘을 먼저 보냈다. 첫날에 멍이라도 들면 큰일이다. 

 

힘들었다. 땀에 흠뻑 젖어 아무 생각이 안 났다.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랐지만 잡생각이 싹 사라졌다. 초기 목적 달성을 이렇게나 빨리 이룰 줄은 몰랐다. 내 머릿속에 가득한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도착하면 뭐부터 버리지?’

 

보인다 보여, 론세스바예스. 더 갈 계획이었지만 피레네산맥을 넘고 나니 그런 생각이 싹 가셨다. 사진=박현광 기자

 

어느새 걸어서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을 넘어섰다. 정신이 없어 그런 줄도 몰랐다. 오르막길은 내리막길로 변해있었다. 수풀 사이로 벽돌로 쌓아 올린 중세풍 건물이 보였다.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 생장에서 출발해 가장 먼저 있는 마을이다. 본래 계획은 이 마을을 지나 다음 마을에서 자는 거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묵고 가기로 했다.

 

론세스바예스는 예부터 악명의 피레네산맥을 넘은 군대나 순례자에게 휴식처가 되어 주던 마을이다. 피레네산맥을 넘고 만나는 마을은 정말 예뻐 보일 수밖에 없다. 규모가 아주 작아 마을엔 200명 수용이 가능한 공립 알베르게가 딱 하나 있다. 새로 지어져 시설이 좋다. 식당은 두 곳 있지만 작은 구멍가게조차 없기 때문에 생장에서 이동식을 넉넉하게 사오는 게 좋다. 

 

27km, 오늘 걸은 거리였다. 산맥을 넘었으니 피로는 그 이상이다. ‘악’ 소리가 났다. 씻으려고 양말을 벗는데 새끼발톱에 통증이 몰렸다. 멍이었다. 그리 심하진 않았지만 결국 걷기 시작하고 하루 만에 발톱에 멍이 들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 산티아고 Tip]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가장 좋은 시기는 9~10월. 선선한 날씨에 적당한 인원과 걸을 수 있다. 가장 사람이 많은 시기는 6월. 야고보 성인 축일인 7월 25일에 맞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하고자 하는 순례자가 몰리기 때문. 정보가 없어 망설여진다면 프랑스 길을 택하면 된다. 프랑스 길은 순례자에게 의식주 맞춤 서비스를 제공한다. 걷고자 하는 의지와 하루 30유로(약 4만 원) 예산을 잡으면 충분하다. 

 

생장에서 이동식을 넉넉히 챙겨서 출발하기 권장한다. 순례자 길을 걷는 중 피레네산맥을 넘는 첫날이 가장 난코스다. 힘을 많이 쏟기에 에너지 보충을 하면서 걸을 필요가 있지만 먹거리를 조달할 방법이 없다. 혹시 깜빡했는데 입에 단내가 난다면 순례자 중 아무것도 먹지 않는 사람도 있으니 잘 부탁해보길.

박현광 기자

mua123@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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