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안녕하세요. ‘와알못’입니다”라고, 나를 소개하곤 한다. 푸드 칼럼니스트라면 와인도 잘 알 것 같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와인 관련된 자리에서는 처음부터 기대를 차단하는 나의 처세(?)다. 한국의 와인 소비 인구는 한때 폭발적으로 늘었고, 이제는 안정적인 마니아층을 형성해 좋은 와인을 제대로 이해하고 향유하는 이들이 다수를 이룬다. 그 흐름에서 나는 한 발 빠져 있던 축이다.
와인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돈도 많이 들고, 모임을 찾아 다닐 부지런함도 있어야 한다. 물론 품종, 산지, 양조법 등 방대한 양의 기초 지식 습득도 필요하다. 한마디로 돈과 여유를 들여야 와인을 ‘좀’ 알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에 부합하는 양과 질의 경험이 가능한데, 내겐 둘 다 없었다. 대형마트 와인 코너에서 카베르네 소비뇽, 샤르도네 같은 포도 품종 이름을 조금 발음할 수 있는 정도로 거들먹거리는 정도에 만족할 게 아니라면 말이다.
와인을 전문적으로 알지는 못해도, 좋아한다. 다행히 직업이 이렇다 보니 좋은 와인을 경험할 기회는 와알못 치고 많이 가질 수 있었다. 와인이 갖는 맛, 향의 확장성을 이해하고 맛이 ‘있다, 없다’의 기준이나마 가질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수입사와 대사관 등 시음 기회를 만들어주는 산업으로부터 받은 수혜다. 더욱이 한국에 방문한 와인메이커를 선생 삼아 와인을 배울 기회가 종종 주어지니 기자, 칼럼니스트, 블로거들을 위해 마련되는 시음 행사야말로 참교육이라 할 것이다.
지난 4월엔 이탈리아 중부의 유명 와이너리인 ‘퀘르차벨라(Querciabella)’의 월드 디렉터 조르지오와 아시아 디렉터 플로렁을 개인적으로 만날 기회가 있었다. 각종 와인 레이팅에서 90점 이상은 아무렇지 않게 받는 훌륭한 와인을 생산하는 와이너리다. 수입사 서울와인앤스피릿의 조미경 이사와 와인 전문 블로거 정휘웅 씨도 자리를 함께했다. ‘미쉐린 가이드’ 서울편에서 별 하나를 받은 ‘알라 프리마’에서였다.
일본식 이탈리안 요리를 한국식으로 또 한 번 적용한 요리를 선보이는 알라 프리마는 편견 없이 다채로운 재료를 사용하고, 절묘하게 과하지 않은 터치를 가미하는 캐릭터를 갖고 있다. 동시에 미쉐린 가이드의 표현대로 “과감하고 창의적”이기도 하다. 와인의 복합미를 느끼고 즐기기에 좋은 짝꿍인 셈이다. 에피타이저부터 다섯 가지 요리와 디저트를 선보인 런치에 퀘르차벨라의 네 가지 와인을 곁들여 차례로 맛을 봤다.
공복을 깨는 첫 접시는 촉촉한 붕장어와 간 마에 토마토를 곁들이고 보타르가를 갈아 뿌린 것. 그야말로 일본과 한국과 이탈리아의 만남이다. 우리 같은 와알못은 “생선 요리이니까 화이트 와인”라고 흔히 붙여 버리지만 첫 페어링은 레드 와인이었다. 산지오베제,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품종을 섞어 묵직한 대신에 부드럽고 상큼한 ‘토스카나 IGT 몬그라나 2013’가 희고 달달, 짭짤한 붕장어 요리에 빛나는 장식을 입혀주는 듯 했다.
두 번째 와인인 ‘키안티 클라시코 DOCG 2014’는 세 군데 다른 밭에서 수확한 산지오베제 포도로 만든 와인. 작은 베리류 과실의 향이 느껴지는 가운데 흐릿하게 스치는 싱싱한 허브 향이 쾌적한 이 와인은 두 번째 채소 요리의 일부, 또는 보완처럼 작용하는 조화를 선보였다. 와알못들에겐 채소류도 역시 화이트 와인의 짝인데, 고수들은 레드 와인을 기막히게 페어링하는 것이다.
적근대, 펜넬, 엔다이브, 당근, 처빌, 당근, 연근, 그린빈, 표고버섯, 방아, 라디치오, 브로콜리, 스테비아, 파인애플 세이지, 한련화 등 30종 이상의 미니 채소, 허브, 버섯, 뿌리채소 등이 한 접시에 담긴 싱그러운 샐러드는 한 입 뜰 때마다 다른 맛이 나는 점이 매력적이다. 닭 육수와 에멘탈 치즈로 만든 미온의 소스가 고소하게 각각의 ‘풀 맛’을 하나로 붙여 준다. 돌돌 만 작은 유산지에 접시에 사용된 식재료 목록이 적혀 나오는 점이 재미있다.
바삭바삭한 감자칩처럼 비늘을 살려 구운 발군의 옥돔구이엔 간 무, 바냐카우다(앤초비를 기초로 해 만든 딥소스에 채소나 빵을 찍어 먹는 것, 의 소스)가 곁들여졌다. 감칠맛이 폭발하는 조합이다. 키안티 클라시코를 한 번 더 곁들이니 묵직한 감칠맛이 가볍게 산화돼 날아가는 듯 했다.
가장 취향을 저격한 레드 와인은 ‘토스카나 IGT 카마르티나 2011’이었다. 부드럽고 매끈한 동시에 매콤한 터치가 입 안을 즐겁게 해주는 와인으로, 카베르네 소비뇽과 산지오베제 품종을 썼다. 이베리코 등심을 촉촉하게 수비드해 돼지감자와 유채나물, 거칠게 부순 아몬드를 곁들이고 유즈코쇼로 향을 냈다. 앞에서 느낀 화려한 감칠맛의 향연을 다시 불러내며 앞서의 접시와는 또 다른 향의 차원을 펼쳐내는 흐름이다.
흐름은 다시 바다로 돌아가, 불똥꼴뚜기를 소환했다. 부드러운 스파게티에 불똥꼴뚜기와 죽순, 어린 산초잎을 곁들여 봄의 바다와 산을 한 데 담았다. 여기에 곁들여진 와인은 유일한 화이트 와인, ‘토스카나 IGT 바타르 1998’였다. “잠재력 또한 대단한 아직 어린” 와인이라고 이날의 와인 전문가들이 이야기했지만 내겐 어디까지나 쾌적하게 기분 좋은 향을 뿜어내는 마음에 드는 알코올 음료. 황금빛을 띄는 액체를 신나게 마셨다.
마침 이 날이 판문점에서 봄이 시작된 날이었는데, 뒤풀이 삼아 봄을 제대로 향유한 셈이다. 말차, 천혜향, 캐러멜이 어우러진 디저트와도 달콤한 뉘앙스가 통해 좋은 짝을 이뤘다.
이탈리아 회사에서 일하는 오스트리아인과 프랑스인과 한국인 셋이 만나 영어로 오간 이날의 대화에선 물론 와인 이야기가 주제였다. 와인을 소개하고, 장점을 찬탄하는 것만으로도 어떤 식사 자리의 대화는 충분한 것이다. 유기농을 거쳐 달의 흐름에 따라 포도 농사를 짓고 와인을 빚는 바이오다이내믹으로, 그리고 ‘바이노다이내믹 이상’으로 진화한 이탈리아 와인 명가의 이야기는 마치 동화 속 건국 설화처럼 매력적으로 들렸다.
한국어 전문가인 와알못이 따라가기엔 좀 먼 이야기이긴 했으나, 결국 이야기는 통했다. “맛있다!” 아니면 “잘 어울려!” 그보다 원초적인 대화가 오가야 할 필요도 사실은 없지 않은가. 그들은 내게 와인을 가르쳐주고, 나는 그들에게 방아잎(“채소 접시 중에 민트 비슷한 향이 나는 처음 먹어보는 허브가 있었는데 대체 뭐죠?” “민트 계열 향이 나는 한국 허브 방아에요”)과 자염(“말돈이나 게랑드 소금 같은 소금이 한국에도 있나요?” “좀 다르지만 자염도 괜찮아요”)을 가르쳐줬다.
만일 내가 ‘와잘알’이었다면 ‘미네럴리티’니 ‘그 해 폭염’이니 하는 이야기를 하기 바빠서 절대 나누지 않았을 대화였으리라. 와인을 잘 알고 즐기는 사람들 또한 필연적으로 본성적으로 ‘먹보’라 참으로 다행이다. 와잘알들을 만나서 반갑지 않았던 적이 없었던 이유다.
필자 이해림은? 패션 잡지 피처 에디터로 오래 일하다 탐식 적성을 살려 전업했다. 2015년부터 전업 푸드 라이터로 ‘한국일보’ 등 각종 매체에 글을 싣고 있다. 몇 권의 책을 준비 중이며, ‘수요미식회’ 자문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페이스북 페이지에서도 먹는 이야기를 두런두런 하고 있으며, 크고 작은 음식 관련 행사, 콘텐츠 기획과 강연도 부지런히 하고 있다. 퇴근 후에는 먹으면서 먹는 얘기하는 먹보들과의 술자리를 즐긴다.
이해림 푸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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