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매콤 껍데기 볶음’(우리끼리는 ‘매껍’이라고 부른다)은 분노의 퇴근길에 완벽하게 세팅된 상품이다. 상상해보자. 늦은 퇴근길이다. 이만저만 늦은 것도 아니고 밤 10시쯤 지났을 거다. 당연히 무능한 상사가 이상한 지시를 해서 괜히 야근을 했다. 다 그런 거다. 세상에 게을러서 야근하는 사람도 있나?
야근을 하는 내내 ‘내가 이런 바보 같은 일을 왜 하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겠지만 월급은 받아야 하므로 그 바보 같은 일을 빨리 해치워 손에서 떼어내버리기 위해 저녁도 거르고 일만 했을 거다. 막상 그 바보 같은 일을 떼어내고 어둑한 길을 뚜벅뚜벅 걷는 동안엔 해방감에 잠시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나 벌건 악취를 풍기는 취객 몇, 갑갑한 옷차림을 하고 꾸벅꾸벅 조는 직장인들이 헐겁게 들어찬 지하철이 문을 닫고 출발할 때쯤 부아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하는 거다. 배도 고프고, 가방도 괜히 무겁게 느껴진다. 아까 한 바보 같은 야근부터 시작해 무고한 세상이 다 미워지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럴 때는 친구를 불러내 노가리에 생맥주 몇 잔 콸콸 들이켜며 상사 욕 회사 욕을 해줘야 하지만 시계를 보면 이미 밤 11시가 가까워져 있다. 이 시간에 불러낼 수 있는 친구란 없다. 그런 시간까지 바보 같은 일을 하느라 야근을 했다니! 술 생각 했다가 괜히 화만 더 났다.
이 정도 상태가 됐을 때 지하철에서 일단 뛰쳐나가는 거다. 마트 지하2층 식품 매장으로 달리듯 내려가는 거다. 에스컬레이터 끝에 매껍을 파는 족발 코너가 있다. 시간이 하도 늦어서 ‘마감 세일’ 딱지까지 덧붙어 있다. 아싸 핵이득.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는 잠시 동안 맥주는 냉동실에 넣어 둔다. 더러운 직장인에서 탈피해 고무줄 바지 차림으로 홀가분한 자연인인 내가 되어 나와선 맥주부터 황급히 따서 콸콸 마셔 넘긴다. 그래야 침착하게 매껍을 다룰 수 있다.
매껍을 여러 방법으로 먹어봤는데, 가장 맛나게 먹는 방법은 작은 냄비에 담아 물을 조금 붓고 휘휘 저으며 약하게 보글보글 끓이는 거다. 이렇게 끓이면 단단하게 굳어 있던 껍데기가 다시 부들부들하게 풀리고, 자극적인 양념도 먹기 딱 좋게 희석된다.
좀 여유가 있을 땐 매껍에 냉동 새우를 듬뿍 넣어 같이 끓여보시라. 이게 정식 출시되길 바랄 정도로 엄청 맛이 좋다. 새우의 수분이 다 빠져나가 쪼그라들 때까지 끓이는 것이 핵심. 정 급할 때는 그냥 전자레인지에 돌려도 되긴 된다. 단, 전자레인지 안에서 껍데기가 팡팡 터져 날아다니고 양념이 사방으로 튀므로 뚜껑은 필수다.
냄비로 끓여도 불과 몇 분이면 완성된다. TV를 켜고, 적당한 예능 프로그램을 골라 튼다. 아까 한 야근에 비하면 뭐든 대충 재미있다. 껍데기는 부드럽게 씹히면서도 젤리처럼 쫄깃쫄깃한 질감을 갖고 있다. 두반장 맛과 초장 맛과 닭발 맛과 떡볶이 맛과 떡꼬치 맛이 다 나는 마성의 양념은 순식간에 머리 꼭대기까지 땀이 뿜어져 나올 정도로 맵다.
지점마다 조금씩 맛이 다른데, 적어도 내가 애용하는 점포의 양념은 30초 안에 모공을 여는 강도의 매운 맛이다. 맵다뿐인가. 짜고 시고 단맛에 감칠맛까지, 뭐가 다 강하다. 다 강한 이 맛들로 밸런스를 맞춘 것이 신기할 정도다. 이게 맛있는 맛인가, 이상한 맛인가. 아무렴 어때. 기분이 좋아진다. 감정도 미각의 하나라면, 매껍처럼 맛난 음식도 흔치 않다.
매껍이 그 바보 같은 상사의 껍데기라고 생각하며 질겅질겅 씹는 동안에, 관심도 없는 예능 프로그램이 웃는 대로 따라 웃는 동안에 하루의 묵은 화가 풀리고 비로소 다시 출근할 힘을 얻는다. 어느새 밤이 깊어 새벽 1시가 되었다. 편안한 잠이 쏟아지는 때다. 또 그 바보 같은 일을 얼마든지 시켜보라지, 내가 월급 받아 매껍 사먹지 때려치우나 봐라, 하며.
필자 이해림은? 패션 잡지 피처 에디터로 오래 일하다 탐식 적성을 살려 전업했다. 2015년부터 전업 푸드 라이터로 ‘한국일보’ 등 각종 매체에 글을 싣고 있다. 몇 권의 책을 준비 중이며, ‘수요미식회’ 자문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페이스북 페이지에서도 먹는 이야기를 두런두런 하고 있으며, 크고 작은 음식 관련 행사, 콘텐츠 기획과 강연도 부지런히 하고 있다. 퇴근 후에는 먹으면서 먹는 얘기하는 먹보들과의 술자리를 즐긴다.
이해림 푸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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