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폴란드가 어디였더라, 살짝 찾아 봤다. ‘바르샤바’라는 익숙한 도시 이름을 보고서야 위치가 이해됐다. 독일과 체코의 동쪽,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와 동쪽 국경을 맞댄, 중부 유럽 국가. 세계사나 세계지리 과목에서 배운 적은 있지만 경험적 거리도, 정서적 거리도 아직은 머나먼 나라. 허나 단지 “쇼팽”만 말하면 더 빨리 캐릭터를 기억해낼 수 있었을 것 같은 나라. 2015년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쇼팽 콩쿠르’ 우승을 한 곳이 바로 쇼팽의 고향인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다.
한남동의 비스트로 ‘반(Barn)’에서 지난 10일 그 낯선 나라의 17세기 음식을 재현해 맛보는 자리가 있었다. 잘 모르는 나라의, 게다가 오래 전 음식이라니 꽤나 난해한 경험이 되리라 예상하고 참석했지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기대(?)보다 훨씬 더 알기 쉬운 음식이었다. 또한, 공통의 고민거리를 좀 더 생각해볼 힌트들을 색다른 경험을 통해 얻게 된 기회이기도 했다.
마치에 노비츠키(Maciej Nowicki) 셰프가 제주도에서 열리는 미식 행사 참가 차 한국을 찾은 때에 주한폴란드대사관에서 그의 음식들을 기자, 인플루언서들에게 선보였다. 마치에 셰프는 전 폴란드 국왕이었던 얀 3세 궁전 박물관의 총괄 셰프 겸 요리사 연구가로 있다.
역사 속 폴란드 음식을 재해석하며 다양한 요리를 창의해내는 요리사의 일과, 학생들에게 요리 역사를 가르치고 앞으로의 방향을 제시하는 연구자로서의 일 두 가지를 함께 하는 셈이다. 그의 연구소 격인 폴란드 궁전 박물관 ‘빌라 인트라타(Villa Intrata)’에서 시대 요리에 필요한 토종 식물까지 경작하고 있다니, 그 타임머신 같은 연구소 식탁 풍경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폴란드 음식은 지정학적 위치 그대로 러시아, 서유럽 사이에서 음식을 공유하기도 하고 절충하기도 한다. 폴란드식 만두인 피에로기(perogi)는 러시아의 피로시키(piroschki)와 거의 같고, 비고스(bigos)는 동물성, 식물성 재료를 있는 대로 넣고 끓인 스튜로 유럽 끝에서 끝까지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요리다. 여기에 시큼하게 절인 양배추가 들어간다는 점에서 접경국인 독일과의 공통점도 물론 나타난다.
1년 중 200일 동안 고기를 금하는 시기도 있었던 폴란드는 당시 생선 요리로 전 유럽에서 명성이 높았다는 것으로부터 마치에 셰프의 폴란드 요리 역사학 강의가 시작됐다. 미식에 대한 굉장한 자부심을 가진 프랑스에서도 클래식한 레시피로 폴란드의 생선 요리 레시피를 칠 정도였다니, 바로크 시기 궁중요리로부터 발전했다는 폴란드 음식문화의 높은 수준은 모르던 사람만 몰랐던 셈이다.
이국적인 다양한 재료로 향을 풍부하게 내는 것이 특징이고, 식초 제조가 발달해 신맛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것도 중요한 특색이다. 참고로 폴란드의 전통 식초는 80가지 이상이라고 한다. 기름진 러시아 음식과 육즙 가득한 독일 음식 사이의 17세기엔 이런 상큼한 음식이 숨겨져 있었다니, 반가운 발견이다.
천연 요구르트와 비트, 오이, 무로 만든 차가운 수프부터 시작해 몇 가지 복원 요리도 경험할 수 있었다. 시큼할 정도로 신맛을 아낌없이 사용한 부드러운 질감의 수프에선 아삭아삭하게 절여진 채소가 청량감을 더했다. 생강 육수에 재운 연어 요리는 샤프란으로 색을 입히고 생강과 파슬리 뿌리를 향신료로 쓴 뒤 레몬주스로 상큼함을 더하기도 했다.
정말 특별했던 것은 오리 요리였는데, 레드와인과 시나몬, 꿀, 버터로 만든 소스를 끓인 후에 오리 고기를 넣고 그대로 재워둔 특이한 조리법을 사용했다. 육류를 맛과 향을 낸 소스에 넣고 오래 끓여 부드럽게 조직을 풀어먹기 쉽게 한 것이 보통의 스튜 종류인데, 오래 가열하는 대신 반대로 불을 꺼서 더 이상의 조리를 멈추고, 소스가 식는 동안 고기에 배어들게 한 건 정말이지 독특한 방법이다.
강한 불에 겉을 지져서 속의 촉촉함을 남기는 구이, 즉 스테이크와도 또 다른데 비주얼은 마치 수비드를 한 것처럼 매우 촉촉하고, 육색이 붉은 톤으로 살아 있으며, 겉에서는 짙은 소스가 단단히 밀착되어 마치 태운 듯한 색을 냈다.
또 디저트는 우유와 달걀노른자, 세몰리나 밀가루, 아몬드 가루, 라임 주스, 꿀을 이용한 일종의 브레드 푸딩. 몽글몽글하게 굳은 질감이 토핑으로 뿌린 피스타치오, 딸기와 대비를 이룬다. 라즈베리 식초로 한층 더 새콤한 맛을 냈다.
하이퍼 리얼리티 같은 일이긴 했다. 폴란드 음식만 해도 낯선데, 거기서도 17세기 음식을 서울의 중심에서 맛보고 있다는 것은 시간, 공간 여행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낯설지만, 낯설지 않았다. 모든 책과 영화 속의 시간여행자가 처음엔 어리둥절하다가도 결국엔 적응하지 않던가.
그저 음식이었고, 결국 맛, 향, 질감, 재료, 조리…. 지구상에 존재해온 음식문화의 색다른 집산일 뿐이었다. 누구나 어디선가 한 번씩은 꼭 먹어봤던 요소들이 다소 색다르게 조합되어 있을 뿐이다. 인류의 먹보적 상상력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 밖에선 각자의 좌표에서 창의성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뭐 그리 놀랄 일이라고.
침착하게(?) 마치에 셰프의 일에 대해 좀더 찾아보다가 어느 인터뷰에서 이런 멋진 구절을 발견했다. 한 마디로 “역사와의 이혼”. 폴란드의 마치에 셰프와 마찬가지로, 오래된 조리서나 옛날 신문에 나온 맛이란 실로 우리에게 있어서도 고약한 문제다.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겪고 재건에 매달리느라 20세기를 탈탈 소진했기에 한식 역사는 연속성 있게 이어질 여건도, 빠르게 회복될 기회도 갖지 못했었다. 진정으로는.
마치에 셰프는 한국의 음식사가들이 겪었고, 냉면이나 곰탕 등 몇몇 음식들을 통해 나 또한 고심하고 있는 문제인 ‘고증과 재현’에 대해 나름의 답을 내리고 있다. 인터뷰의 그의 이야기를 요약해 옮기자면 이렇다.
“옛날 그 맛에 가깝게 나타내는 것은 가능하지만, 재현은 불가능하다.기록된 레시피가 정확하지 않고, 중량도 부정확할 수 있으며, 식재료 자체도 아주 달라졌으며, 당시에 추구하던 요리의 지향점이 지금의 지향점과 아주 다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맛의 본질은 간직하되, 맞지 않는 것은 현명하게 버리거나 바꾸는 등 더 나은 선택을 할 수도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역사와의 이혼’이라는 통쾌한 표현으로 대신한 ‘복원’의 정의다.
필자 이해림은? 패션 잡지 피처 에디터로 오래 일하다 탐식 적성을 살려 전업했다. 2015년부터 전업 푸드 라이터로 ‘한국일보’ 등 각종 매체에 글을 싣고 있다. 몇 권의 책을 준비 중이며, ‘수요미식회’ 자문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페이스북 페이지에서도 먹는 이야기를 두런두런 하고 있으며, 크고 작은 음식 관련 행사, 콘텐츠 기획과 강연도 부지런히 하고 있다. 퇴근 후에는 먹으면서 먹는 얘기하는 먹보들과의 술자리를 즐긴다.
이해림 푸드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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