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최근 대한항공 등 재벌가 갑질 논란이 국민연금으로 번졌다. 대한항공 2대 주주이자,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 도입을 앞둔 국민연금이 경영진 해임 등 적극적인 역할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져서다. 국민연금은 현행 제도하에서는 경영 참여가 쉽지 않다는 입장이다.
26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대한항공 지분 11.67%를 보유하고 있다. 대한항공과 진에어 등의 지주사 한진칼(29.62%)에 이어 2대 주주다. 국민연금은 한진칼의 지분도 11.81% 가지고 있다. 한진칼에서도 조양호 회장(17.70%) 다음이다. 이번 대한항공 총수 일가 갑질 논란에서 국민연금 역할론이 떠오르는 이유다.
현재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국민연금이 주주로서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청원이 잇따라 올라오고 있다. ‘조양호 회장 해임’이나 ‘주주총회를 통한 경영진 교체 권고’ 등 경영 참여를 촉구하는 내용이다. 일부는 국민연금이 국민의 노후자금을 관리하는 것을 빗대 “국민연금이 대한항공의 주주라면 대한항공 직원들을 비롯한 모든 국민이 대한항공의 주주다. 국민연금은 국민의 목소리를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한항공 투자자들 사이에선 “주주가치가 심각하게 훼손된 국민연금이 고민할 이유가 없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대한항공은 최근 수년 동안 2조 원가량의 적자(누적)만 내다 지난해 순이익을 내며 흑자전환에 성공했고, 부채비율도 2016년 1200%에서 500%대로 떨어졌다.
하지만 지난 12일 조현민 대한항공 전무 갑질 논란이 처음 제기된 이후 대한항공 주가는 5% 이상 하락했다. 한진칼 주가도 큰 폭으로 하락하면서 한진그룹 주요 계열사 시가총액이 하루 만에 수천억 원 증발했다. 한 대한항공 투자자는 “대한항공에 겹경사가 겹친 상황에서 사업상 아무 문제없이 오너 일가 논란으로만 큰 손해를 봤다. 2대 주주라면 충분히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상황 아니냐”고 반문했다.
# 예행연습 끝났다…어디까지 칼 빼들까
다만 ‘국민연금 역할론’은 대한항공 갑질 논란만으로 제기되는 주장이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올해 하반기 도입을 앞둔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자의 의결권 행사 지침)와 연결된다.
스튜어드십 코드란 국민연금과 같은 기관투자자들이 고객과 수탁자의 돈을 자기 돈처럼 여기고 관리 운영해야 한다는 규범이다. 한 금융사 관계자는 “연금으로 130조 원어치의 국내 주식을 보유한 국민연금공단의 관리·책임과 주주가치 확보 역할이 더욱 강화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3월 27일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은 오는 7월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7월 고려대학교 산학협력단에 ‘국민연금 책임투자와 스튜어드십 코드에 관한 연구’ 용역을 의뢰했고, 이날 최종 보고서를 공개했다. 현재 국민연금은 보고서를 바탕으로 기금 운용 세부 지침 개정 작업을 진행 중이다.
보고서는 국민연금이 적극적으로 주주 활동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기업 경영 과정에서 주주 가치를 소홀히 하는 기업을 ‘중점 관리 기업명단’에 포함하고, 이런 기업들의 의사결정에 적극 관여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주주 제안을 통해 임원 후보를 추천하고, 주주 대표 소송이나 손해 배상 소송을 제기하는 등의 활동을 주문하는 내용도 담겼다.
복지부와 국민연금 발표와 함께 지난 3월 말 진행된 ‘슈퍼 주총 데이’에서도 국민연금이 관심을 모았다. 스튜어드십 코드를 앞둔 국민연금의 ‘예행연습’이 이뤄질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기준 국민연금이 지분 5% 이상을 보유한 기업은 275곳에 달한다. 10% 이상 지분을 가진 기업은 84개다. 국민연금이 국내의 굵직한 기업 대부분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셈이다.
실제 국민연금은 삼성물산 주총을 비롯해 롯데지주, 기아자동차, 넥센타이어 등의 주총에서 여러 차례 안건에 반대표를 던졌다. 대부분 이사·감사 선임 건, 회사 분할합병 건, 이사 보수한도액 등 기업 경영과 민감하게 연결된 안건이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국민연금이 주총에서 반대한 사안들이 모두 부결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주요 주주로서 큰 목소리를 냈다는 평가가 나온다”고 말했다.
# 주주권 행사에 따른 유불리 따져봐야
‘예행연습’도 했고,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이 사실상 확정된 만큼 이번 대한항공 논란에서도 국민연금의 역할을 기대하는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국민연금은 당장 주주권 행사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투자 기업의 경영 상황에 섣불리 개입할 수 없는 ‘현행 규정’ 탓이다. 자본시장법상 지분 5% 이상을 보유한 주주는 지분 변동이 생기면 5영업일 이내에 보고해야 한다. 지분을 가지는 목적이 단순 투자면 약식보고를 할 수 있다. 경영 참여 목적일 경우엔 보고해야 한다. 국민연금은 ‘거수기’라는 오명을 쓰면서도 그동안 약식보고 특례를 인정받는 대신 기업 경영 참여는 자제했다.
국민연금의 한 관계자는 “약식보고 특례는 투자 전략의 노출을 최소화하기 위해 받아왔다. 지분 보유 목적이 경영 참여로 변경되면 동시에 보유 주식 변동사항을 5일 안에 공시해야 한다. 투자 전략이 거의 즉각적으로 노출되는 것”이라며 “투자 전략 노출로 수익률이 떨어지면 수탁자책임은 물론 100조 원이 넘는 대규모 주식을 보유한 만큼 국내 자본시장안정화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만약 국민연금이 대한항공에 주주제안을 하면 지분 보유 목적이 경영 참여로 변경되고, 약식보고 특례 대상에서 제외된다”며 “경영 참여를 요구하는 국민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은 잘 알지만 현행 제도 아래서 당장 경영에 참여하는 일은 쉽지 않다”고 덧붙였다.
국민연금의 다른 관계자는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으로 여러 제약을 해소하는 게 먼저”라며 “기금운용 정책을 수립하는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가 스튜어드십 코드를 중심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문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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