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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에 대처하는 직장인의 자세 '녹음의 일상화'

오픈채팅방에서 대처법 공유…법적 대응 위해선 '증거 확보 필수' 인식 확산

2018.04.24(Tue) 15:18:06

[비즈한국] 대형마트 직원 A 씨(46)는 밀린 월급을 요구하다 직장 상사로부터 욕설과 위협을 들었다. 그럴 때마다 A 씨는 녹음을 해뒀다. 녹취록이 법적 분쟁에서 증거로 사용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김 씨는 “처음엔 상사가 욕을 하거나 위협을 가한 걸 부인했지만 녹취파일을 공개하면 태도가 변했다”며 “노동청도 이를 근거로 조사 중”이라고 말했다. 

 

일상적으로 모든 통화를 녹음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회사원 B 씨(45)는 전화 애플리케이션을 별도로 다운받아 ‘모든 통화 자동녹음’ 기능을 사용한다. 그는 “평소 모든 통화가 녹음돼 혹시 업무 지시사항을 제대로 못 들었어도 안심이 된다”며 “현행법으로 양자 간 통화 녹음은 불법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어 나중에 문제가 되면 바로 증거로 활용할 수도 있다”고 전했다.​

 

최근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 이재환 CJ파워캐스트 대표 등 ‘오너일가’ 갑질에 이어 스타트업 ‘셀레브’ 임상훈 대표의 직원에 대한 갑질 논란이 사회적 공분을 사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일반 직장인들 사이에서도 참아왔던 직장 내 폭력을 폭로하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갑질에 응수할 만한 방법으로 사내 녹취가 확산되는 추세다. 녹취는 위법 행위의 직접적인 증거가 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직장인들 사이에서 갑질에 응수할 만한 방법으로 사내 녹취가 확산되는 추세다.


‘비즈한국’은 23일 직장 내 불공정한 갑질을 바꾸기 위한 전문 법률가와 노무사들이 봉사하고 있는 ‘직장갑질119’ 오픈채팅방에 들어가 봤다. 지난해 11월 문을 연 직장갑질119는 성심병원 간호사들의 장기자랑 사건을 전 국민이 알게 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시민단체다.​ 현재 이 오픈채팅방에는 직장인과 노무사, 변호사 등 800여 명이 들어와 있다. 

 

오픈채팅방에선 직장에서 경험한 폭행, 욕설에 따른 상담부터 근로 계약 갑질, 명예훼손까지 상담사례는 다양했다. 직장갑질119에 따르면 지난해 11월부터 4월 15일까지 5개월여 동안 직장 내 폭행을 당했다는 제보는 200여 건에 달했다. 아울러 조현민 전 전무 사태가 불거진 뒤 최근까지 제보된 건은 15건이다. 

 

특히 조 전무 사례와 똑같은 고성이나 폭언을 당한 피해자들에게 상담사들은 대처방법으로 우선 녹음해둘 것을 주문했다. 박점규 직장갑질119 운영위원은 “처음 오픈채팅방을 열었을 때와 비교하면 요즘은 직장에서 괴롭힘을 당하면 녹음해야 한다는 인식이 늘었고 관련한 조언도 항상 하고 있다”며 “이 방에서 법률가와 상담하면서 증거가 결정적이라는 걸 알게 됐기 때문에 지금은 피해자들끼리 서로 ‘녹취의 생활화’를 강조하고 정보를 공유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직장인들의 고민상담 창구인 ‘직장갑질119’​ 오픈채팅방에서 상담사와 대화에 동참한 직장인들은 서로 녹취하라고 조언한다. 사진=직장갑질119 오픈채팅방 캡처


그러면서 “규모가 작은 회사에 다니는 일반 직장인들은 피해 호소에도 2·3차 보복성 피해를 입는 경우도 있다”며 “실제 그런 고민을 하는 분들도 많은데 결국 시작은 ‘용기’다.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끊고, 노동청에 신고하고, 증거를 수집하는 등 두려워하기보다는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조언한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들끼리 펜 녹음기, 휴대전화 녹음기 등 녹음수단과 녹음방법 등을 공유하기도 했다. 직장인 C 씨는 “휴대전화는 통화를 하면서 녹음을 할 수 있지만 펜 녹음기는 즉석에서 녹음할 수 있어 좋다”며 “주로 온라인을 통해 구매한다”고 말했다. 실제 ‘쿠팡’ ‘11번가’ 등 온라인 쇼핑몰에 들어가 ‘녹음기’를 검색해보면 펜, USB, 시계, 심지어 계산기까지 각양각색의 녹음기를 볼 수 있다.  

 

이 같은 변화는 최근 대한항공 사건의 영향이 크다는 분석이다. 당초 대한항공은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에 올라온 조 전무의 갑질 폭로 글에 의혹을 부인했으나, 당시 상황을 녹취한 제보자가 등장하고 과거 자사 직원에게도 욕설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녹취록이 추가로 폭로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한 노무사는 “을의 위치에 놓인 하급직원 입장에선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녹취록을 폭로, 반격했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서울 용산역 인근 전자상가 매장에 진열된 다양한 녹음기들. 사진=김상훈 기자


서울 용산역 인근 전자상가에서도 이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이 일대 ‘카메라’ ‘녹음기’ 등 특수기기를 판매하는 매장 주인은 “주로 직장인들은 대화나 회의 녹음하려고, 학생들은 강의 녹음하기 위해 녹음기를 사간다”며 “볼펜이나 USB 크기의 소형 녹음기 등은 하루 종일 켜놔도 용량에 문제가 없고 다른 사람 눈에 잘 띄지 않아 많이 찾는 편”이라고 말했다. 

 

데이터복구 업체들도 요즘 문의가 끊이지 않는다. 휴대전화 통화록 녹취나 카카오톡 대화가 법정에서 광범위하게 증거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일부 업체에서는 재판 증거용으로 따로 복구자료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한 데이터복구서비스업체 관계자는 “주로 카카오톡 대화나 사진·영상 등의 복원 문의가 많다”며 “최근 소송에서 복구자료가 증거물로 자주 제출되기에 이 같은 의뢰는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라고 말했다.  

김상훈 기자

ksanghoon@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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