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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에서] 제발, 제발, 제발 때리지만 마세요

응급실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일이지만 법의 보호도 못 받아 참담

2018.07.07(Sat) 19:28:17

[비즈한국] 그 장면을 몇 번이고 돌려 보았다. 공포스러운 기시감이 밀려들었다. 너무 자주 당하고 목격해 설명할 말도 더 이상 없는 장면이다. 

 

덩치가 크고 위압적인 사내가 술에 취해 폭력적인 언사를 보인다. 하지만 피해자는 고작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더듬거리고, 눈앞에 놓인 위협에서 도망가지도 못해 그 자리에서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견딘다. 

 

안내문은 안내문일 뿐…. 사진=남궁인 제공


불시에 주먹이 날아온다. 코뼈가 무너지고 눈앞이 몽롱해진다. 취객은 분이 풀릴 때까지 때린다. 맞서 싸울 수도 제지할 수도 없다. 보통의 인간처럼 맞선다면 곧 그는 만인의 지탄을 받게 될 터. 그저 폭력에 몸을 내주고 그것이 멈추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아무도 만류하거나 제지하지 않는다. 

 

응급실 바닥은 의사가 흘린 피로 흥건하다.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자세로 엎드린다. 공권력이 도착해도 사내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머리채를 잡은 채 욕설을 하고 마지막 발길질을 내린다. 그 사내는 환자로 찾아왔지만 그리 아픈 사람은 아니다. 경찰서에서 당당하게 진술하고 술이 깬 다음 사과한다. 그리고 벌금을 내고 사회로 돌아가 다시 술을 마시며 비슷하게 산다. 흔한 일, 너무 흔한 일이다. 10년간 이런 일을 너무 많이 봤다.

 

의사 생활 중 가장 끔찍했던 구타에 관해 쓴 적이 있다. 당시 두 손을 소독한 채로 환자에게 중심정맥관을 넣고 있었다. 방해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는 이유로 한 취객이 나에게 힘껏 주먹을 날렸다. 나는 환자를 지키기 위해 모든 주먹을 다 맞았고, 그가 물러나자 옷가지가 전부 찢겨 붓고 긁힌 상반신이 훤하게 드러났다. 

 

공권력이 도착했음에도 그는 잡혀가지도 않았고, 심지어 다음날 응급실에 다른 진료를 받으러 태연하게 왔다. 그는 나를 기억하지 못했고, 나는 그가 두려워 미칠 것 같았다. 나는 겪은 이야기를 그대로 적었고, 사람들이 도저히 사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음에 놀랐으며, 동료들은 이 이야기에 사람들이 놀랐다는 데 놀랐다. 

 

이 글을 빌어 당시 글엔 단 하나의 거짓도 보태지 않았음을 알린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바뀐 것은 없다. 나는 내가 당한 구타 중 대표하는 하나만 적었다. 나머지는 떠올리기 싫어 적지도 못했다. 우리 응급실에 비슷한 폭력 사건은 한 달이 멀다 하고 꾸준히 있었고 그때마다 대처하려 했지만 환자는 다시 몰려들었으며, 비슷한 일은 반복되고 과거의 일은 언제나 처벌받지 않았다. 선악이 너무나 분명한 사건이었어도 대처는 늘 같았다.

 

수련이 끝나갈 무렵, 의국 선배가 다른 병원에서 당한 구타 사건에 대해 들었다. 그 선배는 억울함을 호소하며 폭력 장면이 담긴 CCTV 영상을 직접 보내왔다. 가해자는 선배 머리에 의자 모서리를 꽂아 넣었고, 손에 잡히는 모니터와 집기를 전부 부수었다. 그 후에도 20분가량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분이 풀리도록 책상이나 의자마저 부쉈다. 선배는 머리를 길게 꿰맸고, 가해자는 벌금을 100만 원을 냈다. 

 

선배는 머리에 박힌 스테이플러를 보여주며 취해서 울었다. 나는 분해서 그 영상을 SNS에 올렸다. 너무 끔찍한 영상이어서 급하게 퍼져나갔다. 큰 파문이 일어서 결국은 피해자가 견디지 못했다. 예견된 결과였다. 그가 근무하던 병원에서는 영상이 퍼져나가는 일을 싫어했고, 피해자는 각계에서 연락을 받고 기억을 다시 떠올려야 했으며, 가해자가 찾아와 복수로 칼을 꽂을까 두려워했다. 

 

전형적인, 피해자만 다시 고통을 받는 서사였다. 게다가 사람들은 당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으면서 무능하게 이런 곳에서 읍소한다고 했다. 영상은 내려갔고, 바뀐 것은 없었으며, 모두가 상처 입었지만 남은 것은 없었다. 그 뒤 동두천에서, 강원에서, 고령에서, 대전에서, 장소를 바꿔 비슷한 일은 계속 들려왔다. 

 

이 병원에서 1년째 근무 중인 나는 이틀에 한 번꼴로 폭언이나 폭행을 하는 사람이 있으며, 이번 피해자가 구타당한 날에도 집에 못 들어가고 자신이 간밤에 당한 구타에 관한 진술서를 쓰는 간호사를 보았다. 이쪽 모든 의료진이 나와 비슷한 일화를 제각기 떠올리고 있다. 어제 출근하자 이번 피해자와 아는 사이였던 형은 나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너, 그 영상 봤지. 옛날에 나랑 같이 일했던 친구인데, 착한 친구인데, 말도 조심조심, 착하게 하는 친구였는데…. 실은 우리 중에 환자 앞에서 일부러 나쁘게 하는 사람은 또 어디 있겠어. 그런데 그렇게 당하고…. 만인이 무릎 꿇고 머리채 잡힌 그 친구 영상을 보고…. 착잡하다 인아. 이게 말이 되는 일이니.”​

 

 

당연히 말은 안 되었다. 그날 우리는 하루 종일 그 얘기를 화제 삼았고, 간밤에 비슷한 사람들은 또 우리에게 소리 질렀다. 그렇게 우리는 위협에 벌거벗은 채 일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의 우리였고, 그는 지금의 나였다. 그래서 나는 그 영상의 주인공이 나 자신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내가 다시 겪어야 할 일이었다. 이국종 교수 인터뷰에 이런 말이 있었다. 

 

“생명을 살리네, 어쩌네 하고 이 일을 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이렇게 위대한 일을 하는데 세상에 나한테 왜 이러지? 이러지 않아요. 이러면 더 견딜 수 없을 거예요. 전 그냥 일이라서 하고 있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은 이 말을 그의 겸손으로 받아들였지만, 나는 이 말을 이해했고 일종의 동질감을 느꼈다. 여기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숭고한 사명감이 있어 뛰어든 것이 아니다. 일을 하다 보면 자신의 현재와 미래가 보이고 지금이 보인다. 어찌 진로를 정하면 내가 뛰어든 이 일을 반드시 해내야만 한다는 각자의 책임이 생긴다. 그러면 그 일은 직업적으로 그냥 자신의 삶처럼 된다. 

 

오히려 처음부터 강력한 사명감을 지니고 일을 하기가 더 어렵다. 그런 생각이 지치면 오히려 목표를 잃어버린다. 이것은 그냥 ‘일’이다. 다만 그 일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고, 내가 평생 배운 것이다. 그래서 눈앞에 보이는 모든 변수에 몸을 던져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뿐이다. 

 

그도 그렇게 느끼고 있었고, 그 마음으로 뼈가 가루가 되도록 일하고 있음을, 그의 인터뷰에서 나는 읽었다. 그것은 그냥 그의 일일 뿐이었다. 또한 나는 비슷하게 열심히 일하는 동료 의사들을 많이 알고 있다. 그들 대부분도 자기에게 주어진 일이기에 최선을 다 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를 특별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을 어려워한다. 다른 사람들이 사명의식이라는 단어를 붙이면 우리는 부끄러워질 뿐이다. 그냥 우리는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다. ‘존경’이라는 말은 더더욱 어불성설이다. 의사가 꼭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아야 할 필요는 없다. 의사가 일을 열심히 한다는 이유로 존경을 받는다면, 다른 직업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사회적 통념상 경제적으로 부유할 것이라는 추측과 부정적인 시선과 그에 따른 비난도 괜찮다. 타인의 직종은 어차피 완벽히 이해하기 어려우며, 대부분 편견이나 통념으로 지배된다. 그렇게 생각해도 우리 일에 지장은 없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때리지만은 말아달라. 제발, 폭력만은 부탁이니 하지 말아달라. 그들, 우리는 그냥 일하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일이라서 자신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폭력을 견뎌낼 재간은 없다. 그런 것들까지 감내하기에는, 우리는 그냥 열심히 일하려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의료진의 일이란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쥐고 살리는 것이다. 공공의 안전을 걸고 혼곤한 밤중에 현장에 나와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사람이 죽어가는 공간에서 대표로 그 일을 맡아 하는 사람이 우리다. 우리가 쓰러지면 아무도 이들을 살릴 수 없다. 오히려 이들은 위기에 처하거나 죽을 수 있다. 그럼에도 폭력이 나쁜 것임을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생명이 중요한지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왜 우리가 맞아야 하는가. 왜 우리가 피를 뿜고 무릎을 꿇고 머리채를 잡히고 코뼈가 주저앉아야 하는가.

 

그러면 우리가 기댈 곳은 하나밖에 없다. 법이다. 법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에 기댈 수 있겠는가. 법이 아니라면 어떤 존재가 우리를 지켜줄 것인가. 그렇다고 우리가 그 많은 폭력을 가한 특정인을 찾아내 처벌을 바라고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처벌을 받으면 우리에겐 무엇이 좋겠는가.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그 강력한 선례가 있어야, 처벌이 알려져야만, 그나마 우리가 맞지 않을 수 있다. 앞으로 맞지 않는다는 보장만 있다면 누구든 처벌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게 가능하겠는가. 그래서 그를 위해서 우리는 이미 존재하는 법을 엄수해달라고 부탁한다. 법의 기능이 워낙 그런 것이다. 

 

허나 전례는 없다. 의료진을 폭행했다는 이유로 가중처벌을 받은 판례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평범보다도 못한 처벌을 받고 나오곤 한다. 그들은 영웅담처럼 술 취해 응급실에서 난동을 부린 일을 지껄일 것이다. 우리의 머리채를 쥐어 잡아도 약간의 불법적인 분풀이 대상인 셈이다. 분풀이 당해도 싼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약자의 폭력일 뿐이다.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의미의 흔한 일일뿐이다.

 

이것이 옳은가. 누군가를 때리지 말아달라는 말이 그렇게도 힘든가. 그 누군가도 평범한 사람이고, 그 사람의 신변으로 많은 사람들이 위태로워진다. 이에 대부분이 공감하고 사회적 함의가 있어 이미 법까지 제정돼 있다. 그것을 적용해서 그 사람들을 구해주는 일이 그렇게 힘든가. 모든 사람이 적어도, 응급실에 있는 의료진이 언제 주먹이, 언제 팔꿈치가, 언제 의자가, 언제 단도가 날아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진료하는 것이 옳다고 느끼는 것인가. 

 

공권력의 팻말 아래에서, 정확히 그 범죄를 저지르고 당당한 사내가, 정확히 그 팻말에 적혀 있는 처벌을 받는 것이 정의라고 나는 믿는다. 또한 이것은 특권의식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예의이자 공공의 안전이다. 우리 일이 공공의 안전과 관련되어 있으니, 일을 할 때만이라도, 제발, 때려서 방해하지만 말아달라. 

 

나를 포함한 의사 집단이 어떤 말을 들어도 괜찮다. 돈만 밝힌다는 소리를 들어도 괜찮고, 아픔을 헤아리지 못한다는 소리를 들어도 괜찮다. 워낙에 남의 직종은 이해하기도 힘들고, 몸이 아프면 읍소할 곳이 필요하다. 존경 같은 것은 바라는 바도 아니며 필요도 없다. 하지만 때리는 것만은 하지 말아달라. 직접 맞거나 옆에서 목격하거나 소식을 듣는 일들도 이제는 전부 지긋지긋하다. 

 

바라는 것은 하나다. 제발 때리지만, 때리지만 말아달라. 감옥에서 돌아와 죽이겠다고 하지 말아달라. 맞을 걱정 없이만 일하게 해달라. 절망적임을 알아도, 이렇게 부탁한다. 때리지만 말아달라.​ 

남궁인 응급의학과 의사 · ‘지독한 하루’ 저자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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