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세계 어느 곳에 던져두어도 그곳의 음식을 먹기 바빠 절대 한국 식당을 찾지 않는다. 그러나 지난 5월부터 6월까지 뉴욕에 체류하는 동안엔 굳이 한식을 먹고, 한식 요리사들을 만났다. 2018년, 지금은 뉴욕의 한식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재미있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미식의 격전지’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도시인 뉴욕에 매우 천천히, 그러나 자연스럽게 물들어간 한식은 이제 비로소 하나의 장르로 탄생하며 바야흐로 세 번째 세대를 시작했고, 그 물결은 거세다. ‘사업’이 아닌 현상으로서의 한식.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뉴욕 한식의 이모저모를 관찰한 기록, ‘이해림의 뉴욕 한식다반사’를 부정기 연재한다.
우리는 그렇게도 미국에 살고 싶어했다. 그 중에서도 자유의 여신상과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있는 뉴욕을 흔히 떠올렸다. 미국이라서 더 나은 삶이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또는 현실적인 각각의 이유로 수많은 한국인이 국적을 포기하고 미국 시민이 되었다.
그들이 맨해튼 32번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바라보며 이룬 군락이 뉴욕 한인타운이다. 타향살이 편했을 리 없겠으나, 뉴욕의 한국인들은 맨해튼 알짜배기 지역에 고국 같은 풍경을 펼쳐냈다.
‘H마트(Hmart)’에는 거의 모든 한식 재료가 신선하게 유통되고, 푸드코트 ‘우리집(Woorijip)’에 가면 떡볶이부터 잡채, 갈비까지 뷔페식으로 얼마든지 골라 먹을 수 있다. ‘뚜레쥬르(TousLesJours)’ 32번가 지점에서는 한국식 빵을 서울과 거의 똑같이 만들어 팔고, ‘비비큐치킨(BBQ chicken)’에서 치맥을 하고 노래방으로 올라가 한국 노래를 불러 젖힐 수도 있다.
다음날 해장은 ‘감미옥(Gammeeok)’에 맡기면 된다. 한국식 고기가 먹고 싶을 때는? ‘삼원가든(Samwon Garden Korean BBQ)’이 32번가에 가장 최근에 생긴 한국 식당이다. 이들이 한 지역에 모여 뉴욕의 한식 1세대 군락을 이룬다.
과도기적인 2세대는 지금 뉴욕뿐 아니라 세계적인 푸드 신의 스타로 군림하고 있는 데이비드 챙(David Chang, 한국식으로는 성이 장이 되지만 그는 한국어를 하는 한국인 어머니를 둔 한국계 미국인이다), 그리고 올리브 채널의 ‘마스터 셰프 코리아’ 심사위원으로 나섰던 김훈이(Hooni Kim) 셰프가 더블헤더를 뛰었다.
이들은 한식을 보는 태도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확장시켰다. 데이비드 챙 셰프는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퓨전’이다. 그것도 아주 변경 없는 퓨전. 그 자신에겐 그가 만드는 음식을 한식으로 소개할 맘이 전혀 없어 보인다. 그 어머니로부터의 한식뿐 아니라 그가 여태껏 살아오며 경험한 모든 것을 ‘멜팅 폿(Melting Pot)’에 넣어 버린다. 맛있는 건 일본이든 중국이든 베트남이든 뭐든 끌어다 쓰고 그곳의 이름을 붙인다. 한식을 요소로 활용하되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후니 킴 셰프의 눈은 달랐다. 서울을 종종 경험하며 1세대와의 경계로부터 출발한 그의 한식은 동시대 서울의 한식을 뉴욕에 합병시켰다. 1970~1980년대의 맛에 머물러 있는 이방인으로서의 한식을 현대에 맞게 개량했다.
그의 레스토랑 ‘단지(Danji)’와 ‘한잔(Hanjan)’은 마치 한남동쯤의 한식 다이닝 또는 업스케일된 한식 술집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친숙한 한식을 누구도 깜짝 놀라지 않도록 친절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변형했다. 완급은 절묘하다. 전통주점 같은 한 귀퉁이의 인테리어(뉴요커들과 관광객들을 이끄는 요소)와 현대적인 한식(유학생이나 교포, 한국인 관광객 입에 익숙한)이 어우러져 있다.
이를 잇는 새로운 세대가 등장한 것은 최근 몇 년 사이의 일이다. 2015년 로어이스트사이드(LES)에 문을 연 ‘오이지(oiji)’로부터다. 2016년 ‘아토보이(Atoboy)’, 2017년 ‘꽃 스테이크하우스(COTE KOREAN STEAKHOUSE)’, 2018년 ‘아토믹스(Atomix)’가 잇따라 등장하며 뉴욕 한식의 세 번째 물결을 정의했다.
2011년 문을 연 임정식 셰프의 ‘정식(JUNGSIK)’이 시조 격이지만 그는 2세대와 구분되는 3세대를 조금 다른 행보로 훌쩍 일찍 개척했다는 의미가 있다. 단지와 정식, 꽃이 차례로 뉴욕 미셰린(미슐랭) 원스타 클럽에 가입했으며, 정식은 2014년부터 별 둘을 달고 별 셋을 노리고 있다.
이들은 이전 세대와 미국에 온 이유부터가 다르다. 세계를 경험하고, 해외에서 요리사 교육을 받는 동안 뉴욕을 레스토랑 사업의 블루오션으로 명확히 판단하고 들어왔다는 점이 차이다. 당장 생계를 해결할 방편으로 세탁소 아니면 한국 식당 중 고른 것이 아니라, ‘나’의 요리를 창의하고 그것으로 성공할 장소를 뉴욕과 LA, 런던, 파리 같은 세계의 대도시 중에서 고른 것이다. 그 중에서도 첨예한 미식의 격전지인 뉴욕 맨해튼으로.
한식을 근본에 둔 이 요리 엘리트들은 말하자면 이런 루트를 밟았다. 뉴욕 근처의 요리학교 CIA에서 공부를 마치고, ‘일레븐 메디슨 파크(Eleven Madison Park)’, ‘퍼 세(Per se)’나 ‘르 버나딘(Le Bernardin)’, 아니면 ‘그래머시 태번(Gramercy Tavern)’ 같은 세계적인 명성의 레스토랑에서 경력을 쌓고 그곳에서 오너(또는 투자자)를 만날 인맥을 만들었다. 이는 이해를 돕기 위해 단순화한 설명이고, 요리사들의 바이오그래피는 제각각 다른 행보로 이뤄져 있다.
처음부터 계획했던 대로, 이들은 뉴욕을 위한, 뉴욕에 의한, 뉴욕의 한식을 한다. 이들에겐 한국의 한식이 갖는 지역적, 인식적 틀이 거의 고려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면에서는 데이비드 챙과 결을 함께한다. 차이는 국적에 대한 자아 이미지에 있다. 한국인이 잘 아는 오래된 한식은 32번가에 가서 찾으면 된다.
뉴욕에 이미 녹아 있는 다른 아시아 국가들뿐 아니라 남미, 유럽, 그리고 미국의 음식문화까지 이들은 얼마든지 자유롭게 재료로 주무를 수 있다. ‘멸치액젓이 없으면? 피시소스로 김치를 만들면 되지!’ 같은 발상의 전환이 자유롭다. 짭짤하게 발효한 동물성 단백질이 필요한데 꼭 멸치를 염장 발효시킨 것이어야 할 필요는 없는 셈이다.
맛의 구성과 향이 ‘조금(아니 사실 많이)’ 달라질 뿐이다. 맛을 분해해서 요소별로 생각하고 창의적으로 설계해 재조립하는 데 익숙한 동시대 요리사로서 뉴욕에 어울리는 탈 국적의 한식을 선보인다. 그들이 이제까지 살아온 방식대로 가장 뉴욕스러운, 가장 시크한 모습으로 “한식인데요, 드셔보시죠” 하며.
한국인으로서, 뉴욕의 이방인인 나도 처음에는 놀랐다. “어떻게 감히!”라고 일갈할 서울의 수많은 한식 ‘훈장님’들의 진노한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달까. 여러 번 양보해도 이것은 한식이라고 순순히 인정하기엔 너무 낯선 한식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장점이라는 것을, 신선한 즐거움이라는 것을 배우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것은 ‘뉴욕의 한식’이니까 차이를 인정하면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의 레스토랑에서 같은 공간을 나눠 가진 뉴요커들과 다른 국적 손님들의 반응, 그리고 뉴욕의 유력 매체들이 이들에게 준 리뷰는 이런 식이었다. “이거 한식이라는데? 좋은데 뭐가 문제야?”
제3의 물결, 뉴욕식 한식은 뉴욕에서 확실히 한식으로서 인지되며 인기를 얻고 있다. 좀비처럼 스산하게 떠오르는 단어는 ‘한식 세계화’. 한식 세계화가 이들의 활약 덕분에 비로소 제대로 된 궤도에 올랐다.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에서는 말과 돈만 요란했던 그 일을 순전히 개인들이 재능과 노력으로 이뤄냈다. 젊은 인생을 걸고.
지금, 한식의 새로운 물결이 뉴욕에 넘실대고 있다.
필자 이해림은? 패션 잡지 피처 에디터로 오래 일하다 탐식 적성을 살려 전업했다. 2015년부터 전업 푸드 라이터로 ‘한국일보’ 등 각종 매체에 글을 싣고 있다. 몇 권의 책을 준비 중이며, ‘수요미식회’ 자문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페이스북 페이지에서도 먹는 이야기를 두런두런 하고 있으며, 크고 작은 음식 관련 행사, 콘텐츠 기획과 강연도 부지런히 하고 있다. 퇴근 후에는 먹으면서 먹는 얘기하는 먹보들과의 술자리를 즐긴다.
이해림 푸드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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