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굳이 패셔니스타나 트렌드세터가 되고 싶지 않은 대한민국 보통 남자들. 하지만 아주 약간의 투자로 일상이 달라질 수 있다면? 은근히 센스 있다는 말이 듣고 싶은, 바로 당신을 위한 가이드.
왕년의 신혼여행지였던 제주도가 올레길 열풍을 일으키더니 이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힙(hip)한 장소로 자리매김했다. ‘효리네민박’의 영향만은 아니다. 방송을 통한 신드롬이 일어나기 전부터 트렌드에 민감한 연예인들이 제주도로 거처를 옮겼고, 서울살이에 지친 청춘들에게 제주는 힐링을 상징하는 여행지가 됐다.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은 과거에도 그랬다. 오히려 중국 관광객의 급증으로 예전보다 제주의 자연을 한가롭게 즐기기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청춘들은 오늘도 여전히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자유로운 게스트하우스 문화는 사건사고에 휘말려 주춤하고 있지만, 서울에서도 찾기 힘든 트렌디한 카페와 레스토랑들은 매일 문전성시를 이루며 인스타그램 단골이 되고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남들 다 가는 곳에서 이미 유명해질 대로 유명해진 음식을 먹을 것인가.
1년에도 서너 번 제주를 찾는 게 2030 세대의 여행 트렌드가 된 요즘, 애월과 협재는 그대로겠지만 우리가 찾는 식당은 조금 달라져야 한다. 제주를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줄 미식 여행을 위해 꼭 가봐야 할 식당을 엄선했다.
# 국내 단 한 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토종 흑돼지, 연리지가든
먼저 비장의 무기를 공개한다. 협재 인근에서 20년 가까이 상록가든이라는 이름으로 토종 흑돼지를 선보이던 사장님 내외가 한적한 시골 농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상호 역시 연리지가든(늘푸른농원)으로 변경됐고, 미리 예약을 하지 않으면 식사를 할 수 없다. 흑돼지는 고기 수량이 많지 않기 때문에 하루 최대 30명 이내로만 예약을 받는다.
제주도 도처에 즐비한 게 흑돼지인데 뭐가 그리 특별하냐고? 지금부터 비밀을 공개한다. 우리가 먹는 흑돼지는 영국산 돼지와 교배해 만들어낸 개량종이다. 그렇기에 8개월이면 도축해도 좋을 만큼 금방 자란다. 반면 진짜 토종 흑돼지는 2년을 키워야 겨우 도축할 수 있을 정도로 개량종에 비해 덩치가 작다. 한 마리를 온전히 키워내기 위해 토종 흑돼지들이 자유롭게 뛰어다닐 수 있는 넓은 공간도 필요하다.
8개월과 2년, 대량 축산과 소규모 방목. 이렇게 비교해보면 시중의 흑돼지에 비해 진짜 토종 흑돼지 구하기가 얼마나 어려울지 감이 올 것이다. 그래서 제주축산진흥원을 제외하면 순수 토종 흑돼지를 키워서 판매하는 곳은 연리지가든(늘푸른농원)이 유일하다. 따라서 고기 수급이 늘 부족하기 때문에 찾아온 손님에게 식사 외 고기 판매는 하지 않는다.
제주도 전체를 통틀어, 아니 대한민국에서 오직 단 한 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토종 흑돼지는 비계부터 다르다. 처음 고기가 나오면 비계의 양이 지나치게 많아 놀랄지 모른다. 하지만 노릇노릇 구워진 고기의 비계는 그렇게 고소할 수 없다. 우리가 흔히 먹었던 돼지고기의 기름 비계와는 차원이 다른 맛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쯤 되면 예상했겠지만, 연리지가든은 천생 농부인 사장님이 토종 흑돼지를 이어가기 위해 반쯤 취미 삼아 농장을 유지하고 손님들을 받는 곳이다. 보통 남자 가이드에 소개할지 말지 많이 망설였다. 부디 예약을 했다면 노쇼(no-show)는 절대 하지 말고, 매너 있는 손님이 되어주길 바란다. 그래야만 더 많은 사람들이 오래오래 제주도의 진짜 토종 흑돼지를 먹을 수 있다.
# 오마카세는 선택 아닌 필수, 스시 호시카이
유일무이한 제주도 토종 흑돼지를 경험했다면, 제철 재료를 이용한 스시를 맛볼 차례다. 스시 호시카이는 제주도 최초의 하이엔드 스시야(すしや)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전국의 스시 마니아들은 호시카이를 반드시 가봐야 할 식당으로 손꼽는다. 제주 근해에서 잡힌 제철 해산물을 주로 이용해 제주에서만 먹을 수 있는 스시를 만들기 때문이다.
개장 이후 호시카이의 명성을 만든 스시효 출신의 임덕현 셰프는 떠났지만, 제주도 특유의 제철 해산물과 특유의 따뜻한 분위기는 여전하다. 서울의 하이엔드 스시야가 때때로 스시를 잘 모르는 손님들을 당황시킨다면, 호시카이는 초보 관광객에게도 무척 상냥하며 친절한 호의를 베푼다. 그야말로 사람 냄새를 물씬 풍기는 제주스러운 스시야다.
참치 뱃살을 세 겹으로 얹은 삼겹 도로 스시를 맛보면 돼지고기 삼겹살만 먹었던 과거가 원망스러울지 모른다. 제주 옥돔 스시처럼 특산물을 이용하는 게 최고의 자랑이지만, 호시카이의 시그니처는 서울에서 느끼기 힘든 따뜻한 분위기다. 점심이나 저녁 모두 오마카세를 선택하는 건 선택이 아닌 필수. 밥값이 제법 비싸지만 전혀 아깝지 않을 것이다.
# 셰프 철학 녹아 있는 제철 메뉴, 비스트로 낭
한식이라 할 수 있는 돼지고기와 일식 스시를 거쳤으니 마지막은 양식이다. 제주도에는 정체불명의 서양식 레스토랑이 난립하고 있다. 무식하게 큰 버거, 좋은 재료는 다 때려 넣은 파스타 등등. 맛보다는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좋은 디스플레이를 더 중시하는 레스토랑이 적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비스트로 낭은 독특하다. 유명 관광지에서 제법 떨어진 위치에 무심하게 서 있어 그냥 지나치기 쉽다. 진짜 맛집들이 그러하듯 비스트로 낭 역시 알고 찾아가지 않으면 우연히 들어가기 힘들다.
셰프 혼자 예약과 접객, 요리까지 모든 것을 해결하는 1인 레스토랑이기에 예약은 필수. 그냥 가도 되겠지, 라고 방문했다가 발길을 돌리는 손님들이 종종 생길 만큼 알음알음 입소문도 퍼졌다.
비스트로 낭은 매달 제철 재료를 이용한 신메뉴를 선보인다. 이달의 메뉴에는 1인 셰프의 철학도 녹아 있다. 이를테면 4월의 파스타가 아무리 인기 폭발이었어도 5월에는 판매하지 않는다. 대신 언제 찾아가도 맛볼 수 있는 상시 메뉴들도 있다. 파스타가 주 종목이지만, 스테이크를 포함한 코스도 자랑하는 메뉴다. 준비된 예산에 따라 자유롭게 코스 메뉴를 조정할 수 있다는 게 1인 레스토랑의 장점 아닐까.
서울에서도 먹기 힘든 제대로 된 파스타가 생각난다면 비스트로 낭이 정답이다.
여행에서는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먹는 즐거움을 빼놓을 수 없다. 맛있는 음식은 몇 년이 지나도 뇌리에 남아 여행지의 추억을 되살리는 역할을 수행한다. 입가에 침이 고였다면 지금 당장 제주로 떠나는 비행기 표를 찾아보는 게 어떨까. 여행을 망설이기에 우리 인생은 너무 짧다.
장예찬 작가·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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