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가상현실(VR) 시장은 기대만큼 쉽게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 한번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VR의 잠재력을 인정하는 분위기지만, 선뜻 지갑을 열진 않는다.
여기에는 여러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다. 무엇보다 선두에 서서 시장을 접수하겠다는 의지와 자본력을 갖춘 기업이 없다. 비슷한 예로 태블릿이 있다. 태블릿은 당초 PC를 대체할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지만, 그만큼 성장하지 못하고 정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블릿이 전자매장 한편에 어엿하게 자리를 차지하는 이면에는 아이패드를 내놓은 애플의 역할이 컸다.
현재 VR 시장을 개척하는 기업으로는 ‘오큘러스’가 꼽힌다. 오큘러스는 지난 2014년 페이스북에 20억 달러(2조 1610억 원)에 인수되며 급부상했다. 하지만 수익성 악화로 인해 그간 공격적인 투자나 마케팅 등 이렇다 할 카리스마를 보여주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특히 599달러(71만 9000원)라는 대중적이지 않은 출고가로 오히려 비난 여론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러한 가운데 내놓은 제품이 바로 지난 5월 1일 출시된 독립형 VR 기기 ‘오큘러스 고(Go)’다. 과연 오큘러스 고는 시장 판도를 바꿀 게임 체인저(Game Changer)가 될 수 있을까.
# 연습은 ‘삼성’, 실전은 ‘샤오미’
오큘러스는 PC용 VR 기기인 ‘오큘러스 리프트’를 정식 출시하기에 앞서 개발자 버전(DK)을 두 번이나 출시하며 완성도를 높여나갔다. 정식으로 판매할 수준의 완성도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개발자들을 위해 소량 판매를 이어나가며 시장 반응을 타진하려는 전략이다.
이와 함께 모바일용 VR 기기는 삼성전자와 협업해 ‘기어VR’이라는 이름으로 선보였다. 초창기 기어VR 역시 ‘이노베이터 에디션(Innovator Edition)’이라는 부제를 달아 아직 정식 제품이 아님을 강조했다. 삼성전자 입장에서도 갤럭시 시리즈에 차별화된 강력한 액세서리가 생긴다는 점에서 손해 볼 것 없는 거래였다. 이후 매년 후속작이 나오면서 꼬리말은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오큘러스 고’는 오큘러스가 내놓은 세 번째 VR 기기다. 기어VR이 반드시 갤럭시S 혹은 갤럭시노트가 필요한 액세서리 수준의 제품이라면, 오큘러스 고는 독립적으로 사용이 가능한 모바일 VR 제품이다. 물론 스마트폰과 연동이 필수지만, 아이폰과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모두를 지원한다는 점에서 제약은 훨씬 덜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점은 ‘왜 오큘러스가 샤오미와 손을 잡았는가’다. 무엇보다 가격이다. 당초 많은 기대를 모은 ‘오큘러스 리프트’의 실패 요인으로 대부분 전문가들이 현실성 없는 가격을 지적한다. 70만 원이 넘는 가격에 100만 원이 훌쩍 넘는 고성능 최신 PC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오큘러스가 오래 협업한 삼성이 아닌 샤오미와 손을 잡은 이유도 이러한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오큘러스는 샤오미의 강력한 원가 절감 생산 능력을 바탕으로 오큘러스 고의 출고가를 32GB 모델 기준 199달러까지 낮췄다. 국내 출시가는 23만 8000원으로 책정됐다.
오큘러스 고는 스마트폰에 쓰는 것과 같은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인 스냅드래곤 821과 3GB 메모리 그리고 내장 배터리를 탑재했다. 통신 기능 역시 스마트폰과 거의 같다. 성능만 보면 중상급형 스마트폰과 맞먹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격을 이토록 낮출 수 있었던 이면에는 샤오미의 협력이 절대적이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여기에 샤오미를 통한 거대한 중국 시장 공략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덤이다.
# 구원투수 ‘넷플릭스’의 역할
하드웨어가 시장에 안착하기 위해서는 킬러 콘텐츠가 반드시 필요하다. 기기 그 자체로는 아무런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게임, 업무용 프로그램, 방송, 영화, 스포츠 중계, 성인물 등 무엇이든 필요하다.
초창기 VR의 킬러 콘텐츠로는 게임이 지목됐다. 이는 오큘러스를 창업한 팔머 러키 전 CEO(최고경영자)가 광적인 게이머였다는 점과 플레이스테이션 사업을 하는 소니가 일찌감치 VR에 팔을 걷어붙인 것과도 무관치 않다. 물론 비공식적으로는 성인물도 은근한 기대를 받았다.
하지만 게임은 장시간 사용 시 쉽게 피로감을 느끼는 VR과는 궁합이 의외로 맞지 않았다. 더욱이 게임은 화면 전환이 빨라 다른 콘텐츠에 비해 어지럼증이나 피로감이 더 빨리 찾아온다. 오큘러스, 그리고 모회사 페이스북은 ‘오큘러스 고’를 내놓으며 다른 지원군을 등에 업었다. 바로 넷플릭스다. 넷플릭스는 현재 미국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보는 주문형 스트리밍 동영상 서비스다.
물론 넷플릭스는 TV나 스마트폰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주변의 방해를 받지 않고 온전히 영상에 몰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오큘러스 고와도 제법 어울린다. 실제로 제품을 써본 사용자 사이에서도 호평이 나온다. 물론 넷플릭스가 VR용 영상을 직접 제작하거나 혹은 제공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넷플릭스 역시 VR이 가진 가능성은 인정하고 한 발 걸친 분위기다.
# 페이스북은 과연 콘텐츠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지속 가능한 콘텐츠 생태계다.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CEO는 지난 5월 2일 열린 컨퍼런스에서 오큘러스 고를 위한 1000여 개의 전용 앱이 있다고 강조했지만, 스마트폰 앱 마켓과는 비교조차 어려운 적은 숫자다. 그렇다고 질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는 것도 아니다다. 한 마디로 걸음마 단계다.
페이스북이 오큘러스 인수를 결정했을 때만 해도 어마어마하게 다양한 해석과 기대가 쏟아졌다. 이제 페이스북이 가상현실 커뮤니티로 바뀌는 것 아니냐는 농담 같은 분석까지 나왔다. 이후 VR 시장에 대한 관심이 한풀 꺾이면서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고 오큘러스를 위협할 만한 혁신적인 경쟁자도 등장하지 않았다.
이러한 가운데 오큘러스 고는 ‘카드보드’로 불리는 체험 수준의 VR 기기를 제외하면, 가장 경쟁력 있는 가격을 갖춘 제품이다. 일단 디딤돌은 놓은 셈이다.
하드웨어의 판매를 견인할 콘텐츠 생태계 조성이 먼저냐, 아니면 콘텐츠 생태계 조성을 위해 손해를 감수하면서라도 하드웨어 판매를 확대하는 것이 먼저냐. 전 세계 기술 산업 역사에서 계속 반복된 딜레마다. VR 업계에서 오큘러스 고의 등장이 크게 주목받는 이유다.
봉성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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