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얼마 전 우편물 하나가 도착했다. 익숙한 보험사 이름이 발신인으로 된 우편물을 받은 나는 기대 반 걱정 반의 심정이었다. ‘드디어 끝을 보는 건가.’
지난해 8월, 우리 가족(나·남편·아들)은 베를린라이프를 시작했다. 외국생활에 장밋빛 환상만을 상상하진 않았지만, 정착을 위한 과정을 거치며 조금 남은 환상도 날아갈 지경이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살 집을 구하는 것이다. 독일에서 집이란 단순히 ‘잘 곳’ 이상이다. 집을 구하고 거주지등록을 마쳐야 정착을 위한 나머지 절차가 가능하다. ‘모든 것의 시작은 집으로부터’인 셈이다.
베를린은 전 세계에서 사람이 몰려드는 힙(hip)한 도시지만, 넓은 땅, 많은 집 중에 우리 가족이 살 집 하나 없겠느냐는 식의 안이한 생각을 처음엔 분명 했다. 많은 이들의 경험담을 들었을 때도 내 얘기는 아니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수요에 비해 공급이 딸리는 베를린의 주택 시장을 이야기했고,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 월세(독일은 전세가 없다)를 걱정했으며, 특히나 외국인으로서 집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직간접적 경험에 비춰 토로했다.
독일에서 집을 구하는 경로는 몇 가지가 있다. 인터넷 부동산 사이트를 통한 방법, 지역신문에 난 광고나 거리 곳곳에 붙어 있는 광고지를 보고 직접 연락하는 방법, 독일 최대 한인 커뮤니티인 ‘베를린리포트’ 같은 커뮤니티를 통한 방법, 우리나라처럼 부동산 중개인에게 의뢰하는 방법 등이다. 중개인을 통한 방식은 보통 두 달치 월세에 해당하는 수수료 부담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각자의 상황에 맞춰 진행한다. 인터넷 사이트를 통한 방법이 보편적이다.
우리는 베를린 도착 후 임시 거처에 머물며 인터넷을 통해 집을 찾는 데 주력했다. 원하는 지역, 방의 개수, 임대료 수준, 집의 구조와 시설 등을 체크한 뒤 몇 곳에 ‘집을 보고 싶다’는 메시지나 이메일을 보냈다.
많은 경험자들이 ‘수십 군데 메일을 보내도 답이 오지 않는다’느니 ‘집을 구하다가 독일 생활이 끝날 것 같다’는 식으로 했던 말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더 적극적이어야 했다. 원하는 지역을 넓혀 더 많은 집을 찾았고, 이메일을 보낼 때부터 최대한 자기어필을 했다.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연락은 거의 오지 않았고, 어쩌다 연락이 닿아 집을 보기로 약속한 날 낯선 지리에 길을 헤매다 5분 늦게 현장에 갔을 땐, 이미 자리를 뜨고 없는 경우도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보통 집 하나를 볼 때 여러 팀이 동시에 보는 일이 많기 때문에 늦게 오는 팀을 기다려줄 여유가 없다.
초조함이 불안으로 바뀌어갈 무렵, 한국을 출발한 이삿짐은 도착 날짜가 임박해왔다. 받아주겠다는 곳만 있으면 어디든 들어가 살고 싶은 심정이 들 즈음, 원하는 동네의 집 두 곳을 볼 수 있었다.
기뻐하기에는 일렀다. 베를린은 주택 부족으로 집 하나를 두고 세입자들의 경쟁이 치열하다. 집을 본 후 마음에 들면 신상정보와 재정상태 등을 기록한 ‘지원서’를 작성해 제출하는데, 이 ‘서류면접’을 통해 집주인이 세입자 후보를 고르는 식이다.
계약이 성사되려면 신원보증과 재정증명도 서류상 이뤄져야 한다. 재정증명은 보통 직전 3개월치 급여명세서를 제출한다. 이 과정에서 외국인들의 경쟁력은 현저히 떨어진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제외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역시 서류면접을 거친 후 현재의 집주인으로부터 ‘합격’ 통보를 받았다.
합격 통보로 모든 과정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월세의 3배에 해당하는 보증금을 내고, 열쇠를 받으면 입주할 수 있겠거니 했다. 그런데, 그 보증금에서 우리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이 문제로 떠올랐다. 무려 1년 치의 월세를 보증금으로 요구한 것이었다.
독일에서 보증금은 우리나라처럼 전액을 돌려받는 개념이 아니다. 임대차 계약이 끝나고 집을 비울 때 집 상태를 체크한 뒤, 하자가 있으면 차감하고 돌려주는데, 집이란 게 처음 상태 그대로일 수 없으니 당연히 전액을 돌려받는 일은 불가능하다. 경험자들이 ‘받지 못할 돈’이라고 생각하라는 데는 그런 이유가 있다.
그러니 1년 치 월세는 무리한 요구였다. 그렇지만 처음 집 구하던 때를 생각하니 다시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행히 집주인은 한발 물러서 6개월 치 월세에 해당하는 주택보증보험에 들 것을 요구했고, 우리는 받아들였다. 아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기쁜 마음으로 어마어마한 페이지에 달하는 계약서를 몇 차례 정정하고 검토해가며 사인한 뒤 생각했다. 이제 보험만 들면 진짜 끝이겠구나.
이제 이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주택보증보험 최종 심사 승인이 떨어진 게 올해 4월 초다. 외국인인 우리에게는 보험 가입도 까다로웠다. 독일 거주 6개월이 지나야 주택보증보험 가입 여부 심사 자체가 가능하다고 했다. ‘승인’도 아닌 ‘심사’다. ‘만일 6개월 뒤 심사를 거쳐 거절당하면 어떡하지?’라는 불안감에 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베를린 생활 8개월 만에 집 구하기는 마침표를 찍었다.
얼마 전,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 새로운 한국인 가족이 왔다. 그들 역시 집을 구하는 어려움을 속사포로 쏟아냈다. “집만 구해지면 다 끝날 것 같아요.” 그 심정을 잘 아는 나는 말할 수 없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고.
글쓴이 박진영은, 방송작가로 사회생활에 입문, 여성지 기자, 경제매거진 기자 등 잡지 기자로만 15년을 일한 뒤 PR회사 콘텐츠디렉터로 영역을 확장, 다양한 콘텐츠 기획과 실험에 재미를 붙였다. 지난해 여름부터 글로벌 힙스터들의 성지라는 독일 베를린에 머물며 또 다른 영역 확장을 고민 중이다.
박진영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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