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세계에서 가장 자유분방한 도시를 물으면, 아마 열에 아홉은 암스테르담을 이야기할 것이다. 최근 흥미롭게 읽은 책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도시, 암스테르담’을 보면, 이런 자유분방함 혹은 관대함이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암스테르담은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사상을 퍼뜨리고 다니는 자들에게 어째서 그렇게 관대했던 걸까? 가장 단순한 답은 그곳이 무역도시라서일 것이다.
이는 두 가지를 의미하는데, 하나는 암스테르담이 억양이나 음식의 맛, 신념 등 외국의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표준에서 벗어난 관념들이 유입되었다고 해서 굳이 그것을 통제해 사업의 흐름을 방해할 생각이 암스테르담시 정부 관계자들에게 없었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도시, 암스테르담’ 72쪽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종교개혁 시기 암스테르담이 이른바 ‘불온서적’을 찍어내는 공장이 되었던 것을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 암스테르담을 지배하던 합스부르크 왕조는 종교개혁을 옹호하는 서적의 출간을 중지하고, 심지어 군대를 보내는 등 강압정책을 펼쳐 ‘상업활동’에 심대한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해관계에 민감한 암스테르담 사람들이 전쟁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사상의 자유를 옹호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이에 대해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도시, 암스테르담’의 작가, 러셀 쇼토는 암스테르담의 상인계급과 식자층이 보기에 구교(가톨릭)는 네덜란드인에게 점점 맞지 않는 옷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중세 유럽을 특징짓는 여러 요소 중 하나가 장원제도라고 하는 수직 사회구조로, 영주가 자신에게 속한 봉토와 그 봉토를 일구어 노동력과 생산물의 형태로 지대를 지불하는 농노들을 지배하는 시스템이었다. (중략)
암스테르담을 비롯한 네덜란드의 주들은 장원제도로 가지 않았는데, 다른 모든 문제와 마찬가지로 물 때문이었다. 육지의 대부분이 바다나 늪지를 개간한 땅이었기에 교회도 귀족도 그 땅에 선뜻 소유권을 주장하기 어려웠다. (중략) 이런 체계에서 사람들은 자기 소유의 땅을 자유롭게 사고팔았다. (중략)
유럽 다른 국가에서는 귀족이나 교회 아니면 귀족과 교회가 함께 땅을 소유하고 관리한 반면, 1500년 경의 홀란트 주에서는 단 5%의 땅만 귀족이 소유했고 농민이 소유한 땅의 비율이 무려 45%에 달했다.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도시, 암스테르담’ 74~75쪽
결국 암스테르담 사람들은 에라스무스나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에 기본적으로 ‘열린 자세’를 취할 경제적인 토대를 이미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1864~1920)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유명한 책에서 “내세를 지향하면서도 세속적인 생활양식을 합리화한” 프로테스탄트 교리 덕분에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있었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이런 사례는 암스테르담의 경우에는 맞지 않는다. 다시 말해, 경제가 발전되고 사적 재산권이 보호받는 지역일수록 신교를 더 열성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이 의문을 최근 읽은 책 ‘제도와 조직의 경제사’ 덕분에 상당 부분 풀 수 있었다. 필자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역사가, 베커와 뵈스만은 아주 흥미로운 연구를 수행했다.
베커와 뵈스만은 2009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19세기 독일의 데이터를 이용해 베버 가설의 검증을 시도했다. 주로 사용된 자료는 1871년 프로이센의 인구통계조사에서 얻을 수 있는 종파별 인구 데이터였고, 구체적으로는 종파별 인구가 각각 452개의 군별로 작성되어 있었다. (중략) 이렇게 군마다 다른 종파별 인구비율을 이용하여 프로테스탄티즘에 관한 베버 가설을 통계적으로 검증한다는 것이 베커와 뵈스만의 아이디어였다. -‘제도와 조직의 경제사’ 82~83쪽
그렇지만 신교(프로테스탄트)를 믿는 주의 소득이 높다 한들, 이게 막스 베버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앞서 암스테르담의 사례에서 보듯, 그들이 이미 자본주의에 한 발을 디뎠기에 신교를 믿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베커와 뵈스만은 독일 종교개혁운동의 중심지 ‘비텐베르크’에 주목했다. 즉, 비텐베르크에 근접할수록 인적 접촉 등으로 인해 루터의 종교개혁에 동조하는 사람이 더 많을 가능성이 높다. 그다음 순서로 베커와 뵈스만은 종교개혁 당시, 비텐베르크와의 거리와 경제발전 수준의 관계를 측정했더니 둘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난 이유는 비텐베르크가 독일의 동부지역에 있어 서유럽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상공업의 발달이 뒤처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엘베강의 동쪽지역은 중세 후기까지도 ‘농노제도’가 매우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이제 다음 순서는 간단하다. 이를테면 볼프스부르크와 드레스덴처럼, 비텐베르크와의 거리는 비슷하지만 프로테스탄트 인구비율이 다른 지역의 경제성과를 조사하면 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대단히 명확했다.
볼프스부르크처럼 프로테스탄트 인구비율이 높은 지역일수록 이후 가파른 상공업의 발달을 경험했던 것이다.
아래의 표를 보면, (경제발달의 수준을 보여주는) 인구 1인당 소득세액과 공업/서비스업 취업자 비율 모두 프로테스탄티즘의 보급이 경제발전에 플러스의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인당 소득세액에 관한 회귀식에서 프로테스탄트 인구의 비율 계수인 0.586은 프로테스탄트 인구만 있는 군과 가톨릭 인구만 있는 군이 있다고 할 경우, 전자가 후자보다 1인당 소득세액이 0.586마르크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프로이센 전체의 평균 1인당 소득세액의 29.6%에 상당하는 큰 차이다. -‘제도와 조직의 경제사’ 84~85쪽
이상의 결과만 놓고 본다면, 암스테르담을 비롯한 플랑드르 지역의 도시들이 자본주의 발달을 주도할 수밖에 없다. 이미 시장경제가 발달한 데다, 상대적으로 자본 축적에 너그러운 프로테스탄트 교리가 경제의 발달을 더욱 촉진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사고실험이 모든 것을 다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종교개혁 이후 약 100년이 지나 발생한 ‘30년 전쟁’에서 독일의 남부지역에 피해가 집중되었던 것. 그리고 더 나아가 북부를 지배했던 프로이센에 비해, 독일 남부의 오스트리아제국이 경제정책 면에서 상대적으로 더 무능했던 것도 이런 차이를 낳은 원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과문한 탓에 아직 ‘30년 전쟁’으로 인한 피해의 수준 등을 감안하여 프로테스탄티즘의 영향을 평가한 논문을 아직 발견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베커와 뵈스만의 연구는 학계에 아주 큰 울림을 준다. 베커와 뵈스만처럼, 선배 학자의 주장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지 다양한 방식으로 검증하려는 학자들이 한국에서도 많이 출현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홍춘욱 이코노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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