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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법] 대법원 심리불속행, 사법행정권 남용만큼 나쁘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사법행정권 남용 계기 사법개혁, 심리불속행 제도 개선 포함돼야

2018.06.11(Mon) 00:07:53

[비즈한국] 우리나라는 3심제를 원칙으로 한다. 법원조직법에 그렇게 규정돼 있다. 헌법에도 법원은 최고법원인 대법원과 각급법원으로 조직된다고 명시돼 있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마지막 재판은 대법원이 관할해야 한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안다. 

 

물론 헌법재판소가 어느 사건이나 막론하고 차별 없이 모두 대법원에 상고할 수 있다는 취지는 아니라고 판단했지만, 소송을 제기하는 국민들 입장에서는 서로 합의하여 조정하거나 하급심 판결에 승복하지 않는 한 ‘대법원까지 간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상당하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 1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자택 인근에서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임준선 기자


그러나 대법원 판단을 받아 본 대다수 국민들은 우리나라가 ‘2심제’라고 생각한다. 이는 단지 대법원에서 항소심 판단이 뒤집힐 가능성이 적다는 의미에서 그런 것이 아니다. 대법원 사건의 상당수가 아무 이유도 적지 않은 ‘종이 한 장’으로 결론이 나기 때문이다. 이를 ‘심리불속행’ 제도라고 한다. 

 

소송이 만능은 당연히 아니지만, 적어도 재판에서 질 경우에는 그 이유라도 알고 싶은 것이 소송을 제기한 사람의 솔직한 심정이다. 그런데 마지막이라고 기대한 대법원에서 아무 이유도 기재하지 않고 소송에서 졌다고 하니 국민들이 이를 승복하기 어렵다는 것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법원에 대한 불신이 생길 수밖에 없다.

 

대법원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다. 대법원은 법률심이고, 심리불속행도 판결 전에 상고이유를 충분히 살핀다고 한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대법관 수가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장을 제외한 12명에 불과한 반면, 대법원 접수 본안사건 수가 4만 건이 넘는다는 데에 있다(2016년 접수된 상고심 사건은 4만 3694 건). 즉 대법관 한 명이 1년에 3000건 이상 처리한다. 물리적으로 제대로 된 재판을 기대할 수 없는 구조다.

 

그렇지만 인지대 등 비용을 내가면서 최고법원의 재판을 받고자 하는 국민들에게 현 제도는 가혹한 측면이 있다.

 

지난해 ‘사법연감’ 등에 따르면 2017년 대법원이 처리한 민사 본안사건은 모두 1만 3362건. 이 가운데 77.2%에 해당하는 1만 322건이 심리불속행 기각으로 종결됐다. 더 큰 문제는 이 같은 기각률이 계속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2013년 51.7%를 기록한 심리불속행 기각률은 2014년 54.5%, 2015년 60.7%, 2016년 70%로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다른 사건들도 마찬가지다. 가사 본안사건의 기각률은 무려 86.8%에 달하며, 행정사건도 76.4%에 이른다. 

 

최근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사법행정권 남용이 적나라하게 기재된 문서가 공개됐다. 대법원 정책에 반대하는 판사에 대한 재산조사, 청와대의 입맛에 맞는 판결들을 거래하려고 한 의혹 등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다. 

 

이 모든 것에 ‘상고법원’이 언급된다. 양 전 대법원장이 상고사건의 폭증을 상고법원으로 해결하려고 추진한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필자도 당시 상고법원이 최선은 아닐지라도 심리불속행 폐지가 전제되었기에, 적어도 국민들이 실질적으로 판사로부터 3심제를 적용받을 수 있다고 믿었기에 찬성한 사실이 있다. 

 

대법원이 이 과정에서 사법행정권을 과도하게 남용한 의혹이 불거진 것이다. 더 나아가 상고법원 도입이 좌초되면 민변 등 진보세력이 대법원 증원론을 대안으로 내세우며 최고법원 입성을 시도할 것이라는 보고서 내용으로 미루어, 실제로는 상고법원 도입이 목적이 아니라 대법원구성의 다양성을 외면하고 보수화된 목소리만 내는 대법원을 구성하려고 한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양 전 대법원장 시절은 사법부 역사의 커다란 오점으로 남게 될 것임은 명백해졌다.

 

사법갈등 해소기관으로서 법원의 신뢰 붕괴는 대통령 탄핵만큼 심각한 일이다. 이 사태가 어떻게 해결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다만 분명한 점은 이제 제대로 된 사법개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중에는 대법원 상고사건의 해결도 포함되어야 한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지난해 9월 취임사에서 급증하는 상고사건을 해소하고 상고심의 기능을 정상화하기 위하여 상고허가제, 상고법원, 대법관 증원 등 여러 방안들을 보다 개방적인 자세로 검토하고 사회 각계의 의견을 두루 수렴하겠다고 했다. 

 

이제 상고법원은 더 이상 논의하기 불가능해진 만큼 상고허가제 아니면 대법관 증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터. 3심제를 제약하고 이미 과거에 시행되었다가 폐지된 적이 있는 상고허가제보다는 대법관 증원론이 국민들에게 보다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싶다. 

 

아무 이유도 기재되지 않는 종이 한 장짜리 최고법원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 

김한규 변호사·전 서울지방변호사회장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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