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금융감독원이 보험사를 겨냥해 마침내 칼을 빼들었다. 수천억 원에 달하는 보험금 미지급금 일괄 지급을 압박하고 나선 것. 보험사들은 일단 보조를 맞추는 모양새지만 불만의 목소리도 없지 않다. 금융권에선 최근 윤석헌 금감원장이 직접 나서 사실상 ‘선전포고’를 한 만큼, 보험업계가 금감원이 원하는 수준의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하반기 첫 타깃이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지난 9일 윤 원장은 ‘금융감독원 혁신과제’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소비자 보호 차원에서 금융사 감독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3년 만에 부활한 종합검사 제도(관련기사 금감원 종합검사 전면 부활, '전쟁' 대상은 어디?)와 동시에 ‘일괄구제’ 제도 시행이 눈길을 끌었다. 일괄구제는 비슷한 형태의 피해에 같은 결론을 내는 제도다.
이를 두고 금융권에선 당장 “금감원이 보험사를 정조준했다”는 해석이 나왔다. 윤 원장이 일괄구제 제도 첫 대상으로 즉시연금과 암 보험 등 보험 상품을 직접 언급하면서 “사회적 관심이 높은 분쟁 현안의 경우, 소비자의 입장에서 공정하게 처리하겠다”며 “부당한 보험금 미지급 사례 등에 대해 엄정 대응하겠다”고 강조했기 때문. 제도는 하반기부터 본격 시행될 예정이지만, 즉시연금은 금감원 혁신과제 발표 직후 시범 형태로 적용됐다.
# 버티는 보험사에 최후 통첩한 금감원
즉시연금 상품은 최근 수년간 끊이지 않고 이어진 보험사-가입자의 대표적 분쟁 사례다. 가입자는 처음 약속과 다르다며 보험사에 문제를 제기하고, 보험사는 “문제될 게 없다”며 한푼도 내줄 수 없다고 버티면서 갈등이 극에 달했다.
만기환급형 즉시연금이 갈등의 핵이다. 일반적인 즉시연금과 달리 가입자가 보험 가입 당시 목돈을 한꺼번에 넣어두면 보험사로부터 매달 이자 형태로 연금을 받다가 만기에 넣어둔 원금을 모두 돌려받는 구조다. 보험사 입장에선 가입 시점부터 목돈이 들어와 자금 조달이 쉽고, 운용하는 과정에서 수익이 나오면 고객에게 돌려주고도 이윤이 남아 한때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별칭까지 붙었다.
논란이 수면 위로 떠오른 건 지난해 초다. 삼성생명의 만기환급형 즉시연금에 가입한 한 가입자가 “별다른 설명 없이 연금을 더 적게 받고 있다”며 금감원에 민원을 제기하면서부터다. 삼성생명은 만기 시점에 원금을 돌려줘야 하는 만큼 매달 지급하는 연금에서 만기 보험금 지급 재원을 제외하고 연금을 줬다는 입장이었지만, 가입자는 약관에 이러한 설명이 없었다고 맞섰다.
실제 문제가 된 즉시연금 약관에는 ‘연금액은 보험료 및 책임준비금 산출방법서에 따라 지급한다’고만 명시돼 있다. 보험사들은 ‘보험료 및 책임준비금 산출방법서’를 근거로 사업비, 위험보험료 등을 뗀 뒤에 계약자에게 돌려줄 돈을 적립했고, 만기까지 계약자에게 받은 돈을 굴려서 낸 운용 수익을 붙였다. 단순히 보험료에 이율을 곱해서 적립한 금액보다 적을 수도 있는 구조다.
다만 ‘산출 방법’에 대한 설명이나 구체적 문구가 명확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이 경우 소비자 입장에서는 보험사가 약관과 달리 연금을 적게 줬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에 대해 금감원 분쟁조정위원회(분조위)는 “약관상 보험금이 줄어들 수 있다는 내용이 명확하지 않다”는 취지로 지난해 11월 가입자의 손을 들어줬고, 삼성생명은 분조위 결정을 받아들였다. 분쟁 당사자들이 분조위 조정안을 수락하면 법원 확정판결과 같은 효력이 발생한다.
금감원은 지난 3월 전체 생명보험사들에게 분조위 결정과 동일하게 처리하라고 통보했다. 보험사들의 즉시연금 약관이 비슷한 만큼, 분조위에서 내린 결정에 따라 만기환급형 즉시연금 가입자 모두에게 적게 지급된 보험금을 모두 돌려줘야 한다는 주문이었다. 일괄구제 제도를 이미 한 차례 시행한 셈이다.
하지만 보험사들의 대응은 미온적이었고, 삼성생명도 민원인에게만 즉시연금을 돌려줬을 뿐 민원을 제기하지 않은 가입자들에게는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보험사들이 금감원 요구를 이행하지 않고 버티기에 들어가자, 윤 원장이 직접 나서 공개적으로 압박한 모양새”라며 “사실상 금감원의 마지막 경고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 금감원 “타당한 결정에 따른 후속조치, 보험사들 이행해야”
보험사도 무작정 버티기 모드로 일관하고 있지는 않다. 삼성생명은 오는 26일 이사회를 통해 일괄지급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올해 초 앞서의 삼성생명과 같은 민원이 제기된 한화생명은 금감원 분쟁조정위원회 결정에 대한 의견서를 오는 8월 10일까지 제출한다. 민원 사례 먼저 해결하고 일괄지급을 결정할 방침이다.
일단 금감원의 요구에 보조를 맞추는 모양새지만,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괄지급 금액이 상당할 것으로 전망돼서다. 보험업계에 따르면 유사한 사례가 삼성생명만 5만 5000건, 보험사 전체로는 16만 건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금액 규모도 삼성생명 4300억여 원, 한화생명 850억여 원 등으로 보험업계 전체 규모는 8000억 원에서 최대 1조 원에 달할 전망이다. 이는 각 보험사의 연간 합산 순이익의 5~10% 수준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그동안 보험사들이 적극적으로 확인하지 않았던 점과 최근 금감원이 중소 보험사들에게도 관련 자료 제출을 요구했던 것으로 알려져 실제 일괄지급이 이뤄질 경우 규모는 더 커질 수도 있을 것으로 본다.
금감원 분조위 결정 자체를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한 대형 보험사 임원은 “약관에는 ‘보험금 산출방법서’에 따라 보험금이 지급된다고 명시돼 있고, 산출방법서에 내용이 포함돼 있다”며 “연금계산식이 복잡할 경우 설명할 의무는 없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어 산출방법서를 구체적으로 설명할 의무도 없었다”고 말했다. 다른 보험사 관계자는 “금감원은 16만 건이 모두 잘못됐을 것으로 보고 일괄구제를 요구했지만, 업계에선 일부 문제로 보고 있다. 전체로 확대하는 건 무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금감원은 보험사가 자발적으로 후속조치를 준비하고 있는 만큼 당장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겠지만, 일괄지급 등 요구 사항이 이행되지 않을 경우 강경 대응할 방침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각 보험사의 입장은 파악하고 있지만, 분조위 결정에는 문제가 없다는 판단”이라며 “소비자들의 권리가 부당하게 침해되는 경우엔 엄격하게 조치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대응 방침에 종합검사, 부문검사 등 감독 수단도 포함돼 있느냐”는 질문에는 “그렇다”고 답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과거 자살보험금 논란이 이번 즉시연금과 비슷하다. 당시 삼성 한화 교보 등 빅3 생보사들이 금감원의 요구에도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고 버티다 결국 영업정지와 CEO(최고경영자) 제재 등 중징계를 받았다”며 “금감원은 올해 초부터 즉시연금 등 보험상품뿐만 아니라 사업비, 채용 등도 꾸준히 점검해왔다. 최근 감독 강화 방침까지 공식화한 것도 보험사들 입장에선 압박이다. 버티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문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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