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지난 2월 5일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뇌물을 건넨 혐의 등으로 기소된 이재용 부회장에게 항소심 재판부는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한 1심을 파기하고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그러자 재판장인 ‘정형식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파면하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20만 명을 돌파했다. 이에 청와대 관계자가 대법원 측에 전화를 걸어 청원 내용을 전달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일고 있다. 대한변협은 4일 성명서를 통해 “청와대 관계자가 대법원에 전화한 것이 사실이라면 법원의 독립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는 점에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한편에선 검찰이 ‘물벼락 갑질’ 논란을 일으킨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에 대한 경찰의 구속영장 신청을 기각했다. 경찰은 폭행과 업무방해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검찰은 폭행 피해자 2명이 모두 처벌을 원치 않아 공소를 제기할 수 없고, 업무방해 부분에 대해서도 광고주로서 업무적 판단에 따라 시사회를 중단시킨 것으로 볼 여지가 있는 등 다툼의 소지가 있다고 기각 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일부 네티즌들은 ‘재벌 봐주기’라며 비판했고, 지난 4일 광화문에 나와 조양호 회장 일가의 퇴진을 요구한 대한항공 직원들은 더 큰 규모의 2차 집회를 열 계획이다.
위 두 사건은 최근 법조계에서 재벌과 관련해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다. 우선 이재용 부회장 사건의 경우 항소심 재판부가 뇌물액수를 36억 원으로 인정했으면서도 집행유예를 선고한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게다가 항소심 재판부는 1심과 달리 제3자 뇌물 혐의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했고 뇌물액수도 대폭 줄였다. 앞으로 법원이 수천 만 원을 뇌물로 준 일반인에게 실형을 선고한다면 누가 승복하겠는가.
이 항소심 판결에 국민들이 반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렇지만 청와대가 이러한 국민의 여론을 고스란히 법원에 전달하는 것에는 동의하기가 어렵다. 판사 파면을 요구한 국민 청원은 판사의 신분을 보장한 헌법에 배치될 뿐만 아니라, ‘재판은 여론으로부터 독립한다’는 헌법상 원칙에도 위배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주권의 기본적인 요청은 국가권력이 국민의 의사에 의해 정당화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사법권 행사에도 당연히 국민적 통제가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 사법시스템은 국민의 형사재판참여를 제외하고는 국민적 통제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재벌 등 사회적 강자에 대한 관대한 판결, 사회실상과 동떨어진 판결들이 선고될 때마다 비판의 목소리가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정형식 부장판사 파면 청원은 그동안 숨죽여왔던 일반 대중들의 목소리가 극적으로 반영된 것이 아닌가 싶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차제에 미국의 여러 주에서 실시하는 법관 선거제, 대법관에 대한 국민 소환제라고 할 수 있는 일본의 최고재판소 재판관 국민심사제, 영미의 배심제 등을 사법개혁의 일환으로 적극적으로 검토해 국민의 사법참가를 제도적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 현재와 같이 국민의 참가를 배제하는 사법시스템이 지속된다면 앞으로도 제2, 제3 판사파면 청원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성격은 다르지만 조현민 전 전무 사건도 마찬가지다. 경찰의 구속영장 신청을 검찰이 기각한 것은 앞서 검찰이 밝힌 바와 같이 법리적으로 당연한 결과다. 그렇지만 네티즌들의 여론은 법리와는 별개로 부정적이다. 이는 오래전부터 반복되어온 재벌들의 갑질에 대한 분노가 내재한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조 전 전무의 언니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회항’ 사건은 대표적인 재벌 갑질 사례로 늘 회자돼온 터다.
조 전 전무의 갑질에 대해서는 상응하는 법적 책임을 추궁해야겠지만, 더 나아가 한 줌의 지분으로 수많은 계열사를 좌지우지하는 현 시스템 개혁, 일감몰아주기 근절을 비롯한 공정거래확충 등 제도적인 개혁이 반드시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이번에도 실기한다면 앞으로도 재벌들의 갑질은 다양한 모습으로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 사회에는 갑질이 곳곳에 만연해있다. 공권력이 이러한 갑질에 대해 제때 상응하는 대처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판사 파면 청원, 재벌의 갑질에 대한 비판은 우리 국민들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갑질에 대한 분노, 이에 제대로 대응 못한 공권력에 대한 분노가 반영된 결과다. 제도적 개선을 위한 정치권의 각성을 촉구한다.
김한규 변호사·전 서울지방변호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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