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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4주년 특집: 갑의 기원2] 갑질, 그날 이후

갑은 그대로, 갑질을 당한 을에게 기억의 족쇄는 여전히 그들의 발목을 잡는다

2018.05.09(Wed) 16:25:11

갑의 기원에 대하여

On the Origin of ‘Gap’​

 

하나 혹은 적은 수의 기업에 처음으로 부가 집중되고

이 나라가 자본의 법칙에 따라 발전하는 동안

너무나도 광범위한 부정부패로부터 끝없는 갑들이

가장 추악하고, 가장 놀랍도록

존재해 왔고

존재하고 있으며

진화해 왔다.

이러한 갑질에는 우리 시대의 아픔이 있다.​ 

- 다윈 ‘종의 기원’​ 초판 마지막장 패러디

 

‘비즈한국’​은 창간 4주년을 맞아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갑질’​을 입체적으로 다뤄보고자 합니다.​ △갑질에 대한 정의와 역사적 배경([창간 4주년 특집: 갑의 기원1] '갑질 DNA'의 생성과 진화​)부터 △​우리 정치, 경제, 사회에 미친  파장 그리고 △​모든 사회 구성원이 갑질로부터 고통받지 않을 수 있는 대안, 총 3부작으로 연재될 예정입니다.  

  

그래픽=이세윤 PD

 

​[비즈한국] ​한 남자를 만났다. 희끗한 머리를 짧게 깎았고 넓진 않지만 다부진 어깨를 가진 사내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익숙한 듯 입을 열었다. 똑같은 인터뷰를 몇 번이고 반복한 탓이다. 남자는 그날, 어떤 일이 있었고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무심하게 그리고 담담하게 하나하나 읊었다.   

 

‘그날’보다 ‘그날 이후’가 궁금하다고 말했다. 거침없이 말을 잇던 남자의 말이 끊겼다. 미간이 구겨졌다. 얼굴에 가득한 주름을 타고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남자는 그날, 그 순간 떠오른 가족들의 얼굴을 말했다. 아내와 아이 둘을 생각하며 버텼다고 했다. 그렇게 버틴 탓에 가족들의 마음을 찢었다고 했다. 남자는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스스로를 아직도 탓한다.

 

다른 남자를 만났다. 늦은 시간까지 야근을 하고 나타난 그의 얼굴엔 피곤함이 가득 묻어 있었다. 남자에게 똑같이 물었다. ‘그날 이후’가 궁금하다고 했다. 남자는 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이제 괜찮다”고 말했다. 

 

대신 어머니의 이야기를 했다. 아들이 그날, 그 자리에서 당했던 일들을 TV와 라디오를 통해 알게 된 어머니는 밤새 울었다고 했다. 한 손으로는 아들을 붙잡고, 한 손으로는 가슴을 내려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남자의 입술이 떨리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어머니였다. 남자는 대답했다. “괜찮아요.”

 

8명의 남자를 만났다. 누군가에겐 든든한 가장이었다. 적게는 수천 명, 많게는 수십만 명을 이끄는 회사 대표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자랑스러운 남편이자 아빠였다. 누군가에겐 소중한 아들이기도 했다. 좁은 취업문을 열고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 만한 회사에 들어갔다며 몇 푼 되지 않는 용돈을 쥐어준, 이제부터 효자 노릇 하겠다던 아들이었다.

 

8명의 남자들은 계약서상 ‘을’이었을 뿐이었다. 각자 다른 삶을 살아도 비슷한 상처를 안고 있다. 치욕과 수치, 분노와 억울함은 이제 무뎌졌지만 그때 받은 상처들은 깊은 곳에 남아 있다. 일부는 살이 순식간에 10kg이 빠졌고, 일부는 아직도 재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일을 그만두거나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장면을 몇 번이나 상상했으면서도, 가족 생각에 참고 버텼던 스스로를 탓한다. 지나간 시간이 무색할 만큼 기억의 족쇄는 여전히 그들의 발목을 붙잡는다. 

 

# “깊이 반성하고 합의했기에…​

 

8명의 ‘을’에게 ‘갑’이거나 ‘갑’의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가 기억한다. 이들에게 ‘갑’은 SK, 한화, 현대, 대림산업, CJ그룹 등 국내 손에 꼽히는 대기업 오너 일가거나, 한때 프랜차이즈 업계 선망의 대상이었던 미스터피자 회장이었다.

 

‘갑’들은 누구나 떠올릴 순 있지만 누구도 실행에 옮기지 않았던 폭력을 ‘을’들에게 행사했다. 폭언과 욕설은 기본이었다. 어떤 ‘갑’은 “한 대에 100만 원”이라며 알루미늄 야구방망이와 주먹을 휘두른 뒤 쓰러진 ‘을’에게 수표를 던졌다. 

 

권투가 취미인 또 다른 ‘갑’은 ‘을’에게 140장의 수행기사 매뉴얼을 쥐어주며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주먹질을 했다. 회사 1층에서 술을 곁들여 식사를 하던 ‘갑’은 자신이 안에 있는 것을 몰랐다는 이유로 규정대로 정문을 닫은 ‘을’을 식당 안으로 끌고 들어가 뺨을 때렸다. 

 

왼쪽부터 정우현 전 미스터피자 회장, 최철원 전  M&M 사장, 정일선 현대비앤지스틸 대표이사 사장. 사진=이종현 기자·연합뉴스

 

‘갑’들은 논란의 중심에 섰고, 카메라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일부는 법정에 서기도 했지만 대부분 1심에서 실형을 선고 받았다가 항소심 등에서 집행유예와 벌금이 확정돼 풀려났다. 그들이 낸 벌금은 적게는 200만 원에서 많게는 1500만 원. 각 사건의 쟁점은 달랐지만, 이들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한 재판부는 하나같이 이런 취지로 판시했다. 

 

“가해자가 깊이 반성하고 있고 피해자와 합의했다.” 

 

구설에 오른 ‘갑’들은 대부분 자리를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회사를 떠났다. 이들은 수억 원에 달하는 퇴직금을 챙겼거나, 불과 지난해까지 수십 억 원에 달하는 연봉을 받았다. 대표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등기이사 신분으로 경영에는 계속 참여하기도 하고, 현직에 그대로 남아 있기도 하다. 그날의 ‘갑’들은 지금도 ‘갑’의 위치에 있다.

 

그래픽=김상연 기자

 # 갑질은 왜 계속되는가

 

또 다른 계약서상 ‘갑’들의 폭력은 2018년 현재까지 반복되고 있다. 지난해 11월 출범한 노동법률단체 직장갑질119는 출범 석 달 동안 총 5748개의 갑질 제보를 받았다. 하루 평균 67.6건이다. 임금을 떼이거나 수당, 포괄임금제, 시간외수당을 체불하는 ‘임금’ 문제가 가장 많았고, 개인적인 일을 시키거나 부당한 업무지시를 하는 등 직장에서 우월한 지위를 악용해 일반적인 갈등의 범위를 뛰어넘는 ‘갑질’들이 뒤를 이었다.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4월 15일까지 접수된 제보 가운데 200건은 폭행이었다. 이 가운데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는 폭행은 57.2%로 절반을 넘었고, 조현민 전 대한한공 전무의 ‘물은 뿌렸지만 사람을 향하지 않았다’는 주장과 비슷한 준폭행은 33.3%를 차지했다. 가해자들은 과장·팀장 이상의 상사가 66.6%, 사장·임원 등은 21.4%였다. “민주주의가 직장에 막혔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가면을 쓴 ‘을’​들이 거리에 나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사진=고성준 기자

 

전문가들은 ‘갑’들에게 엄격한 잣대를 요구하고 처벌을 강화하는 동시에 ‘을’도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서초동의 한 노동 전문 변호사는 “갑질 행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여러 가지 문제를 풀어야 하겠지만 노동자들이 용기를 내는 게 가장 중요하다”며 “신분 노출이나 각종 불이익 등이 예상돼 어려울 수 있지만, 최근 이를 돕는 시민단체나 정부 기관이 늘고 있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인권의 기본 전제, 상식과 다른 현실에 침묵하지 않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괴물을 낳기도 한다. 최근 가면을 쓴 ‘을’들이 거리에 나와 높이는 목소리 속 ‘자리’는 무기에 불과했다. “Manners Maketh Man(타인을 대하는 태도가 사람을 만든다)”이라는 영화 속 대사가 무겁게 다가온다.

문상현 기자

moon@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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