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나는 일본 도쿄 긴자의 미쓰코시 백화점 지하 3층 식품 매장 과일 코너의 수상한 사람이었다. ‘사쿠란보(체리의 한 종류)’를 들었다 놨다 하더니 ‘비파’ 앞에선 스마트폰으로 뭔가를 한참 들여다보고 있는가 하면, 부자에게 바치는 제단 같이 생긴 ‘선프룻츠(SunFruits)’ 코너 앞에선 고장 난 사람처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 CCTV로 나의 행적을 지켜보고 있었으리라 생각하면 얼굴이 달아오른다. 저 수상한 사람 아니에요.
사쿠란보는 인근 쓰키지 시장의 과일가게(많다)가 나쁘지 않은 품질에 더 저렴할 것이 떠올라 내려놨고, 비파는 평생 실물로 처음 보는 과일이라 일어로 ‘비와(びわ)’라고 쓴 것이 비파가 맞나 확인해봤을 뿐이다.
그리고 선프룻츠 코너에서는…. 맨해튼 5번가 티파니 매장을 쇼윈도 너머로 탐닉하듯 바라보던 오드리 헵번이 이런 기분이었겠지. 보석보다 정교하고 아름다운 과일들이 거기에 있었다. 향기로워 보이는 과일들이 너무나 아름답고 당장이라도 움켜쥐고 싶을 만큼 궁금했다.
백화점 식품 매장의 롤 모델로 한국에도 명성이 자자한 미쓰코시 백화점에선 일본 전국에서 ‘일본 제일의’ 식재료와 명물 음식들을 모아 놓고 있어 식품계의 오르세 미술관이라 할 만하다. 그 중에서도 과일 코너와 고기 코너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전시실’인데 한나절 정도는 물도 마시지 않고 구경만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초 프리미엄 과일만 모아둔 ‘특별 전시실’인 선프룻츠는 다이쇼 14년, 그러니까 1925년 창업해 역사를 이어온 전통의 과일 가게다. 미쓰코시 백화점 외에도 도쿄 곳곳에 과일을 중심으로 한 디저트 매장 등이 있다.
그날의 전시 작품은 다음과 같았다. 3만 2400엔(1만 엔은 10만 원가량이며, 기사에 표기된 가격은 모두 소비세 등 세금이 붙기 전의 가격이다)짜리 멜론, 1만 3392엔에 6개가 든 복숭아, 11개나 들어 있는데 1만 6200엔밖에 안 하는 비파(이때쯤부터 금전 감각이 완전히 교란되었다), 의외로 저렴해서 4320엔인 수박.
그리고 대망의 망고! 그 유명한 ‘태양의 알(太陽のタマゴ)’! 한국에서도 이미 화제가 됐던 바로 그 엄청 비싼 망고! 올해로 20주년을 맞은 일본 대표 명품 과일 브랜드! 올해 첫 출하된 태양의 알은 두 개에 무려 40만 엔에 낙찰됐는데 제철이 되니 엄청 저렴해져서 큼직한 한 알에 고작 1만 6200엔!
나는 이 망고가 궁금해 견딜 수 없었다. 보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먹어야만 했다. 하마터면 정신을 잃고 살 뻔했지만 가난은 본능이기 때문에 1만 6200엔 앞에서 멈출 수 있었다. 가난은 또한 필요이기 때문에 방법을 강구했다.
미쓰코시여, 선프룻츠여, 태양의 알이여. 그래봐야 너는 백화점. 그래봐야 너는 신선식품. 마감세일을 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저녁을 노렸다. 그리고 ‘득템’했다. 헐값이나 다름없는 3518엔에.
비즈니스호텔의 작은 접시와 조악한 플라스틱 포크, 숟가락으로 3518엔, 아니 망고의 붉은 껍질을 벗겨냈다. 의학 드라마의 과장된 수술 장면처럼 과즙이 터져 나왔다. 접시에 가득, 과즙이 연못을 이뤘다.
가격을 대폭 할인한 건 내가 산 망고가 그날 밤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끝까지’ 익었기 때문이었다. 향이 대단했다. 작은 호텔 방이 순식간에 열대의 망고 숲이 되어 있었다. 나는 농익어 달콤한 망고를 먹으러 온 원숭이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나는 어느새 큼직한 알맹이를 움켜쥐고 먹고 있었다. 팔목까지 과즙이 흘렀고 망고 숲의 원숭이는 한 방울도 놓치지 않고 핥아 먹었다. 호텔 방에 CCTV가 없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일단 얼마나 단가 하면, 체감상 16브릭스쯤은 되는 엄청난 당도다. 이제껏 먹어본 그 어떤 과일보다도 달다. 아이스크림보다 달다. 케이크만큼 달다. 익히 얘기를 들어서 달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게 전부는 아니다.
씨앗이 온 고향의 향이 아주 복합적으로 다가온다. 두리안, 타마린드, 패션프룻츠 같은 향, 고수 줄기와 뿌리, 씨앗의 향이 모두 들어 있다. 아주 잘 익은 사과의 산미와 당근의 단 향, 귤의 상큼한 산미와 감미까지 다 있다.
정작 화장품이나 향초, 음료에서 ‘망고 향’이라고 하는 향이나 맛이 뭉뚱그려서 느껴지지는 않았다. 모든 향이 제각각의 존재감을 조화롭게 발산해 하나의 망고라는 존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망고 향만 나지 않는 망고라니, 신기한 일이었다. 초집중 상태에서 숲 대신 나무를 본 듯하다.
이토록 맛있는 이유는 뭘까. 그리고 이토록 비싼 이유는 뭘까. 멋지게 디자인된 팸플릿을 읽어 봤다. 일단 완숙과이기 때문이다. 망고에 특별히 고안한 망을 받쳐 씌워놓고, 익어서 저절로 망에 딱 떨어질 때까지 기다린다.
설익은 것을 따서 후숙시키거나 유통하기 좋게 과육이 단단할 때 따는 것이 아니라, 농익어서 흐물흐물할 때까지 자연스럽게 시간을 주는 것이다. 가장 맛있을 때 망에 툭 안착한 망고는 그러니 가장 유통하기 위험할 때 수확인 망고이고 귀중하게 포장하긴 했어도 유통 중 찍히거나 무르거나 터져서 버리는 경우도 더 잦을 것이다. 필시 유통 중에 손상되는 망고까지 감안한 가격 책정일 것이다.
팸플릿의 농장 사진을 보니 망고 나무에 달린 과실 수 자체부터가 너무나 적다. 열매를 많이 솎아내고 남긴 열매에만 맛을 몰아준 것이다. 맛을 위해, 친절한 가격을 포기하고 장인정신을 도입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가격이 1만 6200엔이다. 과일 하나에 16만 원쯤 하는 것이 이상한가? 농부는, 농업은 장인정신을 이야기하고 걸작을 만들어내면 안 되는 일인가? 태양의 알이 나오기까지의 과정과 노력의 가치를 알고 나면 지극히 온당한 값이다.
그러나 굳이 알아야 할 일도 아니다. 순수예술같이 제한된 시장에서만 유통되는 이런 과일이 아니라도, 대량생산되는 현대의 팝아트적 과일만 해도 충분히 맛이 좋고, 만족스럽다. 그러니 남이 먹는 과일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스스로의 만족을 구매하시면 될 일이다.
다만 그날 밤 좁은 호텔 방에서 망고 숲의 원숭이가 먹었던 망고는 분명 그 비용을 감수하고 먹을 만한 과일의 명작이었다.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을 오르세에서 보는 것과 구글에서 보는 건 그만큼 다르지 않나요?
필자 이해림은? 패션 잡지 피처 에디터로 오래 일하다 탐식 적성을 살려 전업했다. 2015년부터 전업 푸드 라이터로 ‘한국일보’ 등 각종 매체에 글을 싣고 있다. 몇 권의 책을 준비 중이며, ‘수요미식회’ 자문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페이스북 페이지에서도 먹는 이야기를 두런두런 하고 있으며, 크고 작은 음식 관련 행사, 콘텐츠 기획과 강연도 부지런히 하고 있다. 퇴근 후에는 먹으면서 먹는 얘기하는 먹보들과의 술자리를 즐긴다.
이해림 푸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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