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은행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북한 경제재건 논의와 관련해 각종 금융 지원은 물론 민간투자까지 활발히 거론되면서 국내 은행들의 역할이 주목받고 있기 때문이다. ‘세기의 핵 담판’이 성공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지만, 국책은행과 시중은행들은 벌써부터 전략 마련에 분주한 모습이다.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완전히 폐기하는 데 동의하면, 미국 민간부문이 북한에 투자하는 것을 허용하겠다.”(13일 폼페이오 미국 국무부 장관)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폼페이오 장관의 발걸음은 더 바빠졌다. 대규모 경제 지원에 민간 투자라는 파격 카드도 꺼내들고 북한의 경제 개발을 적극 돕겠다는 뜻을 시사했다. 북한 에너지 인프라와 사회기반 시설 개발, 농업 부문 지원 등 구체적인 방향까지 설명하면서 “북한이 한국에 비견되는 번영을 누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 ‘최대 1241조 원’ 대규모 경제협력 전망
돌출변수에도 남-북-미 화해 분위기가 계속되면서 국내 은행권은 기대감을 감추지 않는다. 경제협력에서 금융 지원은 필수적이다. 규모도 크다. 최근 금융당국과 전문기관 분석에 따르면 북한 경제재건 비용은 150조 원에서 1241조 원까지 다양하다. 2014년 금융위원회는 북한의 철도, 도로, 전력 등 인프라 수요가 총 1400억 달러(150조 원)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KDB산업은행 KDB미래전략연구소는 기간에 따라 10년 428조 원, 20년 705조 원, 30년 1241조 원이 필요할 것으로 추산했다.
자금 조달 방식과 규모는 각종 변수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지만 은행 역할이 커지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은행권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한 국책은행 관계자는 “국가 전체를 다시 세우는 사업이다. 더 지켜봐야 하지만 경제협력이 실제로 진행되면 정책금융과 함께 민간 투자도 대규모로, 활발하게 투입될 것으로 전망된다”며 “은행은 금융 주선 및 주관사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은행들은 다양하게 거론되는 경제협력 방안 가운데 특히 사회간접자본(SOC) 개발 사업에 주목한다. 남북 정상이 서명한 4·27 판문점 선언에 동해선 및 경의선 철도와 도로를 연결하고 현대화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는데, 이 사업이 남북 경제협력 사업 가운데 가장 먼저 추진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은행들은 그동안 각자 쌓아온 투자 노하우를 살리는 동시에 인프라 확대, 북한 금융에 대한 연구 등에 집중하고 있다. 경제협력은 천문학적 비용이 필요한 데다, 사업 리스크도 일반 해외 인프라 투자보다 높아 선제적 대응이 필수기 때문이다. 다른 국책은행 관계자는 “최근까지 북한 경제나 금융에 대한 관련 연구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지금 준비하는 게 이르다는 평가도 있지만 수년간 묵혀놨기 때문에 오히려 ‘벼락치기’에 가깝다”고 말했다.
은행별 경협사업 대응 방안도 나온다. 금융권과 건설사 등이 컨소시엄을 이뤄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방식, 해외 인프라 투자 포트폴리오를 북한 쪽으로 배분하는 방식 등이 거론된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민간투자가 확대되면 세계 IB(투자은행) 등과도 경쟁해야 한다. 해외 금융기관들은 대규모 금융 조달 경험이 상대적으로 풍부한 만큼 미리 대응 방안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 금융 지원 큰그림 그리는 은행권
앞서의 방안들은 어디까지나 큰 틀에서 포괄적으로 논의되는 내용이라 은행들은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전략을 짜고 있다. 남북경협에서 가장 역할이 클 것으로 전망되는 국책은행들이 적극적이다. 산업은행은 미래전략연구소 통일사업부를 중심으로 북한 경제 관련 연구를 진행 중이다.
산업은행은 국내 은행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북한 경제 연구를 꾸준히 이어왔다. 이동걸 산은 회장도 지난 11일 기자간담회에서 “다음 역점 사업 가운데 하나는 남북경협이다. 오는 가을에는 평양에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산은 관계자는 “기본 연구를 이어가면서 상황을 지켜볼 것”이라고 말했다.
수출입은행은 통일부의 남북협력기금을 수탁 운용 중이다. 지난 3월 기준 1조 6182억 원에 달한다. 수은은 남북 문화교류 사업에 기금이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집중할 방침이다. 체육행사, 이산가족 상봉 등 남북이 합의한 교류협력 사업이 대상이다. 북한·동북아연구센터 연구 인력도 새롭게 채용한다. 한국은행 역시 남북경제협력 연구를 담당할 박사급 인력을 새롭게 채용하기로 했다.
IBK기업은행은 기존에 설치했던 ‘통일금융준비위원회’ 확대·개편을 논의 중이다. 위원장직을 기존 부행장급에서 수석부행장으로 격상하고 인력도 늘린다는 계획이다. 개성공단 지점 설치도 다시 추진한다. 당시 입주 은행으로 선정된 곳은 우리은행. 금융감독원이 관리하는 개성공단 입주 기업 125개 가운데 절반이 넘는 64곳의 주거래은행이 기업은행인 만큼, 다시 도전하겠다는 게 기업은행 관계자의 설명이다.
시중은행들의 관심사는 사회기반시설(SOC) 등 인프라 사업에 초점이 맞춰졌다. 도로·항만·교통 등 인프라 구축 사업에 금융자문과 주선은 필수다. 그동안 다양한 SOC 사업에 관심을 보여온 시중은행들은 경제협력이 시작되면 신규 인프라 투자수요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전망한다.
KB국민은행은 초기 단계지만 북한 기반시설 확충을 위한 인프라 금융과 프로젝트 금융 참여를 검토하고 있다. 신한은행은 조용병 신한금융 회장이 은행장으로 재직할 당시 나온 ‘통일 대비 민간 시중은행 관점에서의 전략 방향’을 토대로, 현재 논의 중인 사업을 추가 반영해 다듬어갈 방침이다.
우리은행도 개발 사업이나 건설 사업에 금융자문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금융 지원 등을 계획 중이다. 개성공단 재가동에 대비해 지점 운영도 재개할 예정이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전산 시스템 등만 새롭게 연결하면 영업을 바로 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NH농협은행도 금강산 관광이 재개되면 2009년 남북관계 악화로 중단했던 지점 운영을 다시 이어갈 계획이다.
# 금융당국 중장기 계획 세워 추진
다만 지금까지 확정된 사안이 하나도 없는 만큼, 준비를 하더라도 차분히 하겠다는 게 은행권 관계자들의 공통적인 설명이다. 2014년 박근혜 정부의 대북 평화 제안인 ‘드레스덴 선언’ 직후 금융권에선 통일금융 논의가 급물살을 탔지만 남북 관계가 악화되면서 관련 연구는 거의 중단됐고, 금융 상품 등은 모두 유명무실해졌다.
다른 시중은행 관계자는 “준비는 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정해진 내용은 없다. 상황을 더 지켜보면서 대응하려고 한다”면서도 “단순히 금융상품 개발에만 머물지는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금융당국도 이번 경제협력과 관련해 금융시스템과 인프라 구축 등 실질적인 제도 개선에 초점을 맞출 계획이다. 상품 개발의 경우 정책에 따라 바뀌는 금융상품은 오히려 소비자에게 혼란을 줄 수 있어 은행과 협의한 이후 추진할 방침이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중장기 계획을 세워 통일 관련 금융 제도를 개선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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