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얼마 전 ‘조선일보’는 “미국, 때론 우리를 배신했다”는 훌륭한 사설을 게재했다. 전적으로 옳은 말이다. 국제정치 무대에서는 가끔 동맹국을 배신하는 일도 벌어진다. 그렇다면 만약 잠재적인 적국, 나아가 휴전 당사자를 배신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조선일보 필자가 문제 삼는 지점은 미국 대통령이 단시일 내 일괄 폐기를 포기하고 북한이 주장한 대로 ‘단계적 폐기’로 후퇴한 듯하다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국제정치의 상식을 모두 폐기하지 않는 한 일괄 폐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오는 6월 12일, 종전선언에 대한 기대가 무르익고 있지만 이 또한 쉽지는 않을 것이다(휴전 당사자인 중국을 무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종전 선언이 나오더라도 그것은 빅딜의 시작일 뿐 빅딜 자체는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트럼프가 “북한과 다시 만날 수 있다”, “정상회담은 과정이자 시작”이라고 말한 것은 나에게는 최상으로 보인다.
생각해보자. 자율적인 상거래라면 무조건 쌍방이 이득을 얻는다. 극단적인 경우 기근이 들면 쌀값이 금값이 되지만, 금을 가지고 죽느니 쌀로 바꿔먹고 살아남는 것이 낫다. 경쟁 시장에서 쌀을 산다면 약간의 가격 조정이 일어날 뿐이다. 이런 것이 ‘좋은 것을 서로 얻는 것’, 흔히 말하는 상품 거래(good trade)다. 안타깝게도 무기는 본질적으로 나쁜 것(bad, 逆상품)이라, 비핵화는 ‘나쁜 것을 없애는 거래’다. 좋은 것을 얻는 거래는 쌍방이 자연스럽게 참여한다. 그러나 나쁜 것을 없애는 거래는 정반대다.
여기 카우보이 둘이 총을 들고 있다. 어떤 놈이 좋은지 나쁜지는 상관하지 말고 서로 잘 모르는 이들이라 하자. 양보해서 나는 착한 이라고 해보자. 상대가 악당일지도 모르는데 내가 먼저 총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상대가 총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불안하여 협상에 들어간다. “하나 둘 셋을 세고 함께 총을 내려놓자.” 하지만 한 번에 총을 내려놓을 수도 없다. 왜 그런가? 내가 내려놓는 순간 녀석이 마음 놓고 나를 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나쁜 것 내려놓기는 대개 둘을 동시에 아는 중개자가 개입해야 한다. “내가 그를 알아. 내가 보증한다. 함께 총을 내려놓자.”
이번 북미 협상은 한쪽만 총을 내려놓는 협상이라 더 어렵다. “총을 내려놓으면 내가 너에게 밥을 사주지. 너는 배가 고프잖아.” 그러나 생존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신중한 이라면, “배고파도 죽기는 싫어”라고 대답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훌륭한 사설이 밝혔듯이 미국은 동맹국도 배신한다. 여기서 중개인이 다시 개입할 수 있다. “나를 봐서 미국의 선의를 믿어줘.”
하지만 ‘한쪽이 나쁜 것 내려놓기’ 거래는 중개인의 보증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먼저 당사자 간의 신뢰가 쌓이고, 그 신뢰를 보증할 당사자끼리의 담보물이 있어야 한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무기를 완전히 버려도 공격당하지 않을 조치가 필요하다. 미국인이 북한에 사는 것이 가장 좋지만 이것은 희망일 뿐이고, 그 희망을 달성하기 위해 계속 만나면서 신뢰 쌓기 놀이를 해야 한다.
신뢰 쌓기는 우세한 나라가 시작해야 한다. 내 연구 분야에서 옛날 진(秦)나라의 상앙이 겉으로 휴전하자고 하다 위(魏)나라를 기습한 일, 장의(張儀)가 땅을 떼어준다 하고 초(楚)-제(齊) 동맹을 깬 후 배신한 일, 진왕이 화씨벽을 주면 성을 대가로 준다고 조나라 인상여에게 사기를 친 일 등 큰 나라가 약속을 어긴 경우를 수없이 보았지만 그 역은 거의 보지 못했다.
미국이 진나라처럼 사기꾼이거나 북한이 정직한 피해자라고 말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진나라 임금이 나빴던 것이 아니라 ‘국익을 위해’ 그랬을 뿐이다. 미국도 국익을 위해 판단한다.
되물어보자. 하지만 민주주의국가 미국의 국익은 자국민의 안전이 아닌가? 그렇다. 선량한 미국인은 대개 비핵화를 지지할 것이다. 그리고 미국인은 분명 대부분 선량하다. 그러나 미국 내에서조차 총기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수가 선량해도 진짜 악당이 몇 명만 숨어 있으면 ‘나쁜 것 내려놓기’ 협상의 추진력은 급격히 약해진다. ‘정작 악당들이 총을 가지고 있는데 선량한 내가 총을 내려놓고 가족을 방치하라고?’ 심지어 더 선량한 아버지가 총기에 집착할 수도 있다. 트럼프 자신이 학원의 총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사를 무장하자고 한 사람이다. 선량한 사람들 속에 숨어 있는 진짜 악당은 ‘나쁜 것’을 팔아먹는 이들이다. 그들에게는 도덕이 없다. 대한민국은 미국산 무기의 최대 수입국 가운데 하나다. 그들은 가장 강력한 이해 당사자이기에, 소수지만 협상을 무력화시키는 힘이 있다. 볼턴도 그런 자다.
오늘날 선량한 다수는 밥벌이에 바쁘다. 그래서 협상이 반복되어야만 선량한 다수가 인지하고 소수 훼방꾼의 정체가 드러난다. 선량한 다수가 인지하면 협상 당사자들도 이치와 도리를 따지게 된다. 북한을 이치와 도의의 무대로 불러내는 것은 반복적인 접촉뿐이다. 이치와 도리를 논하면, 말이 반복되면, 협상을 통해 신뢰가 고양된다. 부엌에 시퍼런 칼이 수두룩해도 세상에 자기 아내를 무서워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필자 공원국은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중국지역학을 전공했으며, 중국 푸단대학교에서 인류학을 공부하고 있다. 생활·탐구·독서의 조화를 목표로 십수 년간 중국 오지를 여행하고 이제 유라시아 전역으로 탐구 범위를 넓혀, 현재는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서 현지 조사를 수행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춘추전국이야기 1~11’, ‘옛 거울에 나를 비추다’, ‘유라시아 신화기행’, ‘여행하는 인문학자’ 등 다수가 있다.
이 연재에서는 먹고 살아가는 행동(경영)을 하면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을 천(天)/지(地)/인(人) 세 부분으로 나눠, 고전을 염두에 두고 독자와 함께 고민해보고자 한다.
공원국
작가·‘춘추전국이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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