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10년 전인 2008년 7월 말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의 저서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국방부 금서로 지정됐다. 아이러니하게도 국방부 금서 지정이란 광고 효과로 발간 1년 만에 새로운 독자 유입으로 판매에 날개를 달았다.
‘불온 도서 지정 10년, 그 후…’라는 부제를 달고 특별판으로 재출간된 책을 기념해 장하준 교수가 한국을 방문했다. ‘불온도서’ 지정 당시는 이명박 정부가 FTA 추진 가속화, 금융 추가 개방 등 신자유주의를 확대하던 때였다. 자유무역을 반대하는 내용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당시 정부의 대외정책을 반대하는 이들에게 속 시원한 청량제 역할을 했다.
10년 뒤인 지금,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가 물러나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지 1년이 훨씬 지났다. 하지만 장 교수는 “아무것도 바뀐 게 없다”고 시니컬하게 말했다. “문재인 정부가 잘못한다는 게 아니라, 이전부터 그래왔고 그것이 구조화된 상황이기 때문에 정부가 바뀐다고 해서 큰 틀이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장하준 교수는 유럽에 살면서 한국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좌와 우의 중간자적 시각으로 균형 잡힌 조언을 한국사회에 해왔다. 10년 동안의 보수 정부에서는 그의 주장이 진보 진영에서 환대를 받았지만, 문재인 정부의 정책과는 비슷한 부분도 있고 엇갈리는 부분도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말은 각 언론의 입맛에 따라 다르게 편집된다. 그의 말을 끝까지 다 들어봐야 하는 이유다. ‘비즈한국’이 지난 17일 기자간담회 질의응답의 ‘풀텍스트’를 옮긴다.
Q. 최저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으로 중소기업, 소상공인 등 영세자본이 아우성이다. 그럼에도 아직 저임금 노동자는 일을 많이 해야만 겨우 먹고살 수 있는 정도다. 영세자본의 목소리는 엄살 아닌가? 본질은 뭐라고 보는가.
A. 노동자가 못 사는 원인은 재벌의 착취 때문이라기보다 우리 경제사회의 구조적 문제에서 기인한다. 복지가 잘 안 돼 있다 보니 실직하면 생계가 막막하다. 그래서 생계형 창업이 엄청나게 생긴 것이다. 치킨 소비량은 세계 10위인데, 치킨집 수는 세계 1위다. 자영업자 비율이 선진국은 12%인데, 한국은 25%다.
자영업자들은 자기착취를 하고, 생산성이 낮은 편의점, 치킨집 등에 몰려 있다. 다른 나라 같으면 자본가가 될 수 없는 사람, 그럴 능력이 없는 사람이 자본가를 하고 있다. 선진국을 보면 유통은 대기업이 장악하고 있고 영세상인은 잘 없다. 온 동네에 슈퍼마켓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동네 구석구석 슈퍼마켓이 있으려면 비생산성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생산성을 올리려면 구조적인 재조정이 필요하다. 복지 지출을 통해 자영업을 안 해도 기본 생활이 되는 구조로 나가야 한다. 대기업은 최저임금 이상을 줄 여력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 최저임금 인상을 강요하면 아우성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한국의 복지지출은 GDP의 10%로 OECD 국가 중 멕시코 다음으로 낮다. 미국도 19~20%대다. 이걸로는 사회통합에 부족하고, 영세상인을 유지해야 경제가 유지된다. 자본가 아닌 사람은 자본가를 하지 않아야 된다. 하루아침에 복지지출을 늘릴 순 없겠지만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다.
Q. 10일 전경련 특별대담 ‘기업과 혁신 생태계’에서 현 정부에 대해 ‘학점을 보류한다’고 했는데, 어떤 의미였나.
A. 문재인 정부 정책을 비판했다는 의미로 일부 언론이 쓰기도 했는데, 지금의 경제사회적 문제는 지난 20년 동안 신자유주의 틀이 유지되어 온 것 때문이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다. 정부에 따라 친재벌·반재벌이 있지만, 친재벌 정부도 금융시장을 규제했고, 반재벌 정부가 투기자본 쫓아내자고 한 적 없다.
외교부에서는 ‘FTA 강국’이라고 선전하고, 주주자본주의적 재벌정책도 그대로다. 지금 정부가 특별히 다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최저임금 인상 등의 정책에는 노력하는 부분이 보여 박수 치고 싶지만 신자유주의적 틀은 그대로 유지된다. 최저임금이 8000원대에서 9000원대로 오르거나 노동시간이 52시간에서 49시간으로 줄어도 대세는 전환되지 않는다. 그런 노력들 외에는 잘 보이지 않아 ‘학점 보류’라고 한 것이다. 지금 당장 판단을 못 하겠다는 뜻이다. 방향 전환을 해줬으면 하는데 지금 당장은 어려울 것이다.
Q. 미국·중국 무역전쟁에 한국은 낀 형국이다. 거시적 전망은 어떻다고 보나. 지금이 경기 고점이고 하락만 남았다는 설도 있다. 또 한국의 경제는 어떻게 전망하나.
A. 미·중 무역전쟁은 수량적으로 엄청난 일은 아니다. 미국이 2500억 달러 관세를 부과한 것이 커 보이지만 중국의 수출량은 그것의 100배가 조금 안 되는 2.27조 달러다. 그것의 10%에 관세를 매기면 관세액은 10분의 1밖에 안 된다. 세계 GDP의 0.03% 수준이다. 수량적으로 세계 무역 교란은 아니다.
상징적인 의미는 있다. 미국은 자유무역을 하다가 자기네가 불리해지니 보호무역을 하겠다고 나오는데, 사실은 국제 문제가 아니라 미국 국내 문제다. 유럽에 비해 복지수준이 낮고 고용안정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나 수입품이 밀려와 어떤 산업이 기울어지면 사람이 바로 타격을 받는다. 미국은 노조가 없어 저항도 못 하고, 실직하더라도 유럽처럼 재교육도 없고 재취업도 못 한다.
미국의 무역의존도는 15%로 미국만큼 무역 안 하는 나라도 없다. 네덜란드는 60%대다. 유럽처럼 실직으로 생계가 심각한 타격을 받지 않도록 재취업과 복지가 잘 되어 있으면 무역의존도가 커도 저항감이 작다. 부자한테 세금 더 걷어서 복지 확충하면 되는데, 트럼프는 그걸 미국 내에서 해결하기 싫으니 중국에 퍼붓고 다른 나라에 떠넘기는 것이다.
트럼프가 무역규제 담론으로 가고 있는데, 장기적으로 자국 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이런 식으로 미국이 살아날 수 없다. 무역전쟁이 시끄럽지만 영향은 생각보다 훨씬 적을 것이다.
경기 고점 논란은, 현재 경기가 억지로 돈을 퍼부어 회복시킨 것이다. 고점은 미국, 유럽의 중앙은행이 결정하는 것이다. 고점이라 생각되면 금리를 높여 긴축을 할 것이고, 고점이 아니라 생각되면 계속 지금처럼 유지할 것이다. 저점·고점 논의 자체가 문제를 잘못 짚고 있는 것이다.
경기흐름은 또 한 번 문제가 될 것이다. 미국, 영국의 주식시장에 거품이 끼고 개발도상국의 이자가 싸니까 일단 빌려서 돈을 쟁여놓고 있다. 개도국에 수출경쟁력이 생긴 것도 아닌 상황에서 미국 중앙은행이 금리를 몇 번 올리면 급격히 위축될 수 있다. 아르헨티나가 구제금융을 신청했고 브라질도 위기다. 이런 흐름으로 가면 세계 경제가 다시 위험해질 수 있다. 지금 위험 요소가 많은 상황이다.
한국 경제는 큰 위기다. 10년 전 한국 조선업이 중국에 세계 1위를 내줬을 때,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세계 1위를 뺏은 것과 비슷하다. 자동차, 전자 등 우리가 다 밀어낸 건데, 가만히 있으면 유지될 거라 생각하나. 반도체 말고는 이미 다 중국으로 넘어가고 있다. 반도체 또한 중국이 어마어마하게 추격하고 있다. 반도체는 1위지만, 반도체 설비는 다 외국 것이다.
Q. 그간의 한국 산업정책은 ‘위너 피킹(winner picking)’이라는 대기업 중심의 선별적 산업 육성이었다. 이게 문제 아닌가.
A. 위너 피킹은 정부만 하는 게 아니다. 기업은 매일 한다. 기업이 하던 것만 계속 했으면 삼성은 아직 청과물상이어야 하고 현대는 아직 건설업체다. 삼성의 첫 주력품이 제당·제분·섬유였는데, 그거 계속했으면 전자 못 했다. ‘위너 피킹’은 틀린 게 아니다.
많은 기업이 저부가·저생산성 산업에서 2~3회 위너피킹 해야 국제적인 대기업이 됐다. 그걸 정부가 하는 건 틀린 게 아니다. 1990년대에 삼성 카메라를 세 대 샀는데, 6개월 만에 다 고장났다. 그러나 캐논, 니콘 등이 수입 금지된 사이 삼성이 기술력을 키워 지금의 삼성 카메라가 나온 것이다. 그런 게 필요하다.
외국도 마찬가지로 위너 피킹으로 성장했다. 실리콘밸리 기술은 미 국방연구에서 시작됐다. 그걸 왜 우리가 하면 안 되나. 이를테면, 자율주행차에서 ‘삼성·LG’ 합작품을 왜 만들지 못하나. 우리나라에는 반도체 이후에 새로 나온 산업이 하나도 없다. 대기업들은 투기자본의 요구로 배당을 높이면서 ‘현금자동인출기’로 변하고 있다. 연구개발에 투입할 여력이 줄고 있다. 이걸 바꾸지 않으면 남은 산업 다 없어진다.
산업 개발에도 사회안전망 만드는 게 매우 중요하다. 사회안전망이 없으면 노동자들이 기술개발에 저항한다. 스웨덴에서는 실직 후 2년간 과거 연봉의 70%를 주고 재교육, 재취업을 시킨다. 스웨덴은 노동자 1인당 로봇이 가장 많은 나라다. 자동화에 저항하지 않는다.
내가 사회적 대타협을 15년 동안 얘기했는데, 그렇게 해서 구조를 완전히 바꾸지 않으면 상황이 더 악화되고 서로 착취할 뿐이다. 재벌 지배구조 인정하자는 얘기도 많이 했는데, 이는 스웨덴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발렌베리가는 5대째 이어오는 재벌로, 발렌베리가가 지배적 위치에 있는(20% 이상 지분을 소유한) 기업의 상장 총액은 스웨덴 전체 기업 상장총액의 절반에 달한다. 우리나라 삼성, 현대 합친 것보다 더 큰 재벌이다. 그 대신에 노조조직률이 85%, 복지는 세계 톱 수준이다.
스웨덴도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1880년대만 해도 하다 못해 미국의 정부 예산이 GDP의 10%일 때 스웨덴 혼자 6%였다. 1920년대만 해도 스웨덴 노사관계는 세계 최악이었다. 노동자 1인당 파업 건수가 세계 최다였다. 그랬는데 이렇게 완전히 다른 나라를 만들었다. 베끼자는 게 아니라 우리도 그런 식으로 유연하게 생각해야 한다. 이런 재벌 구조는 나쁘고, 노조는 이래서 잘못됐고, 저임금은 이렇게 올려야 하고, 이렇게 개별 사안을 보지 말고 전체적으로 봐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에 필요한 게 뭐냐? 투자 더 많이 하고 기술 발전시키고 신사업 집중하고 중국 추격 따돌리고 다같이 잘 살고 서로 보살피고 젊은이에게 미래가 있는 사회를 만들자, 그런 목표를 정하고 그걸 위해서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야 한다. 만약 그게 재벌의 국유화라면 그것도 좋다. 솔직히, 김정은하고도 타협하는데 왜 재벌하고는 타협을 못 하나. 반대쪽 입장에서 보면, 김정은하고도 타협하는데 왜 재벌들은 노조를 인정 못 하나.
모든 분야에 정답이 있다고 정해놓고 거기에 우리 경제를 끼워맞추면 안 된다. 미국 교수들이 만든 이론에 우리가 맞추기 위해 우리 국민의 현재 삶을 희생해야 하나. 단순히 재벌이 이걸 원하니까 뭘 주고 뭘 받자는 도식적인 것보다는, 우리가 다같이 포용하고 지속적으로 잘살 방법을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의논하자는 것이 대타협이다.
Q. 두 가지를 묻겠다.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이 경쟁력 약화 원인 아닌가? 또 세계화, 금융자유화, 자본의 이동을 반대하는데 그걸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인가.
A. 재벌이 사업을 다각화하지 않았으면 지금의 우리가 없었다. 다각화 자체를 욕하는 건 말이 안 된다. 재벌이 라면·제과점을 하는 건 충분히 규제 가능하다. 다른 나라에 비하면 한국은 대기업으로부터 골목상권을 많이 보호하는 것이다.
경제력 집중 문제의 근본 해결 방법은 세금을 올리고 소득을 재분배하는 것이다. 두부 만드는 건 규제해야 하지만, 기본적으로 대기업은 돈을 벌라고 하고 세금을 왕창 매겨 분배하면 된다. 스웨덴, 독일, 네덜란드가 하는 방식이다. 경제력 집중 해결은 기업정책이 아닌 조세정책, 복지정책으로 해야 한다.
세계화가 불가피하다고 받아들이면 그땐 이미 지는 것이다. 힘센 사람들이 정해 놓은 규칙을 우리가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건 이미 끝난 거다. 저항이 불가능하다고? 그럼 박정희 시대엔 더 못했어야 하는데, 그때는 더 자주적으로 했다. 지금 나라 덩치는 커지고 세계 10대 경제강국 자랑하면서 우리가 힘 없으니까 미국이 하라는 대로 해야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게다가 왜 할 필요 없는 것까지 하나. 한미 FTA 누가 하라고 했나. 그거 안 하면 미국이 쳐들어온다고 했나? 한EU FTA는 왜 하나.
자본시장 개방, 물론 옛날만큼 걸어잠글 순 없지만 지금만큼 할 필요도 없고 안 할 수도 있었다. 대세라고? 대세론 얘기하는 사람이 그걸 꼭 따르는 것도 아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다른 나라는 규제를 강화하는데, 이명박 정부는 더 자유화했다. 대세론을 얘기하는 건, 자기가 하고 싶은 걸 설득할 자신도 없고 귀찮으니까 대세라고 하는 것이다.
주주 자본주의, 자본시장 개방을 완전히 되돌릴 순 없겠지만, 여러 장치를 통해 단기 주주의 힘을 약화시킬 수는 있다. 테뉴어 보팅(tenure voting, 장기 보유 주식 차등의결권)이라고 주식 오래 가진 사람에게 투표권을 더 주는 방식이 있을 수 있다. 국민연금은 기업의 장기적인 이익 위한 방어자 역할을 해야 한다. 독일, 스웨덴, 네덜란드 하는 것처럼 이사회에 지역 대표, 주민 대표가 참여해 기업이 장기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성장을 도모해야 한다. 하기 싫으니 안 하는 것이다.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생각해본 적도 없는 것이다. 충분히 할 방법이 있다.
한미 FTA의 투자자-국가소송제(ISD), 나를 포함해 반대 측에서 그걸 얼마나 반대했나. 이걸 지금 엘리엇이 이용하고 있다. 호주는 미국과 FTA할 때 ISD를 안 했다. 그런 나라도 있다. 근데 우리는 그걸 내어주고 엘리엇이 돈 뜯어 가는 것에 불평한다. 지금 우리나라가 정말로 위태로운 상황이라고 본다. 만시지탄이지만, 빨리 새로운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서 틀을 바꾸지 않으면 정말 큰일 난다. 내가 10년 뒤에 와서 또 이런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으면 앞날이 캄캄한 것이다. 그땐 앞날도 없는 것이다.
우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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