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밤과 아침의 풍경은 판이하게 달랐다. 늦은 밤, 공항에 도착해 임시 거처까지 이동하며 봤던 모습이 베를린에 대한 첫 인상이었겠지만, 다음 날 아침이야말로 강렬한 첫인상으로 새겨졌다.
시차 극복을 위해 쳐놓은 암막커튼을 걷어낸 순간 주위는 온통 초록이었다. 그냥 초록도 아닌 눈이 부신 초록. 집을 구하기까지 두 달간 임시로 살았던 동네가 우리나라로 치면 판교쯤 되는 단독주택 단지다. 집집마다 정원에 온갖 나무와 꽃이 가득한 모습을 보면서, 상상했던 베를린과는 전혀 다른 베를린에 와 있음을 느꼈다.
동네를 걸을 때면 여기가 숲인지 마을인지 헷갈릴 정도로 울창한 나무숲이 드리워져 있었다. 베를린에 2500개 이상의 공원과 정원이 있고, 독일에서 가장 높은 녹지 비율을 자랑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한국이라면 일부러 찾아가서 볼 풍경이 흔한 일상이라니.
나는 감탄했다. 물과 녹지가 어우러진 ‘어반(urban) 정글’이라고 표현한 베를린 관광 공식 홈페이지의 말이 괜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다.
‘도심은 좀 다르겠지’ 생각했다. 여의도 면적의 4분의 1에 달하는 티어가르텐(베를린 중앙에 있는 큰 공원)이 도심 한복판을 가로지르긴 하지만, 높은 빌딩과 보눙(아파트)이 밀집한 도심은 여느 대도시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예상은 절반은 맞았고 절반은 틀렸다. 도시 외곽에서 마주한 숲과 같은 거리는 흔치 않지만, 건물마다 형형색색 꽃과 식물 옷을 입고 있으니 말이다.
독일인들의 식물 사랑은 대단하다. 오후 4시면 해가 지고 아침 9시가 넘어야 해가 뜨는, 해가 떠 있는 동안에도 쨍쨍한 햇빛을 만끽하기 어려운 5개월여의 겨울이 끝난 뒤,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각종 식물과 꽃 화분으로 테라스를 꾸미기 시작했다. 그 겨울을 어떻게 참았나 싶을 정도다.
먼저 독일 생활을 시작한 지인이 “봄이 되면 누가누가 잘하나 경쟁하듯 가드닝을 한다”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각종 식물을 판매하는 화원이나 작은 수목원 규모를 방불케 하는 가드닝 용품 전문점이 왜 그리 많은지, 슈퍼마켓마다 화분과 씨앗, 흙과 비료를 왜 그렇게 쌓아놓고 있는지 이해가 됐다. 이곳에서 가드닝은 특별한 취미가 아니라 의식주만큼 일상적인 삶의 부분이다.
봄이 무르익으면서 꽃은 만개하고 집집마다 테라스 가드닝 경쟁도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길을 걸으며 그 광경을 보노라면, 건물에서 식물과 꽃이 자라나는 거대한 설치미술의 향연을 보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한 집 한 집 개성을 드러낸 가드닝을 구경하는 재미에 빠져 위를 올려다보며 걷는 버릇도 생겼다. 텅 빈 테라스라도 발견할 때면 ‘저 집엔 누가 살기에?’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쯤 되니 나 역시 테라스 가드닝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에서 이런저런 식물을 키우다 ‘내 손은 똥손’임을 깨달은 뒤 포기하고 살았지만, 다른 집들을 보면서 뭐라도 키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의무감에 시달렸다고나 할까. 작지 않은 테라스가 두 개나 있는데도 그 흔한 화분 하나 없던 우리집엔 그리하여 얼마 전부터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물론, 가드너 자질에 대한 의심이 남은 터라 식물 선택은 철저히 실용 위주로 골라 토마토, 깻잎, 고추 같은 식용작물로 채웠다. 다채롭기 그지없는 다른 집 테라스에 비하면 초라한 수준이지만,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베를린에서 맞는 첫 봄, 가드닝의 시작은 미미했지만 내년, 내후년 우리집 테라스도 여느 베를리너의 그것처럼 많이 달라져 있지 않을까.
글쓴이 박진영은, 방송작가로 사회생활에 입문, 여성지 기자, 경제매거진 기자 등 잡지 기자로만 15년을 일한 뒤 PR회사 콘텐츠디렉터로 영역을 확장, 다양한 콘텐츠 기획과 실험에 재미를 붙였다. 지난해 여름부터 글로벌 힙스터들의 성지라는 독일 베를린에 머물며 또 다른 영역 확장을 고민 중이다.
박진영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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