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기획재정부는 서열과 의전을 중시하는 조직이다. 행정고시 재경직 엘리트들이 모여 있어 자존심이 강하고 배타적이다. 국가 재정을 분배하기에 예산 시즌이 되면 여당 대표가 음료수를 사들고 인사차 찾아갈 정도로 힘이 세다.
때문에 어떤 정권이든 기재부와는 ‘인사 전횡을 않겠다’는 타협을 해야 한다. 경제정책을 원활히 펼치기 위해서는 기재부로부터 신임을 얻을 수 있는 엘리트 관료 출신을 장관으로 앉혀야 한다는 얘기다. 청와대든 여당이든 기재부는 까다롭고 불편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16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 본부를 찾았다. 기재부 장관이 한은을 찾은 것은 2009년 윤증현 전 장관 이후 9년 만이다. 이례적인 일이다. 이 자리에서 김 부총리는 내년 최저임금이 10.9% 오른 8350원으로 결정된 데 대해 “두 자릿수 인상이 하반기 경제운용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어 우려된다”고 말했다. 그는 그간 ‘최저임금 2020년 1만 원’ 공약을 두고 ‘신축적인 인상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날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최저임금위원회의 결정으로 2020년까지 최저임금 1만 원 목표는 어려워졌다”며 사실상 공약 포기 선언을 했다. 또 “최저임금 인상 속도가 기계적 목표일 수는 없다. 정부 의지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김 부총리의 그간 발언과 같은 맥락의 말을 했다. 사실상 청와대가 기재부의 뜻을 받아들인 셈이다.
현 정부 출범 이후 기재부 내부에서는 ‘청와대의 정책이 급진적’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경제민주화와 재벌 개혁을 추진하는 장하성 교수를 청와대 정책실장에 앉혀 경제정책의 컨트롤 타워를 맡겼다. 기재부는 청와대의 하부조직이 될 것이라는 볼멘소리도 적지 않았다.
특히 김 부총리는 비서울대 출신에 비주류로 분류되는 예산라인에서만 근무했다. 김 부총리 ‘패싱’ 논란도 이런 차원에서 불거졌다. 그러나 최저임금 논란과 최근 인사 동향을 보면 관료들 간 파워게임의 무게추가 기재부 쪽으로 기운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김 부총리가 장하성 실장과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는 분석이 많았다. 장 실장이 내놓는 개혁 정책을 김 부총리가 견제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달 있을 청와대 개각에서 김 부총리는 유임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정가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이에 비해 장 실장은 사표를 던졌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다. 인사를 권력관계의 결과물로 봤을 때 김 부총리가 정책의 주도권을 쥐었다고 유추할 수도 있는 대목이다.
고위 관료 인사는 행정부와 여당의 입김이 일부 작용하지만 대통령이 책임지고 결정한다. 김 부총리가 다음 개각에서 살아남는 것이 유력한 상황에서 장 실장의 사의설은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장 실장이 정책 추진에 있어 막히는 일이 왕왕 생기자 돌발적으로 사의를 표명했던 것 같다”며 “대통령, 적어도 비서실장이 이를 다독여 무마시켰을 것”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경제정책을 청와대보다는 기재부가 주도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박근혜 정부는 청와대 경제수석의 카리스마를 기재부 장관이 따라오는 식의 인사 정책을 취했다. ‘조원동 수석-현오석 장관’ ‘안종범 수석-최경환·유일호 장관’. 친박을 중심으로 당청이 추진하는 정책을 기재부가 지원하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청와대의 학자 출신 보좌진이 기재부를 강하게 끌고 가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문 대통령이 혁신성장과·사회적 경제를 계속 이끌 인물로 김 부총리를 지목했다. 헤게모니 싸움에서 김 부총리에게 힘을 실어준 셈이다.
대신 청와대는 6월 윤종원 전 기재부 경제정책국장을 경제수석에 임명했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 기재부에서 금융·재정·정책 등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기재부에서도 ‘성골 중의 성골’로 꼽힌다. 청와대가 김 부총리의 역량과 존재를 인정하되 경제정책의 드라이브를 놓치지 않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SNS 등에 소득주도성장 정책에 대한 글을 수 차례 다룬 바 있다. 현 정부와 정체성을 공유하는 엘리트 관료인 셈이다. 청와대가 현재 기재부와의 어색한 관계를 풀면서 주도권을 쥐기 위한 인선으로 풀이할 수 있다.
앞서의 여권 관계자는 “청와대가 장 실장으로 기재부의 군기를 잡으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던 모양”이라며 “윤 수석이 청와대와 기재부 간에 가교를 놓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듯하다”고 설명했다.
김서광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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