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한국인의 대표적인 ‘소울푸드’로 꼽히는 식품, 라면이다. 가정집부터 학교를 넘어 세계 유명 관광지까지 한국인이 있는 곳엔 라면 냄새가 풍긴다. 얼큰한 국물과 꼬들꼬들한 면이 어우러진 맛은 물론, 조리까지 간편해 훌륭한 간식일 뿐 아니라 한 끼 식사로도 손색이 없다.
라면이 국내 식탁에 뿌리를 내린 지 올해로 55년이다. 1960년대 당시 정부에서 실시한 ‘분식 장려운동’을 통해 크게 확산됐다. 쌀이 부족하던 시절 정부는 서울에 종합분식센터를 만들어 라면과 빵 소비를 권장했다. 한국인의 식탁에 빠지지 않고 올라오게 된 건 이때부터다.
세계인스턴트식품협회 통계를 보면, 한국인 라면 소비량은 1인당 연간 76.1개다. 세계 최고 수준이다. 국내 전체 소비 개수 면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식음료는 불황에 강한 품목인데, 라면은 이 가운데에서도 타격을 덜 입는 대표 품목이기도 하다. ‘제2의 쌀’이라는 별칭까지 붙은 이유다.
# 간편식 열풍이 잠식하는 라면 시장
그런 ‘라면 공화국’의 아성이 최근 무너지고 있다. 가정간편식(HMR, Home Meal Replacement) 시장이 무섭게 성장하면서부터다. 업계는 국내 간편식 시장 규모가 2017년 3조 원을 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1인 가구 증가와 함께 간단한 식사를 하면서도 건강을 챙기는 소비 트렌드가 생겨났고, 식품업체들이 공격적인 투자로 품질 개선에 나선 결과가 맞물렸다.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간편식은 라면 시장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 지난해 라면 주요 4개사 농심, 오뚜기, 삼양식품, 팔도의 매출을 합한 라면 시장 규모는 1조 9900억 원을 기록했다. 2016년과 비교해 2.7% 줄어들었다. 라면 시장이 역성장한 것은 4년 만이다. 2013년 처음 2조 원을 돌파했지만 다시 1조 원대로 내려앉았다. 식음료 업계 관계자는 “라면 시장은 정체기에 접어든 대표적인 품목 중 하나로 꼽힌다. 히트 상품도 나오지 않고 있고, 대체재(간편식)의 급성장으로 다시 성장하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국내 라면 시장은 농심과 오뚜기, 삼양, 팔도 등 소수의 기업이 사실상 과점하고 있다. 이들 업체의 점유율은 시장 전체 90% 이상이다. 라면이 이들 업체 전체 매출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성장 둔화가 뼈아프다. 특히 부동의 1위 농심과 그 뒤를 바짝 좇는 오뚜기의 고민은 더욱 깊다. 두 업체를 이끄는 CEO(최고경영자)들의 어깨가 무거운 이유다.
# ‘한국은 좁다’ 해외시장에서 돌파구 찾는 1등 농심
농심은 국내 라면 시장에서 압도적인 1위다. 삼양에 이어 후발주자로 국내 시장에 뛰어들었다. 1980년대 중반 ‘라면 스테디셀러’로 꼽히는 육개장 사발면, 안성탕면, 신라면, 짜파게티 등을 연달아 출시하면서 삼양을 밀어냈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라면 시장 1위 자리를 내준 적이 없다.
특히 신라면은 한국 라면의 대명사로 통한다. 1986년 출시된 이후 1991년 라면 판매량 1위에 오른 이후 여전히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15년엔 국내 식품 업계 단일 브랜드 최초로 누적매출 10조 원을 돌파했다. 당시 상위 5개 국내 식품기업 연매출(2014년 기준 11조 원)을 모두 합친 규모에 가깝다.
변화를 이끌어야 하는 건 박준 농심 대표이사 부회장이다. 신춘호 농심 회장의 아들 신동원 부회장과 함께 공동으로 대표이사를 맡아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1981년 농심 수출과에 입사해 미국지사장, 국제담당 이사, 국제사업총괄 사장을 역임하는 등 농심에서 ‘국제사업 전문가’로 통한다. 농심의 한 관계자는 “세계 시장에 신라면이라는 이름을 알리는 데 박 대표의 역할이 가장 컸다”고 평가했다.
박 대표는 해외 사업 경험을 토대로 국내 라면 시장 정체에 대응해 해외시장에서 돌파구를 찾고 있다. 지난해 해외 라면 판매 규모만 7400억여 원에 달한다. 농심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회사 설립 이후 처음으로 30%를 넘었다.
농심은 미국과 일본, 호주, 중국 등에 모두 7개의 해외법인을 두고 있다. 이 가운데 최근 눈길을 끄는 곳은 미국 시장이다. 미국 라면 시장은 세계 5위로, 중국 다음으로 중요한 곳으로 꼽힌다. 농심은 미국 라면 시장에서 일본 브랜드 두 곳에 이어 점유율 3위를 기록한다.
박 대표는 지난해 국내 식품 업계 최초로 미국 월마트 모든 점포에 신라면 입점을 성사시켰다. 월마트가 미국 전역에 판매하는 식품은 코카콜라와 네슬레, 펩시, 켈로그 등이다. 업계에선 “매출이나 영업이익 등을 떠나 농심과 신라면의 브랜드 입지가 크게 올랐다”고 평가한다. 최근엔 ‘아마존’의 무인점포에 ‘신라면 블랙’을 입점시켰다.
최근 회복세를 보이는 중국 시장과 일본, 호주 등에서도 유통망을 확대할 계획이다. 일부 국가에 있는 생산시설 라인을 늘리는 방안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 밖에 국내 라면 점유율 방어를 위해 새 제품 개발에도 박차를 가할 방침이다. 농심은 그동안 꾸준히 신제품을 출시했지만 최근에는 신라면이나 짜왕과 같은 히트상품이 나오지 않았다.
# 오뚜기가 아니다, ‘갓뚜기’다
오뚜기는 이강훈 대표이사가 진두지휘한다. 1977년 입사해 영업, 마케팅, 재무, 경영지원 등 주요 보직을 맡았다. 오뚜기 오너 일가이자 현재 회장인 함영준 오뚜기 회장과 같은 해 입사했다. 이 대표는 2008년 대표이사 부사장에 선임된 이후, 10년째 경영을 이끌고 있다.
이 대표는 오뚜기의 라면 시장점유율을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오뚜기 점유율은 2013년 15.6%에서 2017년 23%까지 꾸준히 올랐다. 아직 1위 농심의 절반 수준이지만 한때 업계에선 점유율 감소폭이 뚜렷한 농심을 오뚜기가 위협할 것으로 예상하기도 했다.
오뚜기의 한 관계자는 “이 대표는 그동안 ‘현재 가진 강점을 살려 성과를 내자, ‘오뚜기답게 일하자’는 취지로 직원들을 독려했다”며 “강조했던 부분들이 실적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오뚜기 대표 주자인 진라면이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 프로야구 선수 류현진을 내세운 광고의 효과가 컸다. 지난해 진라면 매출은 2000억 원으로, 오뚜기 전체 매출의 10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성장했다. 2015년 10월 선보인 진짬뽕도 연간 매출 450억 원을 올리며 오뚜기 매출에 기여한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오뚜기는 ‘3분 요리’ 브랜드와 마요네즈, 케첩 등 현재 국내 식품 시장에서 점유율 1위를 차지하는 제품만 약 30가지에 이른다. 라면이 이들 제품에 밀린다는 말도 있었지만 옛날 얘기다.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성장했다”고 말했다.
오뚜기의 국내 시장 점유율 확대 전략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농심과 삼양 등이 2016년 12월 원재료값 상승 등을 이유로 라면값을 올렸지만, 오뚜기만 동결을 결정했다. 업계에서 유일하게 10년 동안 가격을 올리지 않았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하반기엔 오뚜기가 가격을 인상할 가능성도 있지만, 가격 동결로 인해 점유율 측면에선 오뚜기가 다른 업체들보다 좋은 성과를 냈고 앞으로도 실적에 기여할 가능성이 높다. 라면 시장은 경쟁이 치열한 만큼 가격 인상에 소비자가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설명했다.
이 대표는 장수 제품을 변형·확장한 제품으로도 돌파구를 찾는다. 여름철을 대비한 국물이 없는 볶음면이나 비빔면 등이 대표적이다. 농심과 같이 오뚜기도 히트 상품이 수년간 나오지 않은 터라 제품 판매 회복과 확장에 초점을 맞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밖에 간편식 시장의 급성장에 따라 ‘3분 요리’ 브랜드, 즉석밥 등도 강화할 방침이다.
문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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