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재계 총수들이 법원의 판결에 따라 법적 또는 도의적 책임을 지고 속속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고 있다. 지난달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에서 이어 4일에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계열사 등기이사직을 사임했다. 또 이재현 CJ그룹 회장도 7개 주요 계열사의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난다.
과거 회장님들은 각종 비리로 구속되더라도 회사 경영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임원들이 구치소나 교도소를 방문해 각종 현안을 보고하고 결재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옥중 경영'은 옛말이 될 것 같다. 법원에서 선고를 받거나 재판 중인 대기업 총수들이 경영권에서 속속 손을 떼고 있다.
이미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모든 대표이사직에서 사퇴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그룹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특히 최 회장은 계열사 대표이사직에 이어 그룹 내 직급인 '회장' 직도 내놓기로 했다. 최 회장은 2012년 12월 그룹의 최고 의사 결정기구인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직에서 물러났지만 그동안 여전히 '회장'으로 불렸다.
이재현 CJ그룹 회장도 일부 계열사 등기이사직을 사퇴할 것으로 전해졌다. 이 회장 이외에도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인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과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등도 재판 판결에 따라 대표이사 사임 문제를 판단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국내 재계 순위 50위권 그룹 가운데 10곳의 오너가 횡령·배임 등 혐의로 재판을 받거나 검찰 조사를 받고 있어 경영에서 완전히 물러나는 인사는 더 나올 것으로 보인다. 오너가 창업했다가 최근 사실상 공중 분해된 STX그룹 같은 대기업도 있다. 포스코, KT 등 오너가 없는 기업을 제외하면 4개 그룹 중 1개꼴로 총수가 사법처리 위기를 맞거나 그룹 자체가 와해됐다.
오너가 옥중경영을 하지 않고 경영에서 손을 떼는 것은 법에 따라 아예 등기이사직을 맡을 수 없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지만 그보다는 국민의 정서를 고려한 결정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그만큼 대기업을 바라보는 국민의 눈높이가 높아지고 시민단체 등의 감시도 강화돼 더 이상 옥중 경영의 '꼼수'를 부리기 어려워졌다는 얘기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의 등기이사직 사퇴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횡령 등 중대 경제범죄로 징역형 이상의 선고를 받은 상태에서 경영자로서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할 경우 비판 여론이 확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삼성으로부터 완전 독립한 1996년부터 경영에 참여해 CJ를 성장시킨 이 회장은 이제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됐다. 현재 이 회장은 CJ·CJ제일제당·CJ CGV·CJ대한통운·CJ E & M·CJ오쇼핑·CJ시스템즈 등 7개 계열사의 등기이사를 맡고 있다. 이달 말 임기가 만료되는 계열사는 CJ E & M, CJ CGV, CJ오쇼핑 등 3곳이며 그외 4개사도 재선임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나기로 방침을 세웠다
이 회장의 경우 삼성그룹 분리 당시 식품회사에 불과하던 CJ제일제당을 홈쇼핑과 영화, 케이블방송, 물류 등으로 확장하며 그룹의 성장을 일궈내는데 주도적 역할을 해온 터라 이 회장의 부재가 그룹에 미치는 영향은 더욱 클 것으로 예상된다.
총수 부재 동안 SK그룹은 김창근 의장을 중심으로 꾸려진 수펙스추구협의회를 통해, CJ그룹은 이채욱 CJ대한통운 대표(부회장)를 지주사인 CJ(주) 대표로 겸직 발령하고 전문경영인 체제에 나섰지만 한계가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3세 경영 체제가 본격화하려면 다소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최 회장의 자녀는 장녀 윤정 씨가 25살, 장남 인근 군은 19살밖에 되지 않아 이들의 경영승계를 논하기도 무리다. 이 회장의 아들인 이선호(23)씨도 지난해 하반기 지주사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아직 본격적인 경영 참여는 어려운 상황이다.
이에 앞서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지난달 법원 판결에 따라 한화와 한화케미칼의 대표이사직을 내려놓았다. 이후 한화건설, 한화L&C, 한화갤러리아, 한화테크엠, 한화이글스 등 나머지 5곳의 계열사 대표이사직에 대한 사임서도 제출했다.
하지만 김 회장의 경우 건강이 회복된다면 언제든 경영 복귀가 가능한 상황이다. 또 장남인 김동관(31) 한화큐셀 전략마케팅실장이 그룹의 미래 성장동력인 태양광 사업을 주도하고 있고 최근에는 차남 김동원(29) 씨가 한화에 입사해 3세 경영이 본격화될 것으로 관측된다.
재계 관계자는 "SK그룹과 CJ그룹의 경우 오너 부재로 인해 신사업 추진과 M&A 등 주요 사업부문에서 경영 차질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며 "전문경영인 체제로는 한계가 있고 3세들의 나이도 어린 만큼 오너십의 위기를 쉽게 풀 수 있을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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