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면을 가위로 자르지 마라.” “식초나 겨자 치지 마라.” “면은 100% 메밀 순면이 좋다.” “비빔냉면 먹지 마라….”
이런 소리를 한 번이라도 했던 ‘면스플레이너’들은 이제 큰일 났다. 평양냉면에 대한 경험과 알량한 지식을 권력삼아 ‘갑질’을 행했던 자들은 이제 숨어 다니시라. ‘진짜’가 나타난다.
27일, 한반도의 역사가 ‘오늘부터 1일’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왔고, 문재인 대통령의 손을 잡고 다시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김 위원장은 남측으로 오시는데 나는 언제쯤 넘어갈 수 있겠느냐”는 문재인 대통령의 질문에 대한 위트 있는 화답이었다.
남한 분위기를 잘 파악하고 있는 듯한 김정은 위원장의 다음 위트는 정상회담을 앞둔 모두발언에서 전 세계에 생중계 됐다. “오기 전에 보니까 오늘 저녁 만찬 음식 가지고 많이 이야기 하는데, 어렵사리 평양에서부터 평양냉면을 가져왔다.” 지난 1일 열린 ‘2018 남북 평화 협력 기원 평양공연 봄이 온다’ 공연 당시에 이미 옥류관 냉면이 화제가 된 바를 잘 알고 있는 듯한 행간이다.
북측이 옥류관 수석요리사와 냉면기계를 공수해와 저녁 만찬에서 옥류관 냉면을 그대로 선보일 것이라는 것은 앞서부터 알려진 바였고, 전 세계가 빵 터진 대목은 그 다음에 등장했다. “대통령께서 편한 마음으로 이 멀리 온…, 멀다고 하면 안 되갔구나(일동 폭소) 맛있게 드셨으면 좋겠다.” 문재인 대통령도 웃고, 김정은 위원장도 웃고, 임종석 비서실장도 웃고, 김여정 부부장도 웃었다.
이때가 10시 15분 경, 오늘 점심식사는 평양냉면으로 하시라는 제안이나 다름없었다. 여름이 온 양 후끈했던 날씨에 평양냉면 전문점들 앞에는 예외 없이 줄이 늘어섰고 신문과 방송은 그 진풍경을 하루 종일 실어 날랐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정상회담과 선언문 발표 후 만찬에서 옥류관 냉면도 틀림없이 선보였다. ‘4·27 냉면 기념일’이었다.
지난 1일, 그리고 이번 만찬을 통해 상세히 공개된 옥류관 냉면의 모양새는 충격, 정말 충격이었다. 평양냉면 마니아들에게 옥류관은 메카요, 메디나.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에 나와 있는 옥류관 분점이라도 경험해본 것이 성지순례요, 교류단 등 자격으로 정말로 평양 옥류관에 다녀와본 인물들은 신의 목소리를 전하는 사제나 다름없을 정도다.
그런 옥류관 냉면이 검붉은 면에 진한 빛깔 육수에 잠겨 있는 모양새였다. 한 술 더 떠 옥류관 직원은 면에 식초를 치고 육수엔 양념장과 겨자를 풀어먹으라고 했다. “별 맛일 것”이라며. 회백색의 순면은커녕, 순수한 육수는커녕, 마치 분식집 칡냉면 같은 음식처럼 보였다. 그것이 진짜 평양냉면이었다.
북한에서 간부식당 요리사로 일하다가 탈북한 윤종철 씨는 서울 합정동에서 ‘동무밥상’이라는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간부식당 입사 후 연수차 4개월간 평양 옥류관에서 일한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진짜 평양냉면은 메밀이 ‘겨우’ 40%의 비율에 나머지는 다 감자녹말이다. 툭툭 끊기는 순면은 무슨, 쫄깃쫄깃한 함흥냉면 면에 더 가깝다.
육수 재료는 닭, 돼지, 소, 꿩 중 계절에 맞춰 배합을 바꾸는데 결정적인 맛내기는 ‘평양간장’이라고 부르는 일종의 맛간장 몫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 들어라, 간장이란다. 소금으로 쩡한 짠맛을 내야 순결하다고 믿었던 서울의 면스플레이너들이여, 육수가 간장 맛이란다.
서울 평양냉면의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자 그것이 곧 막장 드라마가 됐다. 그것이 분단 이전엔 평양냉면과 같은 뿌리였다 해도, 어차피 음식은 환경과 기술과 시절에 맞춰 변화하는 법이라 서울의 평양냉면은 그 뿌리와 관계없는 길을 오래도 걸어왔던 것이다.
평양냉면이라 믿었던 것은 결국 ‘서울식 평양냉면’ 혹은 ‘평양식 서울냉면’일 뿐이었고, “이것이 평양 정통!”이라고 부르짖던 수많은 강박은 모두가 뇌내망상에 불과했다. 면스플레이너들은 모두 풍차를 향해 달려간 돈키호테였다. 근본 없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이제껏 이토록 오매불망 간직해왔던 것이다.
원조로 꼽히는 ‘평양면옥’, 신흥 강자로 꼽혔던 ‘피양옥’, 지난해 개그맨 주병진 씨가 낸 ‘더 평양’, 갓 새로 문을 연 ‘평양옥’까지… 평양이 다 뭐란 말인가. 평양냉면이 아니다. 평양냉면과 다르다. 상대적으로 소외돼있지만 함흥냉면 또한 함흥냉면이라는 이름의 정통성을 잃게 될 것이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함흥의 함흥냉면 역시 서울의 함흥냉면과 매우 다르다. 평양냉면이나, 함흥냉면이나 북에서는 그냥 매한가지 ‘국수’다.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은 종전과 평화 교류를 기원하며 희망의 역사를 시작했다. CNN이 정의한 표현을 빌자면, 앞으로 남과 북 사이엔 ‘국수(냉면) 외교’가 시작될 것이다. 평양의 평양냉면이 평화의 사절이 되어 남으로 전파될 것이다.
봄이 왔다 싶었는데 어느새 여름이 시작되려 하고 있다. 가을이 되어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에 가면, 평양의 평양냉면은 한발 짝 더 가까이 와있으리라. 이제 서울의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에게 새로운 이름을 찾아줘야 할 때다. 담백하게 생각하자. 그저 ‘서울냉면’이다.
비록 근본은 없어졌더라도 우리가 소중히 먹어온 음식에 어울리는 새 이름이 아닌가. 그리하여 나, 냉면요정은 앞으로 서울냉면을 먹겠다. 그리고 진짜 평양냉면도, 진짜 함흥냉면도 고대하며 기회를 기다리겠다. 그러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다정하게 협조하시라. 얼른 냉면 좀 먹자.
‘냉면요정’ 이해림은? 패션 잡지 피처 에디터로 오래 일하다 탐식 적성을 살려 전업했다. 2015년부터 전업 푸드 라이터로 ‘한국일보’ 등 각종 매체에 글을 싣고 있다. 몇 권의 책을 준비 중이며, ‘수요미식회’ 자문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페이스북 페이지에서도 먹는 이야기를 두런두런 하고 있으며, 크고 작은 음식 관련 행사, 콘텐츠 기획과 강연도 부지런히 하고 있다. 퇴근 후에는 먹으면서 먹는 얘기하는 먹보들과의 술자리를 즐긴다.
이해림 푸드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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